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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세도 정치와 흔들리는 사회

정치의 어지러워짐

세도 정치(勢道政治)라 함은 벼슬의 여하를 불문하고 국왕의 신임을 받고, 정치를 도맡아 보는 그릇된 정치 형태인데, 이미 정조 때 홍국영(洪國榮)이 잠깐 동안 세도 정치를 한 적이 있었으나, 순조(純祖) 이후 어린 왕이 잇달아 나타나매, 이러한 정치가 계속되는 폐단이 생기게 되었다.

순조와 헌종(憲宗) 시대에는 안동 김씨(安東金氏)와 풍양 조씨(豊壤趙氏)의 두 외척이 번갈아 가며 세도를 잡았으며, 다음 철종(哲宗) 때에는 김씨 세도의 전성시대가 이루어져, 중요한 관직은 김씨 일문이 독차지했다. 이처럼 오랫동안 끌어온 세도 정치는 나라 일보다 집안 일을 먼저 돌아보고, 자기들의 세력과 안전을 위하게 되매, 거듭되는 옥사(獄事)와 천주교 박해가 일어났고, 아래 계급의 관리들도 이를 본받아 가니, 정치는 어지러워질 뿐이었다.

이리하여 국가 살림의 가장 중요한 기본 수입이었던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의 이른바 삼정(三政)의 제도가 어지러워지면서, 나라의 앞날은 크게 위태로워져 갔다.

세도가인 양민은 물론, 지방 관리까지 방법을 가리지 않는 협잡으로써 나라에 들어갈 세금을 도둑질해 먹고, 백성들은 그들의 압박과 착취의 희생물이 되어, 심한 고통을 받았다. 이러한 악질 지방 관리를 찾아서 처벌하는 암행어사(暗行御史)를 보내어 그릇된 현상을 바로 잡아 보려 하였으나, 이것으로도 이렇다 할 성과는 얻지 못하였다.

천주교의 박해

정조 때부터 천주교를 금하기는 하였으나, 큰 박해는 일어나지 아니 하더니, 순조가 즉위하자, 남인을 쫓고자 하는 무리가 천주교에 대하여 박해를 가하니, 이승훈, 정약종(丁若鐘), 황사영(黃嗣永) 등의 많은 교도와 그들의 가족이 학살되고, 주문모 신부도 순교하였으니, 이것이 신유박해(辛酉迫害)이다.

그러나 신앙의 뿌리는 강하여 비밀리에 뻗쳐나갔으니, 마침내 1831년에 조선 교구가 독립되고, 암베르(Imbert) 주교 등 세 명의 프랑스 선교사가 숨어 들어와 활약하다가, 헌종 5년에 다시금 기해 박해(己亥迫害)가 일어나 세 신부와 30여 명의 신자가 순교하였다. 이보다 앞서 프랑스 신부에 의하여 마카오에 파견되었던 김대건(金大建)은 최초로 한국인 신부가 되어 돌아와, 포교에 힘쓰다가 헌종 12년에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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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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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란된 정치로 인하여 시달림을 받아, 심신이 피로한 백성들의 마음의 안식처를 찾아 헤매는 신앙 운동은, 가혹한 형벌로써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니, 철종이 즉위할 당시에는 이미 신도의 수효가 만 명을 넘었고, 숨어서 들어온 프랑스 신부만도 10여 명이나 되었다.

홍경래의 난과 민중의 동요

세도 정치의 폐단과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이 받는 괴로움은 날로 더해가더니, 순조 때에 이르러서는 더욱 심하여, 민심은 관리에게서 떠나 가고, 또 해마다 되풀이되는 흉년으로 인해 굶주리는 백성들의 불평과 원성은 대단하였다.

이 때 평안도의 홍경래(洪景來)는 우군칙, 김창시와 더불어 이 기회를 타서, 천대받는 서북 사람의 불평을 선동하여 세도 정치를 물리치고, 백성을 도탄에서 건진다고 하여, 순조 11년(1811)에 가산(嘉山)에서 난리를 일으켰다. 홍경래는 손쉽게 청천강 이북의 여러 고을을 점령하여, 그 세력이 자못 강성하더니, 4개월 만에 정주성 싸움에서 패하여 굴복하였다.

