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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원 3. 통일 국가의 형성과 세계
  • Ⅰ. 신라의 민족 통일
  • [1] 민족 국가의 성립과 발해

[1] 민족 국가의 성립과 발해

국제 정세

신라에게 한강 유역의 땅을 잃은 백제는 건너편 고구려와 손을 잡고 신라에 자주 쳐들어갔으므로 신라는 할 수 없이 그 당시 고구려와 싸우고 있던 당 나라와 친교 정책을 펴게 되었다. 김춘추(金春秋)의 외교와 김유신(金庾信)의 전략으로 신라는 새 영토를 늘이는 한편 유학생과 구법승을 당에 보내어 문화를 받아 들이는 데도 힘썼다. 한편 수를 멸망시킨 당의 태종은 동방을 손에 넣으려는 야심을 품고 여러 번 고구려를 치려다가 실패하던 터에 마침 신라가 원조를 청해 오므로, 나⋅당 연합군을 조직하자는데 곧 찬성하였다.

백제의 멸망

백제의 의자왕이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바로 잡을 생각을 잃고 향락에만 도취되어 있을 때 김유신이 거느린 신라의 군대와 소정방이 거느린 당의 군대가 탄현(炭峴)과 백강(금강 입구)에 쳐들어왔다. 계백(階伯)의 결사대가 황산벌에서 이를 막았지만 끝내 힘이 다하여 사비성은 함락되고 말았다(660년).

의자왕이 항복하자 왕족 복신(福信)과 중 도침(道琛) 등은 백제를 다시 일으켜 보려고 사비성을 포위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당은 백제 땅에 웅진 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고 식민지로 삼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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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사지 5층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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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멸망

백제가 망한 뒤 목표를 고구려에 돌린 나⋅당 연합군은 이어 평양성을 공격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명장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죽은 뒤에 내분이 일어나 당의 군대를 막아내지 못하여 마침내 망하고 말았다(668년). 고구려에서도 검모잠 같은 사람이 부흥 운동을 일으켰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당은 평양에 안동 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어 이를 다스렸다.

신라의 통일 사업

신라의 문무왕은 당과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넘어뜨리기는 하였으나 당이 그 땅을 차지하려 드는 까닭에 당과 맞서게 되었다.

먼저 웅진 도독부를 공격하여 80여 성을 빼앗고, 예성강 하구와 황해도 지방의 땅을 도로 찾았다. 문무왕은 이어 676년에 한강 이북으로 진출하여 당의 주둔군을 몰아내니 안동 도호부도 만주로 옮겨 갔다. 이로써 신라는 대동강에서 함경 남도 덕원에 이르는 지방까지 완전히 통일하였다.

발해의 일어남

고구려의 유족들은 부흥 운동이 실패한 뒤 북으로 옮아가 대조영(大祚榮)을 중심으로 발해를 세웠다(699년). 고구려의 뜻을 이어 받은 발해는 이웃의 말갈족과 손을 잡고 북으로는 쑹화 강, 서쪽으로는 랴오허 강에 이르는 넓은 땅을 차지하였다.

처음부터 발해에는 훌륭한 임금이 많이 나와 국세를 크게 떨쳤고, 특히 선왕(宣王) 때에 이르러서는 중국 사람들이 발해를 두고 해동 성국(海東盛國)이라고 일컬을 만치 문화와 경제가 발달하였다. 짜임새 있는 계획으로 건설한 서울을 툰화(敦化) 부근에 두고 전국을 5경 15부 62주로 나누었으며, 당 나라와 화친한 뒤로는 그 문화를 받아 들이는 한편 멀리 왜국과도 교역을 하였다.

발해는 그 후 200년 동안 계속되었으나 주민의 대다수가 말갈족이었기 때문에 동족 의식이 없어 차차 그 힘이 약해지다가 결국 거란(契丹)에 의하여 멸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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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신라와 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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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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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용어》

백강, 웅진 도독부, 안동 도호부, 해동 성국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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