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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Ⅳ. 오랑캐들과 싸우는 고려(高麗)
  • (4) 안으로 혼란되는 고려

(4) 안으로 혼란되는 고려

외척 세력의 커짐

고려 초기의 문화적 발달과 대외적인 안정기의 틈을 타서, 태평 세월에 썩어든 외척들이 권세에 눈이 어두워 나라를 어지럽히기 시작하였다.

이자겸(李資謙)의 집안은 대대로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어 오더니, 인종 때는 더욱 깊은 인연을 맺어서 모든 권세를 한 몸에 지니고, 말할 수 없는 행패를 부렸다.

남의 땅을 빼앗고, 재물을 강탈하며, 왕에게 충성된 자를 몰아 내고, 필경은 자기가 왕위에 오르려는 음모를 꾸미기에 이르렀다. 인종은 이자겸을 물리치려고 계획하다가 실패하여, 오히려 그 감시를 받게 되더니, 같은 이자겸의 일파에서 세력 다툼이 일어나 이자겸이 척준경(拓俊京)에게 잡혀 귀양가고, 오랫동안 궁중을 휘두르던 이씨 일파의 세력도 무너져버렸다. 그 후 척준경도 이자겸에 못지 않게 권세와 행패를 부리다가, 정지상(鄭知常) 등에게 쫓겨났다.

이와 같이 부패된 귀족들이 나타나면서부터, 국가보다 개인의 사욕을 채우려는 무리가 많아지고, 지금까지의 여러 가지 좋은 제도는 무너지기 시작하여, 문화 발달에 나쁜 영향이 나타나게 되니, 귀족 정치는 차차로 몰락의 길을 걸어갔다.

사상적 대립

중앙에서 혼란이 일어나자 일반 백성들의 마음도 동요되어, 풍수 사상(風水思想)에 의한 여러 가지 유언비어가 나타났다.

때마침, 여진이 나라를 금(金)이라 고치고 고려에 대하여 교만하기 짝이 없게 구니, 북진 정책을 큰 목표로 삼던 고려로서 금에게까지 사대주의적 외교를 한다는 것은, 크나큰 불만이었다. 이 때 풍수설을 내세워, 평양으로 서울을 옮기면 금을 정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 사람이 서경의 중 묘청(妙淸)이었다.

열렬한 묘청의 주장에 인종도 한 때는 마음이 움직였으나, 유학자들의 반대로 성공하지 못하게 되매, 묘청은 인종 13년(1135)에 평양에서 난리를 일으켜 국호를 대위국(大爲國)이라 하고 약 1년 동안 싸웠으나, 토벌 대장 김부식(金富軾)에게 견디지 못하고 패하였다.

묘청의 생각하는 바는 실패하였으나, 이것은 독립 정신이 강하고, 북진을 주장하는 불교의 사상과, 사대주의를 내세우는 유학자와의 대립이기도 하였다. 묘청의 이론이 비과학적인 풍수설을 내세웠고, 국제 정세를 잘 알지 못한 데에 그릇된 점이 있다고는 하나, 묘청의 실패로 사대주의가 일어나, 북벌 정신은 꺾이고, 수치스러운 고려 시대의 후반기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은 유감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문무의 알력

인종 때의 두 내란은 고려 사회가 기울어져 감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많은 토지가 법을 잃고 권세가들에 의하여 독점되며, 관리에게 줄 토지도 부족하게 되자 더 한 층 혼란이 일어났다. 원래 고려에서는 무신을 업신여기고 문신만 후히 대접하더니, 군대 소유의 토지까지도 줄이게 되자, 무신의 불평은 날로 커갔다. 18대 의종(毅宗)이 학문을 좋아하는 나머지, 무신을 지나치게 학대하고 문신의 시중까지 들게 하므로, 마침내 무신들은 지녔던 칼을 뽑아 들게 되었다(1170년).

정중부(鄭仲夫), 이고(李高), 이의방(李義方)은 의종이 행차하는 기회를 타서 따라다니는 문신을 모조리 처치하고, 개경에 들어와 왕을 쫓고 문신을 몰아낸 다음, 모든 요직을 완전히 무신들이 쥐는 중방 정치(重房政治)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정치의 경험이 없는 무인들의 집정은 순조롭지 못하여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고 나중에는 저희들 사이에 마찰이 생겨 서로 다투게 되었다. 따라서 좋은 점보다 나쁜 점이 많았고 정권을 위한 싸움으로, 고려 사회는 혼란을 거듭할 뿐이었다.

한 때는 경대승(慶大升)과 같은 양심적 무신도 나왔으나, 이의민(李義旼)이 나와서 더욱 포악한 정치를 하더니, 드디어 명종 26년(1196년)에 최충헌 형제에 의하여 쫓겨나게 되었다.

무신의 전권

최충헌(崔忠獻)은 무신들에 의하여 흩어진 조정을 수습하고 바로잡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우선 왕에게 봉사 십조(封事十條)를 올려 그릇된 정치를 충고하고, 멀리하였던 문신을 되도록 불러들이니, 어둡던 고려에 또 다시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듯하였다.

그러나, 꿋꿋한 정치를 하기 위하여, 자기의 독재적인 정치적 힘을 만들고자 도방(都房)을 두어 무력을 손에 넣게 되면서부터, 국가의 대권은 최충헌에게 돌아가 그의 일생 동안에 여러 왕을 자기 손으로 바꾸고, 최씨의 세력은 4대에 걸쳐 이어 내리니, 사실상 최씨의 고려가 된 느낌이었다.

최충헌의 아들 우(瑀)가 나서매, 처음에는 옳은 정치를 하는 듯하더니, 말년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충헌과 같이 자기의 권세욕을 채우기 위하여, 정방(政房)을 꾸미고 모든 정치를 독재하였다.

이와 같이 최씨 일파의 정치가 기대하였던 바와는 달리, 지나치게 독재적으로 되매, 민심은 최씨에게서 떠나게 되고, 이에 대한 불만은 승려, 지방 관리, 농민은 물론 노예들의 반란으로까지 나타나 지나친 전제 정치에 반항하게 되었다.

이러한 고려에 새로 일어난 몽고의 난리는 안으로 고려 왕실을 위태롭게 만들었으니, 강화 천도 이후에 최우가 죽고(1249) 그 아들 항(沆)과 손자 의(竩)가 일어섰으나, 국가의 혼란은 계속되었고, 고종 45년(1258) 최의가 부하에게 죽음을 당함으로써 최씨에 의한 무단 정치는 끝났다.

〈알아두기〉

이자겸. 대위국. 정중부. 김부식. 최충헌. 중방. 도방. 문신과 무신의 차별 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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