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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3국의 대립

[2] 3국의 대립

고구려의 강성

가장 먼저 일어난 고구려는 소수림왕(小獸林王) 때에 이르러 국력이 더욱 자라나게 되었다. 전진(前秦)과 우호 관계를 맺고 그 문화를 받아 들여 불교가 처음으로 우리 나라에 들어오고 또한 국립 학교도 세웠다. 안으로 자리잡힌 국력을 배경으로 활발한 정복 사업을 일으켜 넓은 만주와 한강 이북에 걸친 대제국을 이루어 놓은 것은 광개토왕이다. 오늘날 만포진 대안에 남아 있는 광개토왕 비석에는, 만주의 쑹화 강과 랴오허 강까지 영토를 넓히고 백제를 쳐서 지난날의 원한을 풀고 약한 신라를 도와 왜적을 공격하였다는 업적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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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비(통구)
광개토왕비(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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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임금인 장수왕은 남쪽으로 세력을 뻗치고자 5세기에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니, 이에 위협을 느낀 백제와 신라는 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대항하였다.

신라의 흥기

서라벌을 중심으로 한 사로국에서 박(朴)⋅석(昔)⋅김(金)의 세 씨족이 번갈아 나라를 다스리더니 뒤늦게나마 고대 국가를 이루었다,

4세기 말 내물왕 때에 이르러 김씨가 세력을 잡고 영남 일대를 통일하였으며, 중국에도 사신을 보내어 외교에 힘썼다. 5세기에 이르러서는 국내의 질서를 바로 잡고 제도를 정비하는 한편 역(驛)을 두어 교통을 발전시켰다. 장수왕의 공격을 막고자 백제와 동맹을 맺은 것도 이 무렵이다. 6세기의 지증왕 때부터는 나라 이름을 신라(新羅)로 고치고 왕이라 칭하였으며, 산업에 힘을 기울여서 소로 밭을 가는 방법도 이용되었고, 법흥왕 때 불교를 승인하여 정신의 단합을 꾀하는 한편 국가다운 체제를 갖추었다. 뒤늦게 일어난 신라도 고구려⋅백제와 힘을 겨루기 시작하면서 우산국(울릉도)과 대가야를 정복하였다.

진흥왕은 훌륭한 인재를 기르기 위하여 화랑(花郞) 제도를 마련하여 한강 유역의 땅을 빼앗는 한편 더 북쪽으로 나아가 함경 남도 지방까지 세력을 뻗쳤는데, 지금도 이 때 정복했던 네 곳에 진흥왕의 비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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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 순수비(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북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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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재건

고구려에 쫓겨 금강 유역으로 남하한 백제는 지세를 이용하여 고구려의 세력을 막고 나라 안의 질서를 잡고자 하였다. 백제를 다시 크게 일으켜 보려고 애를 쓴 성왕은 도읍을 웅진에서 다시 사비성으로 옮기고 불교를 장려하면서 중국⋅일본 등과 교역하는 한편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으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백제 사람들은 성격이 온후하여 싸움에는 강하지 못하였으나, 중국에서 받아 들인 문화를 되새겨 불교와 한문, 그 밖의 여러 가지 기술을 일본에 전해 주었다.

을지문덕 장군

수 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였지만, 고구려는 터어키족〔突厥族〕과 연락하여 이를 공격(598)할 기세까지 보였다.

수의 양제는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여러 차례 쳐들어왔으나 드디어 을지문덕 장군의 교묘한 작전으로 청천강에서 크게 패하니 이것이 원인이 되어 수는 멸망하였다.

수의 뒤를 이은 당과 친교를 맺은 신라가 고구려를 괴롭히자 고구려는 백제와 연합하여 이에 대항하였다. 당 태종은 고구려를 공격하고자 여러 차례 요동에 쳐들어왔으나, 안시성(安市城)의 방어를 뚫지 못해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주요 용어》

광개토왕, 나제 동맹, 화랑 제도, 사로국, 진흥왕의 비, 사비성, 안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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