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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거듭되는 국난과 심해가는 당파 싸움

오랑캐의 침입 병자호란

임진왜란 때에 명 나라의 힘이 이미 약해졌다는 것이 탄로되었으므로, 명 나라의 세력 밑에서 차츰 벗어나기 시작한 만주의 여진족은, 1616년 누루하치(奴爾哈赤)가 나타나면서 나라를 후금(後金)이라 하고, 변두리의 땅을 차차로 자기 세력하에 넣더니, 조선에 대한 태도가 점점 교만하여지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되매, 광해군(光海君)은 왜란 뒤에 파괴된 산업, 문화를 다시 일으키고, 국경 경비와 외교 방면에도 많은 힘을 들이고자 하였으나, 심해 가는 당파 싸움에 휩쓸려, 급기야 왕위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이것을 인조반정(仁祖反正)이라고 하며, 서인(西人)이 북인(北人)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던 당파 싸움의 하나였다. 그러나 서인 중에서 불평을 가지고 있던 이괄(李适)이 난리를 일으킴으로써 나라 안이 또 다시 흔들리게 되어, 그나마 광해군 시대에 하려던 국경 경비조차 허술해지고, 후금에 대한 주의보다, 정권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언제 다시 쳐들어올지 모르는 남쪽의 왜국과 북쪽 오랑캐의 북새질은, 조선을 어려운 처지에로 이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열을 계속하고 있는 틈을 타서 인조 5년(1627)에 오랑캐는 압록강을 넘어 조선에 쳐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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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캐의 들어옴
오랑캐의 들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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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아무런 소득이 없이 물러간 오랑캐는 10년 후에 나라를 청(淸)이라 고치고, 중국 땅에까지 영토를 넓히게 되자, 그때까지도 명 나라와 가깝게 지내는 조선을 괘씸하게 생각하고 있던 청태종(淸太宗)은, 인조 14년(1636) 대병을 이끌고 침입해 왔다. 인조는 미처 강화도로 피난하지 못하고,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가서 싸운 지 두 달 만에 아직도 국민들의 뼈에 사무치는, 수치스런 항복을 하게 된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는 비참한 역사를 남겨 놓았다.

심해가는 당파 싸움

왜적과 오랑캐가 남쪽과 북쪽에서 쳐들어와 번갈아 이 땅을 짓밟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당파 싸움은 그칠 줄을 몰랐다. 나라를 위한 의견보다 자기 편에 유리한 생각을 앞세우는 까닭에 일어나는 그릇된 판단으로 정치를 하는 일이 많았고, 정권을 잡기 위하여 도의와 애국심을 잊어버리는 행동을 하므로, 정치에는 어두운 날이 계속되었다.

서인은 송시열(宋時烈)과 같은 인물이 나와 비교적 오랫동안 정권을 잡아 왔는데, 남인들은 호란 이후에 서인을 몰아낼 계책으로, 왕실의 거상(居喪) 문제를 가지고 서로 싸워, 결국 서인을 쫓아버렸다. 그 때의 사상으로 비추어 볼 때, 이러한 문제가 중요한 것이라고는 할 수 있으나, 이것을 당파 싸움의 구실로 삼았다고 하는 것은 그릇된 점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다음 숙종(肅宗) 때는 다시 서인들이 세력을 잡게 되었으나, 서인들도 반대파의 처벌 문제로 의견이 충돌되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열되었고, 이 후로는 이 두 파가 엎치락 뒤치락하는 싸움판이 벌어졌다.

소론파가 세력을 잡은 채 영조(英祖) 때가 되었으나, 당파 싸움의 그릇됨을 고쳐 보려는 영조는, 관리를 공평하게 쓰고, 선비의 지나친 의견 제출을 막아버리는 등 많은 애를 썼다. 이러한 탕평책(蕩平策)을 이어 받은 정조(正祖)도 당쟁을 막아내고자 노력을 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으나, 당쟁을 깨끗이 없애기에는 너무나 많은 서원과 오래된 악습이 이를 방해하고 있었다.

새로운 문화의 시설

어수선한 사회에서도 당파에 휩쓸리지 아니 하고, 나라를 바로잡기 위한 괴로움을 거듭하여 나가는 사람들에 의하여, 새로운 발전의 싹이 트기 시작하였다.

병자호란 때 볼모로 잡혀서 갖은 고생을 겪은 효종(孝宗)은 왕위에 오르자, 북벌(北伐)할 계획을 무엇보다도 앞세우고, 군대 훈련에 힘을 기울였다. 불행히도 청(淸)을 칠 기회가 없었으나, 때마침 뻗어오는 러시아의 세력이 흑룡강 방면으로 침략해오므로 우리 나라 군대는 새로운 무기로 두 번이나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다. 한 편 국가의 경제적 안정을 목적으로 하는 대동법(大同法)은, 이미 이이(李珥)가 일찍부터 주장하였던 것인 바, 인조 때 일부 지방에서 실시한 적이 있었다. 이것은 각 지방의 특산물을 현물로 바쳐오던 것을 곡식으로 걷어들여, 교통이 발달되지 못한 당시에 있어서 국가의 재정에 도움이 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김육(金堉)은 이러한 국가 정책에 여러 방면으로 이바지한 사람으로 대동법의 실시를 열심히 도왔고, 여기서부터 대동미(大同米)란 말까지 나오게 되었다. 또한 그는 지금까지 화폐 대신에 포목을 사용하여 오던 것을, 돈을 만들어 널리 사용하도록 하였다. 돈은 이미 고려 시대에 통용된 바 있었고, 인조 때(1634)에 상평통보(常平通寶)란 것을 만들었으나, 얼마 아니 가서 폐지되었다. 김육의 이러한 장려에도 별로 큰 성과가 나타나지 않더니, 숙종 때에는 비교적 널리 보급되었다.

김육은 당시의 여러 유학자들 중에서도 영민한 사람으로서,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좋은 의견을 많이 내었는데, 그 중에도 편리한 달력으로 고쳐 사용한 것만 보더라도, 완고했던 그 때 학자들이 새로운 서양 문명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새 문화를 만들어 내려는 자각이 움직이기 시작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알아두기〉

인조 반정. 남한산성. 병자호란. 노론. 소론. 탕평책. 효종의 북벌 계획. 나선 정벌(羅禪征伐). 대동법(大同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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