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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 노, 일의 항쟁과 자주 독립 운동

(6) 노, 일의 항쟁과 자주 독립 운동

노, 일의 세력 다툼

청일 전쟁으로 요동반도가 일본의 손에 들어가게 되자, 항상 이 지역을 노리던 러시아는 불, 독 양국과 더불어 이를 돌려주는 것이 동양 평화를 위하는 길이라 하여 강력한 항의를 하게 되니, 일본은 하는 수 없이 요동 반도를 청에 돌려 보내야만 했다. 이 삼국 간섭(三國干涉)이 있은 후 민씨 일파는 차차로 친로(親露)로 기울어져 친일 고관을 몰아내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친로 정부를 조직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러시아 세력은 나날이 커갔다. 이러한 때 새로 온 일본 공사 미우라(三浦)는 다시금 일본 세력을 비상수단으로 회복하고자, 고종 32년(1895)에 친일 개화당과 약 60명의 일본인으로 하여금 대원군을 받들고 대궐에 쳐들어가 친로파를 물리치고 친일 정부를 세우게 하였다. 이 사건을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 부르며, 이 난중에 민비는 일병의 손에 의하여 무참한 죽음을 당하였다.

새로운 친일 정부는 또 다시 양력의 사용, 종두법(種痘法)의 시행, 우체 사무의 개시, 소학교의 시작 등의 개혁 정치를 실행하였고, 건양(建陽)이라는 연호를 세웠으며, 단발령(斷髮令)을 내리었다. 그러나 단발령과 같은 과격한 개혁 정치는 백성의 소란을 일으켰고, 민비의 피살은 민심을 크게 흔들어 전국적으로 배일 운동의 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때를 이용한 웨베르는 다음 해 2월에 러시아군과 친로파를 동원하여 재빨리 국왕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모시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여, 친일 개화파를 소탕하고, 다시금 친로 정부를 세웠다. 이 후 1년을 국왕이 아관에 머무르니, 러시아는 적극적으로 내정을 간섭하여 많은 이권을 얻게 되었고, 그 외의 다른 나라도 이에 따라 이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대한 제국의 자주 독립 운동

고종이 1년 만에 국민의 부르짖음에 응하여 경운궁(慶運宮)에 돌아오자, 독립 국가로서의 새 출발을 꾀하여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 고치고, 연호를 광무(光武)로 바꾸었으며, 새로이 관제를 마련하고, 자주 독립의 기세를 보이었다(고종 34년). 이 때 서재필(徐載弼), 이승만(李承晩)을 중심으로 한 독립협회(獨立協會)는, 민간에서 자주 독립 운동을 전개하여 민심에 큰 영향을 주었다. 독립 협회는 개화와 자주 독립을 주장하여 독립문(獨立門)을 세우고, 민중을 계몽하기 위하여 독립 신문을 내었으며, 정부의 그릇된 점을 공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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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석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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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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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놀란 정부는 이기동(李基東), 홍종우(洪鐘宇) 등의 황국협회(皇國協會)로 하여금 독립협회의 활동을 방해케 하매 흥분한 민중은 대관들의 집을 쳐부수고 소동을 일으켰으므로, 마침내 황제는 내각을 갈고, 개혁 정치를 국민에게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노, 일의 전쟁과 우리 나라

삼국 간섭 이후 러시아의 남진은 뚜렷하여 동청 철도를 놓고, 여순(旅順), 대련(大連)을 조차하는 데 성공하더니, 차차로 우리 나라에까지 침략의 손을 뻗치기 시작하였다. 광무 4년(1900)에 청에서 일어난 의화단 사건(義和團事件)을 이용하여 러시아는 동청 철도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보내 사실상 만주를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그뿐 아니라 러시아의 침략은 나날이 심해져 드디어 압록강 하구에 있는 용암포(龍岩浦)를 불법 점령하고, 조차(租借)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노, 일 간에 여러 번 교섭이 있더니, 북위 39도선 문제로 결렬되어, 결국 광무 8년(1904)에 노일 전쟁의 폭발을 보게 되었다.

전쟁은 일본에 유리하여 여순을 함락시키고 봉천을 점령하여 육전에 승리를 거두더니, 또한 해전에서도 멀리 발틱해에서부터 달려온 발틱함대를 격멸하였다. 미국이 이 기회를 이용하여 화의를 권고하니 포오츠머드(Portsmauth) 조약을 맺어 전쟁이 끝나게 되었다. 이 조약에 의하여 노국의 남진이 꺾이고, 일본은 만주에 발붙임하게 되었다. 또한 한국에 있어서의 일본의 우월권이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게 됨으로써 청, 노, 일 3국이 오랫동안 다투던 한국 땅은 이제 일본의 손아귀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침략자 일본

동양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한 일본은 차차 국력이 자라남에 따라 대륙 침략의 오만한 생각을 품고, 먼저 우리 나라에 손을 뻗치기 시작하여 운양호 사건 이후 기회 있을 때마다 그의 세력을 뻗치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갑신정변, 을미사변 등 가지 가지의 사건을 일으켜 내정을 간섭하는 한 편, 청일 전쟁으로 청국을 몰아내었고, 이제 노일 전쟁으로 러시아의 세력마저 내쫓아, 국제적으로 우리 나라에 대한 특수 권리를 독차지한 다음, 우리 정부를 위협하고, 애국 운동을 탄압하여 국권을 박탈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노일 전쟁이 시작되자, 우리 나라는 중립을 선언한 바 있었으나, 일본은 한국에 대한 시정 개선의 권고를 할 수 있었고, 우리 국토를 군략상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한일 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제로 체결하고, 이어 어업권과 항해권을 뺏아 갔다. 그 후 전세가 유리하여지매, 일본은 더욱 압력을 가하여 한일 제일차 협약(韓日第一次協約)을 맺어, 외교, 재정의 각 부문에 일본이 추천하는 고문관을 채용하여야 하는 수치스러운 고문 정치가 국민의 반대를 물리치고 강제로 시작되니, 각국은 외교 사절을 본국으로 불러들이게 되었다.

〈알아두기〉

삼국 간섭. 을미사변. 건양. 단발령. 아관 파천. 대한제국. 독립협회. 광무. 황국협회. 용암포사건. 포오츠머드조약. 한일의정서. 한일제일차협약. 고문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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