이 난리는 오랫동안 천대 받던 서북인의 불만이 나타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한 편 세도 정치에 시달린 백성의 반항운동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큰 난리를 겪고 나서도 귀족들의 부패는 날로 심하여 가매, 시달림을 받은 백성의 동란이 철종 13년 진주에서 또 폭발하였다. 진주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삼남 일대가 소란하여져서 지방 관청을 불지르고 쳐부수는 일이 연달았고, 북쪽에서는 함흥에서부터 남쪽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불꽃이 튀어 나라 안은 편안한 날이 없을 지경이었다.

이러한 민란들은 세도 정치의 그릇됨과 삼정의 문란에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알아두기〉

세도 정치. 삼정. 홍국영. 천주교 박해. 김대건. 홍경래. 민요(民擾).

〔학습 활동〕

이조 시대의 역사를 배우고 나니, 우리들은 퍽 멀리 느끼던 여러 가지를 만나 본 것 같았다. 더구나 우리들 주위에 있는 생활 환경이 역사가 남겨 놓은 것이라고 함을 확실히 느끼게 되었다. 이제는 소풍을 가도,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것 하나 하나가 역사를 가르쳐 주는 산 역사 책이라는 것을 생각할 적에, 비록 말 없이 우뚝 서 있는 절간이나, 성벽의 돌도 전과는 다르게 눈에 띄어 들어온다.

이조 시대를 배우면서도 이것을 꼭 내가 한 번 조사해 보겠다는 점이 대단히 많았는데, 지금 와 보니 너무 많아서 시간이 벅찰 것 같아, 두고 두고 알아 볼 생각으로 분단 회의에서 결정된 것만 알아 보기로 하였다.

(1) 지금까지 수도로서 정치 문화의 중심이 되어 있는 서울에는 수 많은 고적이 있는데, 그 중에서 다음 몇 가지를 조사하고, 오백 년 전의 한양을 눈 앞에 그려 보도록 하자.
① 한양의 성은 어디를 지나고 있으며, 지금 서울은 얼마나 더 발전하였나 지도로써 비교하여 보자.
②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파고다 공원, 사직 공원, 사대문, 규장각 등, 이조 시대에 이루어진 서울의 남은 자취를 찾자.
③ 연세가 많으신 노인에게 옛날 서울의 모습을 들어 보자.
④ 고대로부터 오늘날까지의 서울의 역사는 어떠한가 선생님께 여쭈어 보자.
(2) 세종 대왕의 훌륭한 업적을 더 자세히 조사하여 보자.
(3) 임진왜란, 병자호란의 역사를 읽고서, 우리 나라의 위치가 오래 전부터 침략자들이 욕심을 내는 주요한 점을 발견하고, 오랑캐를 치고 왜놈을 막아내는 힘을 기르기 위한 각오를 새롭게 하자.
(4) 당파 싸움은 이조 시대의 역사를 어둠 속으로 이끌어 넣었음을 알았다. 그 원인이 어디 있는가 조사하여 보고, 우리가 배울 점이 무엇인가를 알자.
(5) 이조 시대의 무기, 투구, 갑옷, 의복, 기타의 풍습을 알아 내기는 어렵지 않으니, 박물관이나 보물을 간직한 분들의 집을 찾아 가서, 사진이나 그림으로 만들어 남겨 두자.
(6) 영조(英祖)와 정조(正祖)는 새로운 학문의 발달에 이바지한 바가 적지 않은 분인데, 이 시대에 일어난 새 문화로서는 어떠한 것이 있는지를 알아 내자.
(7) 천주교는 시들어가는 이조의 유교 사상을 대신하여, 퍽 민주적인 문화를 준 공로가 있다고 하겠다. 이 종교가 들어온 길을 다시 한 번 알아 보고, 이 때 외국에 우리 나라가 어떻게 소게되었는가도 알아 보자.
(8) 양반 사회와 오늘의 민주 사회는 무엇이 다른가 알아 보자.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좋은 문제가 있으니, 기회 있는 대로 따로 계획을 세워 더 연구하여 보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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