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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혼란을 거듭하는 유교 사회

유학의 얽힘

불교와는 달리 그 내용에 있어서 더 많은 정치성을 지니고 있는 유교에서는 정치적 지위를 차지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하였기 때문에, 유학자 사이에서는 서로 옥신각신하더니, 주자학이 이론적으로 발달하면서, 실천력보다 토론에 기울어지는 습성이 분열을 일으키게 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내란이라고 하여도 왕실 문제를 둘러싼 좁은 범위였으나, 이조 시대에는 이러한 유학자의 무리가 당파를 이루고 이론적인 언쟁을 함으로써 지방에까지 그 영향을 주어, 전국적인 혼란을 자아내고야 말았다.

단종과 세조의 피어린 역사는, 불의의 새 임금 세조를 섬기느냐 않느냐에서, 유학자 사이에 해석을 달리하는 동기가 되었다. 사륙신(死六臣)들과 같이 적극적으로 반대하던 절의파(節義派)나, 세상을 등지고 산으로 들어가서 시가(詩歌)로써 위안을 삼는 청담파(淸談派)는 싸움판에 휩쓸리지 않았으나, 세조에 벼슬하면서부터 세력을 잡고 있던 정인지, 신숙주, 서거정, 최항의 훈구파(勳舊派)와 영남 지방에서 학문을 닦고 기회만 엿보고 있던 김종직(金宗直), 김굉필, 김일손(金馹孫) 등의 사림파(士林派)와는 성종 때부터 노골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연산군(燕山君) 시대에 이르러 똑똑지 못한 왕을 둘러싸고 싸움이 벌어지니, 훈구파가 세조를 역사에 나쁘게 올렸다는 일로 사림파 수 십 명을 죽인 연산군 4년(1498)의 무오사화(戊午士禍)로부터 시작하여, 6년 후의 갑자사화(甲子士禍)와 같은 유학자들의 참혹한 싸움이 벌어졌다.

그릇된 정치로 사회를 어지럽힌 연산군이 쫓겨나고, 중종(中宗)이 들어섰으나, 유학자들의 분열은 그치지 않고, 이것을 고쳐 보려던 조광조(趙光祖)는 미신타파, 향약(鄕約) 실시 등 좋은 풍속을 길러 나라의 기초를 바로잡아 보려 하였으나, 마침내 반대파의 미움을 받아 죽음을 당하니, 이를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라고 한다. 그 후 명종 때 왕의 외척간에 일어난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년)를 합하여 4대 사화라고 하는데, 이것이 당파 싸움으로 가는 길이었고, 그 뒤 이조 300년의 정치를 어둠 속으로 이끌어 넣고야 만 유학자의 싸움은, 이 사화로부터 표면에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유학자들의 움직임

사화 이후, 일부 유학자들은 다시 정치에 나설 용기를 갖지 못하고, 전원으로 들어가서 학문에 힘쓰게 되었다.

중종 38년(1543) 풍기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백운동 서원(白雲洞書院)을 세운 것을 시초로, 많은 서원이 꼬리를 물고 나타났는데, 이 서원은 마치 고려의 불교와도 같이 국가적인 보호와 원조를 받아 자라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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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붕
주세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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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되는 사화를 겪고 시골로 내려온 선비들은 여러 곳에 서원을 세웠고, 이러한 곳에서 교육받은 신진 유학자들은 자연히 정치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갖게 되었다.

당파 싸움이 일어나면서 이들 서원은 당파의 이용물이 되고, 이를 기르는 결과를 가져 왔는데, 후에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하게 된 것도, 유학의 교육 기관으로 출발한 서원이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된 것을 막자는 데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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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
도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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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 편 훌륭한 학자들도 많이 나오게 되었다. 화담 서경덕(花潭 徐敬德), 율곡 이이(栗谷 李珥), 퇴계 이황(退溪 李滉)은 우리 나라뿐 아니라, 외국에까지 알려진 학자들이었고, 조식, 김인후, 기대승, 성훈 등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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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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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율곡
이 율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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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파의 나누어짐

유학자들이 사화를 당하고 지방으로 흩어지면서부터, 다시는 이러한 참혹한 혼란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더니, 대외적인 평화가 계속되면서, 정치를 멀리하였던 유학자들이 다시 중앙 관직에 몰려들게 되었다.

지방에 퍼져 있던 여러 서원에서 공부한 신진 학자들은 묵은 정치인들의 정책에 반대하기 시작하였고, 의견에 차이가 생기면서 서로 파가 갈리어져 나갔다.

우리의 귀에 익은 사색 당파는 선조 8년에 개인적으로 대립한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이 각각 무리를 모아 상대편을 공격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서인과, 동인이라 부르게 된 데서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당파의 시초가 앞으로 크게 나라를 그르칠 것을 알아차린 이 율곡은 양쪽 파에게 한 마음이 되도록 타이르고 가르쳐 보았으나 뜻대로 되지 않고, 그 반목은 오히려 날이 갈수록 심하여 갈 뿐이었다.

나라의 정치를 의논할 때 옳은 방법을 찾기 위한 토론이 아니고, 자기 편에 좋도록 하기 위하여 상대방의 의견이면 옳은 것이라도 반대하는 감정적 대립으로 인하여, 나라를 위한 올바른 정당 정치로 발전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 때에 임진, 병자의 두 난리를 겪으면서도 한 마음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동인은 남북(南北)으로 갈리고, 서인도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나뉘어져, 이른바 사색 당파를 만들고 갈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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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파의 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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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두기〉

사림파.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백운동 서원. 율곡(栗谷). 퇴계(退溪). 당쟁의 원인. 사색 당파.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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