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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제와 싸우는 겨레

일본의 무단정치

온 겨레의 반대와 애국 지사가 생명을 바치고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악착스러운 일제는 갖은 수단을 다하여 우리 땅을 식민지로 만든 다음, 제일 먼저 실시한 것이 정치적 활동을 못하게 탄압하는 일이었다.

조선 총독부를 두어 한국을 지배하고, 그 총독에는 주로 육해군 출신의 군인을 임명하여 철저한 무단 정치를 실시하고, 조금이라도 한국의 독립을 목적으로 활동하거나, 애국적인 생각을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하는 일이 있을 때에는, 각지에 파견되어 있는 헌병으로 하여금 잡아들이게 하였던 것이다.

우리의 입을 막기 위하여 우리말로 된 신문은 간행하지 못하게 하고, 독립을 꾀하는 애국단체는 모조리 해산당하고 말았으니, 손발을 묶이고 입을 열지 못하게 된 애국자들은, 하나씩 둘씩 만주 지방, 중국, 미국, 연해주 방면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을 발판으로 하여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야심까지 품게 된 일본은, 착취를 위한 공작을 시작하여 도로, 철도, 항구, 통신의 시설을 고치고, 일본말을 강제로 보급시키며, 경제적 권리를 잡기 위하여 화폐 제도를 고치고, 금융 기관을 자기들 손으로 운영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중에서도 세금을 받아들이는 것과 토지에 대한 관심이 가장 컸으니, 한국의 쌀은 옛날부터 욕심을 내던 터이라, 농토를 어떻게 하면 빼앗을까 하는 것을 궁리한 끝에, 생각해 낸 것이 토지 조사를 한다는 명령이었다.

토지를 빼앗는 수단

일본은 한국에 손을 뻗치면서 가장 먼저 계획한 것이 토지를 일본인이 차지하자는 것이었다. 이조 시대 말기만 하여도 토지는 원래 나라에 속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일부의 상층 계급을 제외하고는 토지를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일본은 이것을 이용하여 일정한 기한을 두고 자기의 토지를 신고하지 않으면 국가의 땅으로 만들어버리겠다는 법령을 발표하였다. 지금까지 토지를 사유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던 농민들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토지를 빼앗기었고, 또한 이조 시대의 관청 소유의 토지도 국유지라고 하여 빼앗기게 되니, 일제에 아부하는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토지가 일본 총독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융희 2년(1908년)에 설치된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가 이것을 맡아서 운영하면서부터는 한국의 농민은 대부분이 소작인으로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1914년의 통계를 보아도 한국인은 총 경작 면적의 반 밖에 차지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많은 농작물이 일본인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한 편 세금을 철저하게 받아들여, 소작료 이외에도 많은 부담을 지웠는데, 그 방법도 강제적이어서 1912년에는 지세(地稅)를 안 내어서 처벌받은 사람이 55명이더니 2년 후인 1914년에는 8,000명에 이르렀을 만큼 지독한 정책을 썼다.

이러한 농업에 관한 토지 문제뿐만 아니라, 한국 연해의 좋은 고기잡이터를 엿보며, 풍부한 지하자원 개발권을 얻어 수 많은 일본 사람들이 우리 땅에 옮겨 살게 되고, 일본서는 생활이 구차하던 자가 한국에 와서는 큰 부자 노릇을 하게 되었다.

쌀을 한국에서 가져가고 일본에서는 공업품을 가져다 파는 관계로, 일본의 상품 시장이 되어, 쌀값은 떨어지고 농민은 살기가 곤란하여져서 산중으로 들어가 화전민(火田民)이 되거나, 만주 방면으로 이주하는 사람이 해마다 늘어갔다.

교육과 종교의 활동

한국인의 정치적, 사회적 활동을 못하게 하고 언론의 자유를 빼앗은 후 일본은 식민지 교육을 통하여 한국 통치를 원만히 이끌어 가고자 1911년에는 교육령(敎育令)을 내려 보통학교(普通學校)의 교장은 일본인으로 임명하고, 교사는 칼을 차고 제복을 입혀 위엄을 나타내게 하는 식민지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인이 만든 학교보다도 한국인이나 외국인 선교사가 세운 사립학교(私立學校)가 훨씬 더 활발했으니, 이는 모든 자유를 빼앗긴 우리 겨레의 민족 사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조 오백 년을 통하여 간신히 부지해 오던 불교는 총독부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못하고, 약간의 교육 사업과 불교 단체를 이루었을 뿐이나, 기독교는 서양인 선교사의 들어옴과 동시에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천주교는 이미 많은 선교사가 들어와 전도에 힘쓰고 3만 명의 신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교육 사업에도 힘을 쓰고 있었다. 신교는 일본 세력이 들어오면서부터 급속하게 늘어가서, 앨런(Allen), 언더우드(Underwood), 아펜셀러(Appenseller) 등의 선교사가 입국하여 전도와 교육 사업에 종사하면서, 우리 겨레에게 많은 깨우침을 가져다 주었다.

한 편 친일파 일진회와 인연을 끊은 천도교(天道敎)는 나날이 자라나, 신도 3백만이라고 부르게 되리만큼 그 세력이 늘어갔는데, 천도교에서도 교육 사업을 통하여 독립사상을 은연중 길러 내었으니, 지금 보성(普成), 동덕(同德)의 학원이 그것이다.

〈알아두기〉

무단정치. 총독부. 헌병 경찰 제도. 동양척식회사. 일제의 교육령. 보통학교. 선교사의 활동. 천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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