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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부흥 정치와 서양 문화의 들어옴

서양 문화의 혜택

16세기 중엽부터 동양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서양인은 일찌기 인도, 중국, 일본에 도달한 바 있었으나, 우리 나라가 늦게야 그들과 접촉하게 된 것은, 해상 교통이 발달되지 못하여 주로 대륙에서 모든 문화를 수입해 왔던 까닭이고, 또 지리적 위치가 동북에 치우친 까닭으로 서양 사람이라고는 폭풍을 만나 풍파에 쫓긴 사람들을 간혹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처음으로 선조 때 마리이(馬利伊)가 왔고, 인조 때에 월트브레(Weltvree, 朴燕) 등 세 명이 풍랑을 피하여 제주도에 왔다가 잡히고, 효종 때 36명의 홀란드 사람이 표착하였다가 하멜(Hamel) 등이 도망하여 본국에 돌아간 후, “하멜 표류기”라는 책을 써서 우리 나라를 소개하였다. 이러한 표류 서양인을 통하여 서양에 관한 지식이 단편적이나마 경향 각지에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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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이 제주도에 표착함
하멜이 제주도에 표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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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서양 문명을 직접 조선에 수입한 것은 해마다 북경(北京)에 드나드는 사신들의 공적이라 할 것이다. 명 나라 시대부터 서양 문화를 받아들인 중국(淸)에서 선조 이후, 지도, 화약, 무기, 천리경, 달력, 서적 등을 많이 가져 오니, 이 결과 유학자들 중에서 서양의 새로운 문명에 눈이 뜨게 되는 사람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광정(李光庭), 정두원(鄭斗源), 김육(金堉) 등은 서양 문물을 이끌어 들인 대표적 인물이다. 이 외에 호란 후 볼모로 잡혀 갔던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아담 샬(Adam Schall) 신부와 사귀어 시계와 많은 서적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이로 인하여 새로운 서양 문명을 배우고 연구하여, 실제 생활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게 되었다.

자각 운동과 부흥 정치

새로운 서양의 문물과 같이 새로운 학문이 들어 오게 되자, 이론만에 치우쳐서 사회를 혼란으로 이끄는 주자학을 물리치고, 좀 더 넓고 실지 생활에 필요한 학문을 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러한 경향은 선조 때 이수광(李睟光), 한백겸(韓百謙)으로부터 시작되어 유형원(柳馨遠)을 거쳐 이익(李瀷)에 이르러 발전하여 영조, 정조 때에는 더욱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이러한 학계의 움직임과 영조(英祖)와 정조(正祖)의 부흥정치는 이조 초기의 좋은 정치가 다시 일어난 느낌이 있을 만큼 현명한 것이었다. 영조는 당쟁의 악폐를 고치고자 탕평책(蕩平策)을 썼으며, 농업을 장려하고, 백성의 부담을 덜고자 세금 제도를 고치고, 많은 책을 만들어 내었다.

정조는 영조의 정신을 이어 받아 더욱 국가 발달에 힘을 기울였고, 문화적 업적을 남겼던 바, 그 중에 규장각(奎章閣)의 설치는 특기할 만한 것이며, 많은 책의 출판은 활자를 연구 개량하게 하였고, 인쇄술도 더욱 발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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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
규장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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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백성을 중심으로 한 정치와 새로운 문화가 크게 일어나니, 당쟁과 큰 국란을 겪은 이조에는 다시금 세종, 세조, 성종 때의 찬란한 문화가 부흥되는 듯하였다.

