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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고려의 기울어짐

공민왕의 북진 정책

지나치게 넓은 땅을 지배하던 원 나라가 차차로 기울어져, 중국의 한민족이 여기 저기서 일어나더니, 공민왕 17년(1368)에는 주원장(朱元璋)이 원 나라를 쫓고 명(明) 나라를 세웠다. 이 때 공민왕(恭愍王)은 고려 안의 몽고 세력을 몰아내고자 인당(印璫), 유인우(柳仁雨)를 시켜서 국경 지대의 땅을 도로 찾게 하고, 원(元) 나라 식으로 고쳐 부르던 관명, 연호 사용을 폐지하고, 이성계로 하여금 압록강 너머로 요동 지방까지 공격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원 나라가 약해진 틈을 타서, 자주적인 고려를 세우려던 공민왕도, 왕비가 죽은 뒤부터는 나라 일을 돌보지 않고, 요승 신돈(辛旽)의 말을 들어, 그 요사한 꾀에 넘어가서 모든 정치를 신돈에게 맡겨버리니, 다시 일어날 희망이 보이던 고려는 또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신돈은 예술에만 열중한 공민왕을 해치고자 하다가 잡혀 죽고, 공민왕마저 신하들에게 살해되니, 고려는 그 때부터 쇠망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홍건적과 왜구의 북새질

홍건적이란 원 나라 말년에 중원이 어지러워진 틈을 다서 일어난 도적의 무리로서, 명 나라가 일어난 후에도 그 세력은 줄지 아니 하매, 명(明)에서도 홍건적을 치게 되어 몰려 나온 도적 떼는 고려에 넘어 들어왔다. 그 세력이 만주 지방까지 흘러와 공민왕 3년(1359) 겨울에는 압록강을 넘어 고려에까지 들어오고 개경에까지 침입하니, 정세운(鄭世雲) 장군이 수차에 걸쳐 이를 몰아내었다(1361).

홍건적의 난리를 누르고 나자, 남쪽의 왜구가 북새질을 하여 말썽을 부리기 시작하였다. 왜구는 섬 나라 일본에서 살기가 곤란하여 작은 배를 타고 외국 해안을 노리는 도적이었으므로, 그 성질이 질기고 잔악하여 단시간에 전멸시키기가 곤란하였다. 고려에서는, 남쪽 해안은 물론 강화도 근처까지 와서, 양민을 죽이고 도둑질하는 왜구를 단속하도록, 일본 정부에 요청했으나(1368), 일본 정부도 그런 힘이 없었으므로 최무선(崔茂宣)이 연구한 화통, 화포로써 왜적을 쏘아 부수고, 육지에 들어온 왜구를 치며, 대마도의 본거지까지 습격하여 크게 성과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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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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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의 회군

이와 같은 남북의 소란은 기울어져가는 고려의 마지막을 재촉하였으니 정치적 중심이었던 왕실에서는 영명한 군주가 나오지 못한 채, 귀족은 더욱 더 부패의 길을 걷고 있었다.

명 나라의 세력이 점점 커지자, 새로운 명의 세력과 화친하자는 의견과, 원 나라와의 인연을 계속해 갖자는 이인임(李仁任) 일파의 의견이 대립되면서부터, 결단성 없는 우왕(瑀王)을 에워싸고 더욱 혼란을 일으키게 되었고, 더구나 우왕 14년(1388)에 철령(鐵嶺) 이북, 이동의 땅을 내어 놓으라는 명(明)의 요구에 대하여 고려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중(侍中)으로 있던 최영(崔瑩)은 왕과 의논하여 요동을 칠 것을 계획하고, 스스로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조민수(曺敏修), 이성계(李成桂)를 좌우군으로 삼아 군사를 출동시켰다. 이성계는 출군에 앞서 네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던 때이므로, 압록강 위화도(威化島)에 이르자, 조민수와 여러 부하들을 설복시켜 되돌아오고 말았다.

개경에 들어와 최영 등의 친원파를 몰아내고, 친명 정책을 쓰니, 새로 일어난 유학파들이 이성계를 지지하고 나가게 되어 사실상 고려의 실권은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세력에 넘어가게 되었다.

고려 왕실의 최후

고려 말기에는 초기에 세웠던 좋은 토지 제도가 무너져, 귀족들의 욕망을 채우는 폐단이 나타나, 왕실의 인척이나 귀족들에게 의하여 토지는 전부 독점되었다.

이렇게 대부분의 토지가 귀족이나 절의 소유로 되어버리고, 새로 임명된 관리에게는 봉록도 주지 못할 지경에 이르니, 이성계는 조준(趙浚)들의 의견을 좇아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수년에 걸쳐 토지를 다시 측량하고, 초기의 토지제도로 다시 돌아가는 제도로 바꾸었다. 이 개혁은 결과적으로 과거의 묵은 귀족이 땅을 빼앗기게 되고, 새로운 이성계 일파의 세력을 튼튼히 만들었다.

이성계는 차차로 자기에게 반대하는 자를 물리치고, 우왕, 창왕을 자기 손으로 폐하며 최영을 죽이고 이색(李穡)을 귀양을 보내니, 이렇게 딴 마음을 가지게 된 이성계 앞에 남아 있는 반대파는 정몽주(鄭夢周)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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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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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유학자인 정몽주는 이성계의 모든 개혁 정치에는 그리 반대하지 않았으나, 그 야심을 경계하면서 무너져가는 고려 왕실을 지키고 있는 하나의 인물이었는데, 이성계의 아들 방원(芳遠)에 의하여 선죽교에서 암살되었다.

자기 일파에 의하여 완전히 권력을 쥐게 된 이성계가 고려를 대신하여 왕위에 오르니(1392), 고려는 34왕 475년 만에 이씨에게 왕권을 넘겨 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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