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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삼국의 사회와 문화

(4) 삼국의 사회와 문화

삼국 시대 정치와 사회

삼국의 초기에는 아직 씨족 사회의 성격이 남아 있었으나, 차차 사회가 발전하여, 왕을 중심으로 한 귀족 사회로 발전하였다.

삼국의 정치 제도를 보면, 우선 고구려는 국왕 밑에 대막리지, 대대로 등의 관리가 정치를 하고, 서울과 지방은 5부의 행정 구역으로 각각 나누어 다스렸다. 백제는 국왕 밑에 좌평(佐平-대신) 등 16등급의 관리가 있고, 내외 22부의 관청이 있으며, 서울은 5부, 지방은 5방으로 나누어 정치를 하였다. 신라는 처음에 박, 석, 김의 3성의 왕이 교대하여 왕위에 올랐으나 후에는 김씨의 세습으로 되고, 특히 처음에는 성골(聖骨)만이 왕이 되었지만 무열왕부터는 성골이 끊어지고, 진골(眞骨)이 대신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왕 밑에는 이벌찬(伊伐湌) 이하 17등급의 관리가 왕을 보좌하며, 정치하고, 서울은 6부, 지방은 5주로 분할하였다. 또한 신라 초기에는 화백(和白)이라는 씨족 사회 제도가 남아 있어서, 국가의 중요한 일은 민주적으로 의논하였는데,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가결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삼국은 그의 위치와 환경에 따라서 사회 발전에 차이가 생기고, 정치 제도는 다르지만, 왕을 중심으로 한 귀족 정치라는 점에 있어서는 똑 같으며, 아래 계급에는 평민과 노예가 있어서 직접 생산에 종사하였다. 그 당시의 가장 중요한 산업은 농업이었는데, 아래 계급 사람들은 귀족들의 차지한 토지를 경작하여, 그들의 생활을 담당한 것이다.

삼국은 모두 같은 민족이니만큼 언어, 풍속, 생활의 모양이 비슷하였으나 그 환경의 차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생겼던 모양이다. 고구려는 험한 산골짜기에 위치하였으므로, 그 나라 사람들은 억센 기풍을 가지고 사냥을 좋아하며, 활을 잘 쏘고 특히 3월 3일에는 사냥으로 무술을 다투는 풍속이 있었다. 생산물이 적기 때문에 식량을 절약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였으며, 또한 추운 지방이므로 온돌을 만들어 추위를 막았다. 머리에는 새 깃으로 장식한 모자를 쓰고, 여자들은 수건을 접어 썼으며, 또한 주름치마를 입는 의복의 풍속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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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풍속
고구려의 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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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 신라의 의복과 풍속도 대개 고구려와 비슷하였다. 특히 신라는 정월 보름날에 약밥을 먹고, 그것을 까마귀에게 주는 풍속이 있었으며, 팔월 보름날은 가배(嘉俳)라 하여 1년 중의 대명절로 하고, 여자는 길쌈을 경쟁하며, 남자는 활쏘기를 하였다. 또한 독특한 화랑도(花郞道)가 있어서, 무사정신을 길렀고, 학문을 닦으며, 인격을 수양하여 신라가 발전하고 나아가 삼국을 통일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삼국의 학문

중국의 한문은 일찍부터 한인과의 교섭이 잦았던 고구려에 먼저 들어와서, 이미 건국 이전부터 귀족들 간에는 한문이 사용되었고, 백제도 한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북쪽에서 나온 사람들이 만든 나라이므로, 역시 건국 이전부터 귀족 계급 간에 한문이 행하여졌을 것이다. 다만 신라는 그의 지리적 위치 관계로 중국의 영향을 받음이 가장 늦어서, 훨씬 후세에 이르러 비로소 고구려와 백제를 통하여 한문이 전래되었다.

한문이 삼국에 보급됨에 따라 유교가 발달하여, 고구려에서는 소수림왕 2년에 태학(太學)을 세워, 귀족의 자제를 교육하였고, 후에 지방 여러 곳에 일반 서민들이 배우는 경당(扃堂)이란 글방이 생겼다. 백제는 일찍부터 박사의 제도가 생기어 여러 가지 학문을 가르치니, 우수한 학자가 많이 나와서 멀리 일본에까지 한문과 의학 및 여러 가지 기술을 전하여, 그들의 뒤떨어짐을 깨쳐 주었다. 신라에 한 문화가 보급된 것은 22대 지증왕 이후부터이며, 이 때에 비로소 중국식으로 임금을 왕(王)이라 부르고, 국호를 한자로 정하였으며, 중국의 법과 제도를 실시하였다.

