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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과정

6두품 출신 도당 유학생들의 활동

① 최치원은 당의 학문을 많이 깨달아 얻은 바 많았으며, 귀국하여 이를 널리 펴 보려는 뜻을 가졌으나, 그를 의심하고 꺼리는 사람이 많아 그의 뜻이 수용되지 않자, 대산군(전북 태인) 태수로 나가게 되었다. 그가 귀국했을 때에는 난세가 되어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므로, 스스로 불우한 처지를 한탄하며 다시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 풍월을 읊으며 세월을 보냈다. 〈삼국사기

② 원성왕 5년 9월, 자옥을 양근현(경기 양평)의 수령으로 삼으니, 집사 모초가 반박하여 말하기를 “자옥은 문적(독서삼품과)으로 관직에 나오지 않았으니 수령직을 맡길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에 시중이 말하기를 “그가 문적 출신은 아니지만, 일찍이 당에 가서 학생이 된 일이 있으니 어찌 등용하지 못하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이에 왕이 좇았다. 〈삼국사기

1. 6두품 출신의 도당 유학생이 반신라적인 태도를 보인 까닭은 무엇인가?

2. ②를 읽고, 독서삼품과 출신과 도당 유학생 출신이 받은 대우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자.

신라 말기 선종 불교의 영향

교종은 경전의 이해를 통하여 깨달음을 추구하는 이론 불교이다. 이에 비하여, 선종은 방편에 지나지 않는 문자를 넘어서 구체적인 실천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는다는 실천 불교이다. 선종은 통일 전후에 신라에 수용되었으나, 널리 퍼지지는 못하였다. 784년에 도의가 본격적으로 남종선을 배우고자 당나라에 간 이래 혜소, 혜철, 무염 등이 뒤를 이었고, 이들 선사들은 820년대 초에 처음 귀국한 도의를 뒤따라 차례로 귀국하였다. 신라 사회의 변화로 선종이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기 시작하였으나, 도의 자신은 교종의 반발로 서울인 경주에서 교화의 기반을 마련하지 못하고 설악산에 은거하고 말았다. 대신 도의보다 조금 늦게 귀국한 홍척은 흥덕왕과 같은 왕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선문 9산의 대부분은 왕실이나 중앙 귀족이 아니라, 이 시기에 새롭게 부상한 지방 세력, 곧 호족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9산 선문의 개창조를 비롯한 선승은 호족 출신이나 중앙 귀족 출신으로서 지방에 낙향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이들 선승을 후원하여 산문을 개창하게 한 지원 세력도 지방 호족이었다. 그래서 선종 사원은 산문을 후원하는 호족의 근거지와 가까운 지방에 자리잡았다. 성주산문은 보령 지방에 대규모 장원을 가지고 있던 김흔의 후원을 받아서 개창되었고, 사굴산문은 강릉 지방의 호족으로서 진골이었던 김주원의 후손인 명주 도독의 후원을 받았다.

1. 교종 불교와 선종 불교는 어떻게 다른가?

2. 선종이 처음 수용되었을 때에 환영받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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