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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Ⅳ. 오랑캐들과 싸우는 고려(高麗)
  • (5) 몽고와의 관계

(5) 몽고와의 관계

몽고의 침입

몽고족은 흑룡강 상류에 살던 유목민족이었는데, 테무진(鐵木眞)이란 영웅이 나와, 분열되었던 여러 부락을 통일하고 크리루타이의 결정으로 대한(大汗)에 올라(1206), 징기스캉(成吉思汗)이라 하니, 차차 그 세력이 아시아는 물론, 유럽에까지 뻗쳐서 역사상 처음 보는 대 제국을 이루게 되었다.

최충헌의 무단 정치가 한창일 무렵, 만주 지방에는 몽고에 쫓긴 금 나라가 분열되어 걸안족, 여진족이 각각 대요국(大遼國), 동진국(東眞國)을 만들어 고려의 북방을 노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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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원 교체기의 극동
금, 원 교체기의 극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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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안족은 가끔 몽고에 쫓겨, 압록강을 넘어왔으므로 김취려(金就礪)는 나가 싸워서 쫓아내고 혹은 이들을 잡아 토지를 주며 기르니, 걸안장(契丹場)이란 이름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최충헌이 죽은 다음 최우 시대에는 이미 몽고와 고려가 국경을 마주 대고, 서로 국교를 맺고 왕래하게 되었다. 고려에 침입하려는 야심이 생긴 몽고는, 고종 18년(1231) 몽고의 사신이 도중에서 피살된 것을 구실로 살례탑(撒禮搭)이 거느리는 몽고 군대로 국경을 넘었다. 압록강의 수비가 박서(朴犀) 등에 의하여 튼튼하매, 길을 돌아 곧장 개경으로 들어오니, 고려는 하는 수 없이 조약을 맺고 사대 외교로써 몽고에 대하게 되었다.

강화 천도와 삼별초

고려에 대한 몽고의 간섭이 심해지고, 다로하치의 압력이 늘어가니 고려의 몽고에 대한 반항심도 커져 외면으로 화친을 꾸미면서, 이듬해(1232)에는 강화도(江華島)로 도읍을 옮기었다. 이것이 물에 약한 몽고에 대항하려는 계획임을 눈치챈 몽고에서는 여러 차례 군대를 몰아 침입하고, 서신으로 강경하게 개경으로 나올 것을 요구하였으나, 한 번도 강화도에 쳐들어가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반도 안의 방방곡곡이 몽고병에 의하여 파괴되고, 많은 문화재를 잃었으며, 백성들의 고통은 말할 수 없었다.

고종 36년에 최우가 죽고 아들 항(沆)의 정권이 9년 만에 손자 의(竩)로 넘어가자, 피해만 심하여가고, 기다리는 불교의 가호가 나타나지 않자 최씨에 대한 불평이 일어나서, 마침내 최의는 김준(金浚) 등에게 죽고, 이에 따라 몽고에 대한 정책도 변하여, 39년간이나 싸우던 강화도에서 나와 개경으로 환도하게 되니, 이것은 몽고에 굴복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한 중에도 배중손(裵仲孫)이 지휘하는 삼별초(三別抄)는 몽고와 끝까지 싸울 것을 맹세하고, 강화도에 남았다(1270). 원래 삼별초에는 몽고에 잡혀 갔던 군인 출신이 섞여 적개심이 강하여, 고려 왕실과 인연을 끊고, 고려를 식민지로 하려 드는 몽고군을 못살게 굴었다. 강화도에서 진도로 옮긴 삼별초는 남쪽 여러 고을의 후원을 얻어 그 세력이 커지므로, 몽고는 고려 왕실을 이끌고 진도를 함락시켰다. 삼별초는 그 후 제주도로 들어가서 저항을 계속하다가, 원종 14년(1273)에 드디어 평정되고 말았다.

일본 정벌

삼별초는 고려의 무인 정신을 끝까지 나타낸 것으로, 양규, 강감찬, 윤관의 전통을 이은 사람들이었다. 이들마저 몽고의 세력에 굽히게 되자, 고려는 완전히 몽고의 지배 하에 들게 되었고, 건국 이래의 북진 정신을 잃어버린 듯하였다.

몽고는 아시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동쪽 유럽까지 쳐서 크나큰 제국을 이루었는데 구비라이(세조)는 남송을 쫓고 중국을 통일하여 국호를 원(元)이라 하였다(1271).

구비라이는 아시아의 끝에 있는 일본까지 정복할 계획으로, 고려와 힘을 합하여 전함 900척에 3만의 군대를 싣고 합포(지금의 마산)를 떠나(1274) 큐우슈우 북쪽 지방에 이르렀는데, 때마침 폭풍 때문에 되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몽고는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이란 관청을 두어 고려에게 많은 군비를 마련시키고 나서, 충렬왕(忠烈王) 7년(1281)에는 3,500척의 배와 10만 대군으로 일본을 쳤으나 또 다시 폭풍을 만나 실패하였으니, 해전에 경험이 없는 몽고(원)는 일본 정벌을 단념하고 말았다.

몽고와 고려

원 나라의 간섭을 받게 된 고려는 25대 충렬왕 때부터 100년 동안 자주성(自主性)을 잃고, 자비령, 철령 이북의 땅을 빼앗기며, 그들이 시키는 대로 제도를 고치는 등, 독립 국가로서의 면목을 잃게 되었다.

더구나 고려의 세자는 원 나라 서울에 머물게 하고 원 나라 공주를 왕비로 삼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고, 그는 왕이 돌아간 후 고려에 돌아와 왕위를 계승케 했으므로, 환관이나 번역관이 권세를 부리는 경우가 많았다. 원 나라에서는 왕에게 정치 공부를 못하게 하고 학문을 즐기도록 가르쳤으므로, 역대 왕은 정치에 익숙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원 나라는 마음대로 간섭을 할 수가 있었다.

고려와 몽고와의 왕래가 잦아지면서 언어, 풍속, 복장 등의 몽고 풍속이 흘러 들어왔으며, 그 반면에 고려의 발달된 생활 양식이 몽고에 소개되니, 몽고 귀족들은 고려양(高麗樣)이라고 하여 즐기며 이에 따랐다.

학문에 있어서도 충선왕은 원 나라 서울에 만권당(萬卷堂)을 세우고, 고려의 여러 학자들을 불러들여 중국 학자들과 더불어 연구하게 하니, 송 나라 때 유행하던 성리학(性理學)을 안향(安珦), 백이정(白頤正) 등이 수입 소개하기에 이르렀다.

원 나라가 워낙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어, 서방의 자연과학, 천문학, 의학, 건축 등 여러 방면의 문화가 들어올 수 있었고, 서역 사람들도 많이 왕래하여 고려 문화에 새로운 요소를 가져다 주게 되었으니, 목화씨와 화약 제조법이 우리 나라에 알려진 것도 바로 이 시대였다.

〈알아두기〉

징기스캉, 강화 천도. 삼별초. 정동행중서성. 구비라이. 고려양. 성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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