삼국에 한문과 유학이 넓혀짐에 따라 많은 기록이 생기고, 특히 국사의 편찬이 활발하여졌다. 고구려에는 일찌기 유기(留記) 100권이 전하여 내려오던 바, 영양왕 11년에 태학박사 이문진(李文眞)이 이를 줄여서 신집(新集) 5권을 만들었으며, 백제에는 근초고왕 때에 박사 고흥(高興)이 서기(書紀)를 편찬했고, 신라에서는 진흥왕 6년에 거칠부(居柒夫) 등이 국사를 만들었다

또한 우리 나라 사람들은 옛날부터 노래와 춤을 좋아하여 삼국 시대에도 시가(詩歌)가 상당히 발달하였던 것이나, 우리 나라 고유의 문자가 없어서, 지금은 대부분이 전하지 아니 하고, 다만 신라에서 한문의 음과 뜻을 빌어 쓴 향가(鄕歌) 몇 수가 지금까지 전하여질 따름이다.

불교의 들어옴

삼국 시대에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자연을 숭배하는 원시 종교가 있어서, 모든 자연물에 신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였고, 특히 하늘과 해를 숭배하여 계절에 따라 국가적으로 제사를 지냈으며, 또한 무당이 있어서, 점을 치고 푸닥거리를 하는 풍속이 있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외래 종교인 불교가 들어오자, 삼국이 널리 믿게 되어 삼국 사회에 끼친 바 영향은 매우 컸다.

불교가 처음 우리 나라에 들어오기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 중국의 전진(前秦)에서 순도(順道)가 전하여 왔으며, 그 후 백제는 침류왕(枕流王) 원년에 동진(東晋)에서 서역 중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바다를 건너 불교를 전하였다. 신라는 눌지왕(訥祗王) 때 고구려 중 묵호자(墨胡子)가 들어와서 전도하였다 하나, 실제로 나라에서 허가하여 넓혀진 것은 이차돈(異次頓)이 순교한 후인 법흥왕(法興王) 15년이었다.

그 후 삼국은 불교가 성행하여 큰 절이 많이 세워지고, 또한 유명한 중이 배출하여 중국과 인도에 가서 법(法)을 구하고, 일본에 건너가 전하기도 하였다. 당시의 명승으로는 고구려의 담징(曇徵), 백제의 관륵(觀勒), 신라의 원광(圓光), 자장(慈藏) 등이 있다.

삼국의 예술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삼국 시대 사람들은 유교와 불교를 통하여 들어오는 외국의 예술을, 그들 고유의 전통에 잘 융화시켜 각기 찬란한 꽃을 피게 하였으며, 특히 불교의 영향이 자못 커서 불교 예술에 있어서 볼 만한 것이 많았다.

고구려의 예술은 주로 고분을 통하여 살필 수 밖에 없는데, 귀족의 가옥 양식으로 만든 용강의 쌍영총(雙楹塚)과 광개토왕의 무덤인 듯한 통구의 장군총(將軍塚)은 당시의 건축 양식을 전하는 유적이다. 또한 고구려는 회화가 발달하여, 현재 남아 있는 고분의 벽화는 그들의 놀라운 솜씨를 보여 주며, 특히 일본에 건너가서 호오류우 절(法隆寺) 벽화를 그린 담징은 가장 유명하다. 음악도 성하여 왕산악(王山岳)은 거문고(玄琴)를 만들고 많은 악곡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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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강의 쌍영총 내부
용강의 쌍영총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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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건축 예술로서는 부여의 오층탑, 익산의 미륵사탑 등이 남아 있으며, 그림으로는 아좌태자(阿佐太子)가 그린 일본의 쇼오토쿠 태자의 화상이 유명하여 백제 예술의 발달을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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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의 오층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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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고유한 성격을 잘 보존하며 대륙 문화를 받아들여 독득한 신라 문화를 발달시켰으며, 특히 불교 예술에 있어서 훌륭한 솜씨를 나타냈다. 건축으로는 선덕여왕 때 만든 경주의 분황사탑과 첨성대(瞻星臺)가 남아 있으며, 공예품으로는 경주 고분에서 발굴된 각종의 부장물이 있어서, 당시 신라의 찬란한 예술의 모양을 보존하고 있다. 화가로는 솔거(率居)가 이름이 높고, 음악으로는 대가야의 우륵(于勒)이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에 들어와 오늘날에 이르렀으며, 백결선생(百結先生)은 대악(碓樂)이란 방아 곡조를 지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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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첨성대
경주의 첨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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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금관
신라의 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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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두기〉

