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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임진왜란과 충무공

왜란이 일어나기까지

이씨 조선이 일어난 후에도 일본은 여러 세력이 갈리어 서로 싸우고 있었다. 좁은 섬나라 안에서 먹을 것이 없는 그들은 싸우다가 지면, 바다로 나와 해적의 무리가 되어 해적질을 하고 살았다. 우리 나라에서는 신라, 고려 시대에 이 왜구의 피해를 받아 왔으나, 좀처럼 그 세력이 줄어들지 아니하므로, 고려 말기에는 이성계가 크게 왜구를 소탕하였고, 세종 때에는 그 근거지인 대마도를 쳐서 다시는 조선에 못 들어오게 하였었다.

대마도에서는 사신을 보내어 자기들의 사정을 말하고, 무역하여 주기를 애원하므로, 제포(薺浦), 부산포(富山浦), 염포(鹽浦)의 세 항구에 한하여, 허가 있는 배만이 와서 장사하도록 허가하여 주었다. 이것이 왜국과 처음으로 맺은 조약인데, 조선에서는 여러 가지 제한된 규칙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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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직 왜인의 패
수직 왜인의 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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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세 항구에는 왜인들이 많이 와서 살게 되고, 그 수효가 차차 늘어가면서 중앙의 정치가 혼란하여, 손이 남쪽 끝까지 마치지 못할 듯하면, 난리를 일으키고 남쪽을 소란케 하였다. 이로 인하여 중종 때에는, 항구를 닫고, 왜인의 왕래를 금하였으나, 간사한 왜인들의 사과로써 다시 허가하였다. 이 후도 남쪽 항구에는 여러 번 작은 소동이 일어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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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포의 왜란
삼포의 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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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왜인들이 자기 본국의 후원을 믿고 하는 일이었는데, 이러한 왜국의 태도를 경계하기 위하여, 군대를 튼튼히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 이 율곡의 의견은, 당파 싸움에 눈이 어두워진 사람들에 의하여 받아들임을 받지 못하고, 다음 날에 큰 국난을 겪게 되었다.

왜적의 침입

분열되었던 왜국을 통일하고, 세력이 커지자 명 나라를 치자는 야심이 든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선조 25년(1592)에 15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하게 하였다. 당쟁에 눈이 어두웠던 조정에서는 급히 서둘러 방비에 노력하였으나, 왜적은 조정에서 보낸 이일(李鎰), 신입(申砬) 군대를 밀고, 20일 후에는 서울을 거쳐 평양과 함경도 지방에까지 쳐들어왔다. 이것은 적군에게 조총(鳥銃)이란 새 무기가 있었던 까닭이다. 바다에서는 이와 반대로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거북선으로 훈련된 해군으로 한산도(閑山島) 싸움에서와 같은 빛나는 성과를 거두면서, 왜적을 보는 대로 무찌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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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
거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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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이 해상권을 잃고 보급이 끊어져서 곤란을 받고 있을 때 조헌(趙憲), 김천일(金千鎰), 곽재우(郭再祐)와 같은 유학자나, 휴정(休靜), 유정(惟政) 등 불교 출신의 애국자들은 이곳 저곳에서 의병(義兵)을 이끌고 나와 왜적을 몰아내기 위하여 맹렬히 싸웠다.

명의 원군과 힘을 합하여 이듬해에는 평양을 회복하고, 남으로 쫓기는 왜군과 싸워 이여송(李如松)은 벽제관에서 패하였으니, 권율(權慄)은 행주(幸州)에서 잘 싸워 크게 이겼다.

이 때 명나라 심유경(沈惟敬)이 왜장에게 화의를 제기하자, 수륙 싸움에 져서 고통이 심하였던 왜군은 이를 응낙하고 서울에서 물러나 남쪽으로 달아났다. 남쪽의 왜군은 앞서 김시민(金時敏)의 굳센 항전으로 치지 못한 진주성(晋州城)을 다시 공격하니, 김천일 이하 온 군민(軍民)이 단결하여 죽음으로써 대하다가 성이 떨어지매, 6만 명의 백성도 성과 운명을 함께 하였다.

그 후 다시 화의가 성립되어, 남해안에 머물러 있던 왜군은 차차 본국으로 물러갔다. 명과 일본은 계속하여 사신이 오고 갔으나, 마침내 화의가 결렬되니, 히데요시는 선조 30년 다시 14만 군대를 보내어 쳐들어와서, 한 때는 충청도 직산까지 침략하였으나, 명군과 조선군의 반격으로 다시 남해안 지방으로 후퇴하고 그 지방 여러 성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이를 정유왜란(丁酉倭亂)이라 하는 바, 이순신은 원균(元均)의 시기와 왜인의 모략에 의하여 옥에 갇히었는데, 두 번째 쳐들어 온 왜군을 막기 위하여 이순신은 다시 나와 싸우게 되었다. 이 때에 명량(鳴梁)에서 크게 이겨, 왜군을 바다 깊이 몰아넣고, 때마침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해 가는 왜군을 쫓다가, 노량(露梁) 싸움에서 불행히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왜적이 물러간 뒤

왜적의 흙발로 짓밟힌 삼천리 강토는 폭풍이 지나간 뒤와 같은 처참한 흔적만을 남겨 놓았다. 국가적인 보배로운 궁전, 서적, 예술품이 재가 되고, 도둑맞았으며, 농촌은 손을 대지 못한 채 산과 들, 벌판을 분간키 어렵게 되니, 왜인에 대한 적개심은 날로 늘어가고, 이에 반하여 명에 대한 존경심은 강하여졌다.

국민은 한데 뭉쳐 다시 건설하자는 결심을 새롭게 하고, 부쩍 줄어든 인구와 삼분의 일 밖에 남지 않은 농토를 가지고, 국가의 재정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고, 군대에 있어서도 총을 가진 포수(砲手), 활을 가진 사수(射手), 창을 가진 살수(殺手)를 기본으로 신식 군대를 조직하여 맹렬한 훈련을 거듭하였다.

왜병들이 사용한 조총이 이 때 처음으로 우리 나라에 널리 알려졌으며, 또한 왜란 중에 발명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나 화차(火車)를 더 한층 발달시켜, 새로운 무장을 갖춘 군대로 등장하였음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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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격진천뢰와 화차
비격진천뢰와 화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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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국에서는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정권을 잡더니, 우리 나라와 다시 국교를 맺자고 대마도를 통하여 교섭해 왔으므로, 조정에서도 사신을 보내어 포로 교환, 무역 관계를 의논하면서, 다시는 도리에 어긋나는 침범을 아니 할 것이라는 언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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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간 통신사 행진 광경
일본에 간 통신사 행진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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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을 파괴하고 무죄한 백성을 학살하여, 역사에 보기 드문 죄악을 남겨 놓은 왜국도 그들 자신이 받은 경제적인 타격이 적지 아니 하였으나, 우리 나라에서 도자기 제조 기술과 활자, 인쇄술을 배워 가서 그들의 문화 발달에 도움이 된 바가 많았다.

이러한 왜국의 침략은, 기회가 있는 대로 실행하려는 섬나라의 야심이었고, 몇 번씩 실패하면서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야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알아두기〉

왜구. 임진왜란. 삼포. 조총. 거북선. 의병. 행주의 싸움. 진주의 싸움. 노량의 싸움. 통신사. 대마도.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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