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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리학의 전래

성리학의 전래

고려 후기에는 성리학이 전래되어 사상계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각 부분에 걸쳐 큰 영향을 주었다. 남송의 주희가 집대성한 성리학은 종래 자구의 해석에 힘쓰던 한⋅당의 훈고학이나 사장 중심의 유학과는 달리, 인간의 심성과 우주의 원리 문제를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신유학이었다.

고려에 성리학을 처음 소개한 사람은 충렬왕안향이었다. 이제현은 원에 설립된 만권당에서 원의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였다. 그는 귀국한 후에 이색 등에게 영향을 주어 성리학 전파에 이바지하였다. 공민왕 때, 이색정몽주, 권근, 정도전 등을 가르쳐 성리학을 더욱 확산시켰다.

성리학을 수용한 사람은 대부분 신진 사대부였다. 이들은 현실 사회의 모순을 시정하기 위한 개혁 사상으로 성리학을 받아들였으며,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측면보다 일상 생활과 관계되는 실천적 기능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유교적인 생활 관습을 시행하고자 소학과 주자가례를 중시하고, 권문세족과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였다. 이후 고려의 불교는 쇠퇴하게 되었고, 성리학이 새로운 국가 사회의 지도 이념으로 등장하였다.

읽기자료

성리학의 수용과 발전

안향은 학교가 날로 쇠퇴함을 근심하여 양부(兩府)에 의논하기를 “재상의 직무는 인재를 교육하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습니다. ……” 하고, …… 만년에는 항상 회암 선생(주자)의 초상화를 걸어 놓고 경모하였으므로 드디어 호를 회헌이라 하였다. 〈고려사〉
성균관을 다시 짓고 이색을 판개성부사 겸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 이색이 다시 학칙을 정하고 매일 명륜당에 앉아 경(經)을 나누어 수업하고, 강의를 마치면 서로 더불어 논란하여 권태를 잊게 하였다. 이에 학자들이 많이 모여 함께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는 가운데 정주(程朱) 성리학이 비로소 흥기하게 되었다. 〈고려사〉
안향 영정(경북 영주 소수 서원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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