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 집권 이후의 사회 변동기를 지나며 불교계에서도 본연의 자세 확립을 주창하는 새로운 종교 운동인 결사 운동이 일어났다. 지눌은 명리에 집착하는 당시 불교계의 타락상을 비판하였다. 그는 승려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독경과 선 수행, 노동에 고루 힘쓰자는 개혁 운동인 수선사 결사를 제창하였다. 송광사에 중심을 둔 수선사 결사 운동은 개혁적인 승려들과 지방민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처럼 조계종은 지눌이 수선사를 열면서부터 매우 흥성하였다. 그리하여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는 불교계의 중심적인 종파가 되어 많은 승려를 배출하였다.
지눌은 선과 교학이 근본에 있어 둘이 아니라는 사상 체계인 정혜쌍수를 사상적 바탕으로 철저한 수행을 선도하였다. 또, 지눌은 내가 곧 부처라는 깨달음을 위한 노력과 함께, 꾸준한 수행으로 깨달음의 확인을 아울러 강조한 돈오점수를 주장하였다. 선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포용하여 교와 선의 대립을 극복하고자 한 지눌의 논리는 고려 불교가 지향하던 선교 일치 사상을 완성한 것이었다.
지눌의 결사 운동은 지눌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발전하였다. 혜심은 유불일치설을 주장하며 심성의 도야를 강조하여 장차 성리학을 수용할 수 있는 사상적 토대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요세는 백성의 신앙적 욕구를 고려하여 강진 만덕사(백련사)에서 백련 결사를 제창하였다. 자신의 행동을 진정으로 참회하는 법화 신앙에 중점을 둔 백련 결사 역시 지방민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었고, 수선사와 양립하며 고려 후기 불교계를 이끌었다.
그런데 원 간섭기에 이르러 개혁 운동의 의지가 퇴색하고 귀족 세력과 연결되어 불교계는 다시 폐단을 드러내었다. 사원은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상업에도 관여하여 부패가 심하였다. 이에 교단을 정비하려는 보우 등의 노력이 있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성리학을 사상적 배경으로 대두한 신진 사대부는 이와 같은 불교계의 사회⋅경제적인 폐단을 크게 비판하였다.
지눌의 정혜결사문
지금의 불교계를 보면, 아침 저녁으로 행하는 일들이 비록 부처의 법에 의지하였다고 하나, 자신을 내세우고 이익을 구하는 데 열중하며, 세속의 일에 골몰한다. 도덕을 닦지 않고 옷과 밥만 허비하니, 비록 출가하였다고 하나 무슨 덕이 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