영, 정 시대 및 그 후의 학예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실제적 학문을 연구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던 실학(實學) 운동은 영, 정조에 이르러 청 나라의 고증학(考證學)의 영향을 받아 주자학에서 벗어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실학뿐 아니라, 우리 나라 고유의 것을 찾고자 하는 자각이 일어나, 역사, 지리, 어학 등의 연구가 활발하게 시작되어 학풍은 몹시 달라졌다. 이러한 움직임은 많은 학자를 낳았는데, 안정복(安鼎福), 이중환(李重煥), 신경준(申景濬), 정약용(丁若鏞), 유득공(柳得恭), 한치윤(韓致奫), 이긍익(李肯翊) 등은 대표적 인물이었다. 박지원(朴趾源) 등 여러 사람들이 북경에 왕래하면서, 청의 발달된 물질 문화를 받아들여야 하겠다는 것을 주장하니, 이들은 북학론파(北學論派)라고 불리웠다. 뒤이어 김정희(金正喜)는 금석학(金石學)을 깊이 연구하였고, 글씨에도 뛰어나, 박지원의 문장, 김홍도(金弘道)의 그림과 아울러 당시의 명인이었다. 이 때 김정호는 전국을 답사하여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만드니, 이로써 비로소 정확한 우리 나라 지도가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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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의 글씨
김정희의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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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의 풍속도
혜원의 풍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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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의 대동여지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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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에 특히 사회의 표면에 나타나지 못하였던 중인, 서민계급과 여성의 진출을 보게 되어 이들에 의한 서민 문학의 발달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이 중심이 된 것은 일반 백성과 가장 친밀성이 있는 국문학이었으니, 김천택(金天澤)의 청구영언(靑丘永言), 김수장(金壽長)의 해동가요(海東歌謠)는 유명하다. 특히 작자의 이름은 모르나 춘향전(春香傳)은 이 때에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사회적 활동이 억압되어 있던 여성계에 있어서도 신사임당(申師任堂), 허난설헌(許蘭雪軒), 황진이(黃眞伊) 등이 문필 활동으로써 널리 알려졌다.

천주교의 들어옴

임진왜란 때 세스페데스(Cespedes) 신부가 우리 땅에 건너 온 일이 있으나, 우리 겨레와는 아무런 관계를 맺지 못하고 돌아갔는데,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쳐 동양에 와 있던 선교사의 전도 계획도 그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우리 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온 것은, 다른 나라와 같이 외국 사람에 의하여 들어온 것이 아니라, 안으로부터의 열성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자랑할 만한 것이었다. 사신을 통하여 청 나라에서 들어온 책 가운데 천주실의(天主實義)와 같은 천주교의 책이 있어, 그 당시 정권을 잡지 못하고 있던 남인 계통의 학자들이 연구하더니, 교리를 믿는 자가 나타나 차차 그 수가 늘어가서, 정조 때 북경에 간 이승훈(李承薰)은 그 곳에서 처음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와서 서울에 자립적인 교회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신주를 받들지 아니 하고 조상에 대한 제사를 행하지 아니 하므로, 이는 종래의 유교 사상과 반대되는 점이 많았다. 유교 정신에 젖은 양반들은 천주교를 사교라고 부르며 반대하였고, 정조 9년에는 금령(禁令)을 내리고, 외국의 책도 못 들어오게 하였다.

조선 교회가 생긴 지 얼마 아니 되어, 조정에서는 교회를 해산시키고, 교인 김범우(金範禹)를 죽이니, 이 땅의 최초의 순교자이다. 또 정조 15년에 진산(珍山)에서 윤지충(尹持忠), 권상연(權尙然)이 박해를 입었으나, 새로운 신앙의 길을 찾는 사람은 늘기만 하였다. 이것은 일반 서민 계급에게 아무런 희망과 문화적 교양을 주지 못하던 당시의 사회에 있어, 천주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박애 사상이 환영을 받은 까닭이었다.

늘어가는 신도들은 드디어, 정조 19년에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의 파견을 받아, 모진 탄압에도 불구하고, 포교(布敎)에 힘썼으므로 교세는 나날이 커갔다.

〈알아두기〉

박연. 하멜 표류기. 정두원. 규장각. 실학파. 북학론파. 대동여지도. 여류문인. 평민문화. Cespedes. 천주실의. 천주교 금령.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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