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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초기의 사회와 문화

이조 사회의 모양

과거 제도 실시에 따르는 교육의 발달에 발을 맞추어 자라난 유교 사상은 국민 생활의 모든 격식이나 습관을 유교식으로 고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의 생활 양식에 남아 있는 여러 가지 엄격한 범절을 만들어 내었다.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정신이 깃든 이 시대에, 세조(수양대군)의 무도함을 죽음으로써 반대한 사륙신(死六臣)은 누구보다도 굳세게 유교의 가르침을 실천한 사람이었고, 이러한 사상은 중앙 집권적인 왕의 세력을 절대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양반, 상민 계급에 더욱 엄격한 차별을 만들어 내었고, 여자는 절대로 재혼하지 못하며, 첩의 자손은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하는 등, 유교적인 사회 풍습을 만들어 내었다. 양반의 자제만이 교육을 받고, 상민이나 노예는 그 계급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니, 이 시대의 정치, 교육, 문화는 모두 양반 계급이 독차지하게 되었다.

이조 사회는 양반, 중인, 상민, 천인의 네 계급이 있었는데, 중인 계급은 양반과 상민의 중간적 자리에 있어 양반이 업신여기는 기술 방면의 교육을 받고, 천문, 역학, 통역, 하급 장교 등의 임무를 맡아 보았다.

양반이 상층 계급에서 지배적인 구실을 하여 왔다면, 아래에서 생산 활동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나라의 힘을 기르며, 농, 상, 공(農, 商, 工)에 종사하고, 때로는 군인이 된 것은 상민 계급이니, 이들은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느니 만큼, 그들의 교육과 문화의 향상이 이조 사회의 앞날을 빛나게 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천인은 맨 아래 계급으로, 그 중 특히 백정은 사회의 천대를 받고 도살과 유기장 같은 일에 종사하며, 서울에서는 성 밖에 따로 동네를 만들고 그 곳에 살았다.

불교와 유교

신라, 고려의 두 시대를 통하여 찬란한 빛을 나타내던 불교는, 이조 시대에 들어와 유교 정신의 승리로써 그 세력이 줄어들고, 정치 방면에서는 물론, 문화 방면에서도 물러서게 되었다. 고려와 이씨 조선이 바뀐 것을 불교와 유교의 교대라고 할 수 있으리 만큼, 이조 시대 불교는 기운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지나치게 많았던 불교의 재산과 승려의 수효를 줄이게 되고, 도첩제(度牒制)를 써서 마음대로 출가하지 못하게 한 것도, 유학자들의 불교 배척 운동으로 국가의 보호를 잃게 된 까닭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유교 발달에 의하여 시들어가는 불교계에도 세종, 세조와 같이 그를 장려하고 자기 스스로 믿음을 가겼던 왕도 나타났다. 대궐 안에 내불당(內佛堂)을 짓고, 불교에 귀의한 세종도 절의 재산과 수효를 줄이고, 그 세력을 누르는 정책을 썼음은, 불교의 걸어온 역사가 종교의 범위를 벗어나서, 국가 세력에 간섭하는 것을 막아내고자 함이었다.

반대로 유학에 있어서는 주자학(朱子學)이 한창 성하여, 과거에 응시하기 위한 교육에도 문예 부분과 더불어 연구되었고, 모든 예절도 이 학설에서 우러나오게 되었다.

학문과 과학

이조 초기의 문화 중에서도 가장 뜻깊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은, 홀소리 11자, 닿소리 17자의 국문으로 세종 28년(1446)에 반포되었고, 2년 후에는 용비어천가 등 여러 가지 책이 인쇄되어, 일반 서민 계급에 널리 퍼져 국민 계몽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최만리(崔萬理) 같은 유학자들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은 힘을 모아, 오늘날 세계 문화사에 뚜렷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한글을 이룩하였던 것이다. 그 외에도 김시습(金時習), 서거정(徐居正), 최항(崔恒) 등의 문화적 활동이 학문의 발달을 재촉하였고, 국초로부터 역사를 쓰는 데 많은 뜻을 두어 정인지(鄭麟趾)가 고려사(高麗史)를 짓고, 서거정이 동국통감(東國通鑑)을 편찬하며, 임금이 바뀔 때마다 실록청(實錄廳)을 두어 역사를 꾸며, 네 곳에다 잘 보관하는 사업을 계속하였고, 지리 방면에도 팔도 지리지(八道地理志), 성종 때에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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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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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여지승람의 지도
동국여지승람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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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학문 발달의 열매는 활자와 인쇄술의 발달이 거듭됨으로써 빛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었으니, 세종 때만 하여도 활자를 네 번이나 다시 만들었다는 사실은, 그 때의 인쇄술 발달을 설명하여 주는 것의 하나라고 할 것이다.

더우기 주목할 것은 세종 때의 자연과학 발달이니, 농업국가인 우리 나라에 천문학이 필요함을 느끼고, 장영실(蔣英實)에게 명하여, 물시계, 해시계를 만들게 하는 한 편 천문도, 역도(曆圖)를 만들어 마니산, 한라산, 백두산에까지 가서 실지로 천문을 측정하게 하며, 서울에는 서운관(書雲觀)을 두어 측우기로써 우량을 측량하여(1442), 농사짓는 데 편하도록 하였음은 서양보다도 앞선 훌륭한 문화적 업적이었다. 또한 세조는 측량 기구인 인지의(印地儀)를 발명하여 사회생활에 이바지한 바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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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때의 천문 기구 ① 일영(日影) ② 앙부(仰釜) ③혼천의(渾天儀)
세종 때의 천문 기구 ① 일영(日影) ② 앙부(仰釜) ③혼천의(渾天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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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적 사회에서는 예술적 발달을 기대하기 어려운 만큼 볼 만한 것이 적으나, 지금 서울 탑골 공원에 있는 13층탑(十三層塔)은 이조 초기의 대표적 작품이고, 미술, 공예 방면을 제외한 그림이나 글씨에는 다소 뛰어난 사람들이 나타났으니 안평대군(安平大君), 한석봉(韓石峯)은 그 대표적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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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봉의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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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두기〉

사화. 계급 제도. 유교 중심의 정책. 주자학. 이조 실록. 동국여지승람. 사고(史庫). 활자. 과학의 발달. 측우기.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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