대막리지. 이벌찬. 화백(和白). 골품. 화랑도. 한가위. 경당. 향가. 순도. 원광법사. 이차돈. 거문고. 우륵. 첨성대.

〔학습 활동〕

요전 활동에 있어서 처음 해 보는 일이라, 생각하던 것보다 서투른 점과 어려운 일이 대단히 많았으나, 선생님께서는 “모두 열심히 공부해 온 것을 알 수 있다.” 하시고, 칭찬하여 주셨다.

선생님 말씀을 듣는 것도 유익하고 재미 있으나, 직접 자기가 알아 보고자 노력하면 그럴수록 더욱 알아 보고 싶은 욕심이 늘어가고, 재미가 나는 데에 우리들 자신도 놀랐다.

이번에는 우리가 자랑하는 삼국 시대를 배웠다. 여기에는 먼저 것보다 더 재미있는 문제가 많이 있고, 조사하기도 좀 쉬울 것 같아서, 우리들은 각 분단에서 굉장히 문제를 많이 내었더니, 선생님도 참 좋아하시면서, 시간이 부족할 것이니, 다음 것만 주로 공부하자고 하시었다.

(1) 우리 나라 지도(물론 만주 지방도 들어감)를 여러 장 그리고, 삼국의 세력이 서로 변하는 순서를 밝혀 보자.
(2) 고구려 광개토왕의 비석과 무덤에 대하여 여려 가지 재료를 모아 보자.
(3) 고구려 사람이 백제나 신라 사람보다 용감하고 싸움을 잘 하게 된 원인이 어디 있는가 생각하여 보자.
(4) 신라가 다른 나라보다 늦게 발달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아 보자.
(5) 삼국 시대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는 우리 나라의 풍속이 많은데, 알 수 있는 데까지 조사하여 보자.
(6) 을지문덕 장군이 싸워 이긴 살수의 싸움은 우리의 자랑인데, 고구려는 그 후 얼마 아니 되어 당나라에 망하였다. 그 원인을 알아 보자.
(7) 불교가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그 중의 중요한 것 몇 가지를 들고 설명하여라.

여기까지 선생님이 쓰실 때 옆에 있던 창범이가 “선생님!” 하고 손을 번쩍 들었다.

“선생님 이번에는 요전보다도 재미가 없는 것 같아요, 사실 우리 분단은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지 않아요?” 하고 섭섭한 듯이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껄껄 웃으시면서 “알았다. 조금만 기다려라.” 하시더니, 그대로 다음 문제를 쓰셨다.

(8) 고구려 시대에 이루어진 문화의 자취를 옛 무덤에서 찾아 보기 위하여, 여러 책에서 그림을 구하여 그 안에 있는 의복, 풍속, 신앙심 등을 알아 내자.
(9) 백제의 위례성, 웅진성, 사비성의 남아 있는 모양을 알아 보고, 그 역사를 다시 한 번 되풀이하여 보자.
(10) 화랑의 생활과 정신이 오늘의 우리와 관계가 없는가 살펴 보자.

우리들은 신라 시대에 관한 조사가 없는 것이 유감이었으나, 선생님이 하라고 하시는 문제만을 가지고, 곧 조사를 시작하기로 하였는데, 고구려의 훌륭한 옛터가 공산 오랑캐들에게 짓밟히고 있어 우리들의 공부까지도 방해하고 있음을 생각할 때, 남북 통일을 하루 바삐 이루어, 우리 강토를 찾아야겠다는 결심을 새로이 하는 마음이 모든 학우들의 가슴 속에 사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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