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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원군의 혁신과 쇄국

대원군의 혁신 정치

거듭되는 민란이 가라앉을 무렵, 철종이 돌아가고 고종(高宗)이 즉위하였다. 고종은 흥선군(興宣君)의 아들로서 연소하였기 때문에, 그 부친을 대원군(大院君)으로 높여 모든 정사를 위임하게 되었다. 대원군은 과단성 있는 사람으로서 오랫동안 쌓인 폐단을 뜯어 고치고자 혁신 정치를 시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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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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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왕권의 확립을 위해서 외척 세도를 억누르는 한 편, 당쟁의 뿌리를 뽑고자 사색을 고르게 등용하고, 지방과 계급의 차별을 폐하여 널리 인물을 등용하였다. 또한 경제적으로 국가를 좀먹고, 당쟁의 근원을 이루었던 서원을 정리하고, 군포를 호포(戶布)로 고쳐 양반도 이를 부담케 하였으며, 사치와 허영을 막고자 좋지 못한 풍속을 단속하였고, 경국대전, 속대전 등에 의하여 대전회통(大典會通)이란 법률책을 편찬하는 등, 참으로 볼 만한 많은 공적을 남기었다.

그러나 한 편 왕실의 위엄을 세우고자 불타버린 경복궁(景福宮)을 재건하기를 결심하여 무거운 부역을 백성에게 강요하였고, 그 비용을 얻기 위하여 원납전(願納錢), 문세(門稅) 등의 부당한 기부와 세금을 거두고, 당백전(當百錢)을 발행하여 화폐의 가치를 떨어뜨려 민심을 잃게 한 실정도 있었다.

천주교의 탄압과 쇄국 정치

이 때의 국제 정세는 변동이 심하여, 동진하던 러시아는 아로호 사건으로 영, 불과 청이 충돌하였을 때를 이용하여 연해주(沿海州)를 차지하고, 계속하여 우리 나라로 진출하고자 경흥(慶興)에 사신이 왕래하게 되었었다. 남진하는 러시아 세력을 막는 데 프랑스의 힘을 빌리고자 생각하게 된 대원군은 몰래 이 나라에 숨어들어 전도하던 프랑스 신부들과 통하고자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못하였다. 때마침 청에서 천주교 탄압의 소식이 들려오자, 고종 3년에 대원군도 천주교 탄압과 쇄국의 명령을 내리고, 전국적으로 교도를 찾아내어 학살하니, 우리 역사상 가장 큰 박해인 병인 박해(丙寅迫害)가 일어나 9명의 프랑스 신부와 남종삼(南鐘三) 외 수백 명 신자가 순교하였다. 이와 같이 철저하다고 할 수는 있으나 너무나 세계 정세에 어두운 쇄국과 천주교 박해는, 거듭되는 양요(洋擾)로 이끌었고, 그로 말미암은 쇄국의 강화는 우리 나라로 하여금 근대 세계에서 뒤떨어진 국가로 몰아 넣었다.

거듭되는 외세와의 충돌

병인의 대 박해의 소식은 국내에서 빠져 나가는 데 성공한 리뗄(Riddel) 신부에 의하여 천진에 주둔중인 프랑스 함대에 전하여졌다. 함대의 사령관 로즈(Rose)는 우선 3척의 군함을 이끌고 한강을 거슬러 양화진(楊花津)까지 올라와 정찰하고 돌아가, 다시금 7척의 군함으로 서울에 이르는 관문인 강화도 일대를 습격하게 되니, 우리 군대와 심한 교전이 일어났다. 불군은 강화성을 점령하였으나, 문수산성(文殊山城)에서 패전하고, 정족산성(鼎足山城)에서 양헌수(梁憲洙)가 이끄는 부대에게 큰 타격을 입었다. 이러는 동안 우리 나라는 40일에 걸쳐 한강 하구가 봉쇄되어 큰 곤란을 받았으나, 대원군은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며, 또한 불군도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되어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후퇴할 때 강화를 불지르고 보물과 서적을 약탈하니, 이를 병인양요(丙寅洋擾)라 한다(1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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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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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앞서 고종 3년에 미국 상선 제너럴 셔어먼 호(General Sherman 號)가 홍수로 물이 불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 평양 가까이까지 왔다가 물이 빠지니 식량이 부족하여 약탈을 하므로 이에 분격한 사람들이 배를 불질러버린 사건이 일어났다. 한편 고종 5년에는 도이치 사람 오페르트(Oppert)가 비상수단으로 문호를 열게 하려고, 충남 덕산(德山)에 있는 대원군의 어버이의 무덤을 파 헤치는 사건이 있어, 대원군의 서양인에 대한 감정은 극도로 악화하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미국은 셔어먼 호 사건을 이용하여 강제로 통상을 맺고자 고종 8년(1871)에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져스(Rodgers)로 하여금 우리 나라를 습격하게 한,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났다. 미군은 강화도를 습격하였으나, 어재연(魚在淵)이 이끄는 우리 군대에게 격퇴되어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버렸다.

두 차례에 걸쳐 서양인의 공격을 물리치는 데 성공한 대원군은, 의기양양하여 종로 네거리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한 층 더 쇄국과 서양 배격을 굳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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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비의 비문
척화비의 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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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나라와의 관계

대원군의 쇄국 정책은 일본에 대하여서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일본은 임진왜란 후 여러 차례에 걸쳐서 다시금 국교를 열어 줄 것을 부탁하여 온 바 있었으므로, 선조 37년 이후 다시 두 나라 사이에 교섭이 생겼고, 그들의 청으로 수신사를 보내기도 하였다.

1853년(철종 4년)에 쇄국을 지키던 일본이 미국에 의하여 나라의 문을 연 후, 열심히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고, 260여 년에 걸쳐 일본을 다스리던 토쿠가와 막부(德川幕府)가 쓰러지고(1867), 소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단행해, 서양 문화를 받아들여 제도를 크게 뜯어 고치고 국력을 기르더니, 우리 나라에 대하여 통상과 수교를 청하여 왔다. 대원군은 그들의 국서가 오만하다 하여 이를 거절하였고, 수차에 걸친 사신도 받아들이지 아니 하니, 일본에서는 우리를 치자는 정한론(征韓論)까지 일어났다. 이 때부터 일본은 우리 나라에 대하여 침략의 이빨을 갈기 시작한 것이다.

대원군은 이와 같은 강력한 쇄국과 배외정책을 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청국에 대하여서는 그 때까지의 사대주의적인 정책을 그대로 이어 받아, 교섭을 두터이 하며, 사신을 수시로 보내고 있었다.

〈알아두기〉

경복궁. 당백전. 신미양요. 병인양요. Oppert. 대원군의 개혁 정치. 척화비. General Sherman 호 사건. 문수산성. 쇄국 정치.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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