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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Ⅰ. 민족의 새벽과 부족 국가의 자라남
  • (3) 최초의 부족 국가 〈고조선〉

(3) 최초의 부족 국가 〈고조선〉

석기 시대는 도구가 유치하여 생산이 넉넉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회의 발달은 매우 더디며, 따라서 우리 조상들은 오랫동안을 원시적인 씨족 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차차로 시대가 흘러 사회가 발달함에 따라, 몇 개의 씨족은 뭉쳐서 부족 사회를 이루고, 또한 여러 부족은 서로 연맹하여 조그만 나라를 만들게 되었다. 이리하여 우리 나라 여러 곳에 많은 부족⋅국가가 만들어졌지만, 그 중 북쪽에 위치한 고조선, 부여, 고구려는 대륙 사회의 영향을 받음이 잦았기 때문에 일찍부터 발달된 부족 국가를 이룩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하여 동해안 및 남방의 여러 종족은 매우 뒤떨어진 사회를 이루고, 부족 국가를 만듬이 늦었던 것이다.

고조선의 일어남

대동강 유역은 기름진 넓은 평야로 일찍부터 서해안을 끼고 들어온 사람들이 농업 사회를 만들었고, 또한 중국과 가까와 자연 왕래도 잦으매, 그의 영향을 받아 다른 지방보다도 가장 뛰어난 사회를 이루고, 큰 세력을 가진 부족 국가를 만들 수 있었다.

이 지방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나라가 단군조선(檀君朝鮮)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4,300년 전에 단군왕검(檀君王儉)은 나라 터를 닦으시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셨으니, 이 분이 곧 고조선의 시조이시며, 또한 우리가 받드는 민족의 시조이시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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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조선에 관한 삼국유사의 기록
단군 조선에 관한 삼국유사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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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조선 시대는 아직 제정 일치(祭政一致) 시대로서, 단군은 고조선 부족 국가의 정치를 맡아 보는 군장(君長)인 동시에, 또한 수호신(守護神)을 받드는 제사장이기도 했다. 그러나 단군 조선이 천 수백 년 내려오는 동안에, 인구가 늘어가고 산업이 발달하며, 또한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점차 사회가 깨쳐지니 여기에 이른바 기자 조선(箕子朝鮮)이라는 사회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 기록에 의하면, 기자 조선은 중국의 성인(聖人)인 기자가 동쪽으로 가서 단군의 뒤를 이어 세운 나라라고 하나, 이것은 옛 조선의 왕(王)이 중국을 숭배하던 그릇된 사상에 의하여 기자를 자기 조상으로 꾸민 엉뚱한 이야기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기자 조선도 고조선이 발달한 뒤의 모양인 것이다. 이 때에는 이미 고조선은 문화가 자못 발달하여, 진보된 나라의 제도를 갖추고, 여덟 조목의 법금(法禁)까지도 행하여졌으며, 제사와 정치는 분리되어, 왕은 정치만을 맡아 보는 사회로 되었다.

위만의 침략

기자 조선은 점차 강성해져서, 한 때에는 요하(遼河)까지 그 세력하에 들어간 일도 있지만, 그 후 연(燕)나라의 침략에 의하여 청천강(淸川江) 이북의 땅을 잃게 되었다. 기자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준왕(準王) 때 중국에 한(漢)이 일어나서 연을 합하매, 연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한(漢)을 배반하고 기자 조선에 망명하여 들어왔다. 준왕은 위만의 무리를 받아들여 북방에 살게 하였던 바, 야심을 품게 된 위만은 몰래 자기의 세력을 길렀다가 돌연 서울에 쳐들어와 나라를 뺏으니 준왕은 하는 수 없이 남쪽 진국으로 도망하였다.

이리하여, 위만은 도둑질로 고조선을 빼앗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그는 외국 사람의 처지에서 조선을 지배한 것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조선의 풍속을 본따고, 조선 사람을 관리로 써가며 정치하였다. 위만 조선이라 하여 우리 나라가 이민족(異民族)의 식민지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대로 고조선을 이어 나간 것에 불과한 것이다.

위만 조선은 힘이 강성하여, 이웃의 진번, 임둔, 예맥 등의 작은 나라를 쳐서 합하고, 위만의 손자 우거왕(右渠王) 때에는 남쪽의 진국(辰國)이 한(漢)과 통하려는 것을 방해하여, 공공연하게 한에 대립하니, 한 무제(武帝)는 수륙으로 대군을 보내어 조선에 쳐들어왔다. 위씨 조선은 잘 막아내어 근 일 년 간이나 버티었으나, 내부의 분열로 말미암아 마침내 항복하고 말았다(서기 전 1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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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씨 조선시대의 지도
위씨 조선시대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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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와의 관계

한 무제는 점령한 조선 땅에다 자기 나라의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여, 낙랑(樂浪), 진번(眞番), 임둔(臨屯), 현도(玄菟)의 4군을 두고, 군 밑에는 현을 두었다. 여기에서 우리 나라 북쪽은 한 나라 영토로 들어갔으니, 가장 일찍부터 문화가 발달되고 국력이 억세어, 장차 우리 민족 통일의 주체(主體)가 될 것으로 기대되었던 고조선의 기반이 이에 뒤집히게 된 것은 아깝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한 군현의 설치는, 도리어 외민족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맹렬한 민족의 반항을 일으키어, 새로운 세력이 여러 지방에서 발생하였다. 따라서, 4군은 설치 후 26년 만에 진번, 임둔의 두 군이 없어지고, 또한 그 후 현도군도 만주 지방 멀리 내어쫓기니, 여기에 우리 나라 안에는 낙랑군만이 남게 되었다. 한 때 낙랑군의 남쪽에 대방군(帶方郡)을 세운 일이 있지만, 이들 2군은 고구려와 백제에 부대끼어, 마침내 서기 313년에 멸망하고 마니, 4군이 설치된 지 약 420년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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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4군의 지도
한 4군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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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4군 중에서도 대동강 유역 일대에 자리를 잡은 낙랑군은 가장 세력이 강하여 끝까지 존속하였을 뿐 아니라, 또한 본국과의 교통이 편리한 곳에 위치하였으므로 호화로운 한 문화가 직접 수입되어, 이른바 낙랑 문화의 찬란한 꽃이 피게 되었다. 평양 남쪽 대동강의 건너편 지방인 낙랑군 자리에는 지금도 토성(土城)과 많은 옛 무덤이 남아 있는데, 그 속에서 나온 거울, 질그릇 및 여러 장식품 등은 융성한 낙랑 문화의 일면을 표시하여 주고 있다. 또한 평안 남도 용강군에는 그 당시에 세운 우리 나라 최고의 염제비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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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 문화의 유물
낙랑 문화의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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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낙랑 문화는 군현의 한인 관리들이 본국의 문화를 옮겨온 것이지만, 이는 자연히 본토인에게도 영향을 끼치어, 우리 민족의 문화와 사회를 발달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그 반면에 고조선 고유의 순박한 풍속이 흩어져서, 이른바 8조(條)의 법금이 60여조로 늘어가게끔 사회가 복잡하여졌음은 불가피한 결과였다.

〈알아두기〉

개천절. 위만. 한 사군(四郡). 낙랑 문화. 염제비. 기자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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