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 이후 근대 인쇄술로 간행된 각종 신문과 출판물은 개화 사상과 애국 계몽 사상을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우리 나라 최초의 신문은 1883년 박문국에서 간행한 한성 순보였다. 한성 순보는 국내 소식과 함께 서양의 신문화를 소개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으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폐간되었다.
1896년에 서재필이 창간한 독립신문은 대중을 계몽하여 근대화를 촉진하려는 한글판과, 외국인에게 우리의 처지를 홍보하는 영문판으로 발행되었다.
국⋅한문 혼용체를 사용한 황성신문은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어 을사조약을 비판하고 민족 의식을 고취하였다. 한글 보급에 크게 기여한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 반대 운동, 국채 보상 운동 등을 주도하였다.
이 밖에, 한글 신문인 제국신문, 국⋅한문 일간지인 천도교의 만세보 등도 국권 회복 운동을 지원하고 민족 의식을 높이는 데 앞장섰다.
일제는 반일 보도를 차단하기 위하여 신문에 대한 사전 검열을 시도하였고, 1907년에 신문지법을 만들어 자주 독립을 요구하던 민족 언론을 탄압하였다.
대한매일신보와 베델
베델은 1904년에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런던 데일리 뉴스’의 특파원으로 내한하여 양기탁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고, 고종의 친서를 게재하는 등 항일 언론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또, 1907년에는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일제가 탄압하는데도 대한매일신보가 항일 운동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영국인 베델이 사장이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