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을 완수한 고려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고 도읍지를 개성으로 옮겨 후삼국의 소란을 통일하였다.
태조(太祖)는 민심을 수습하기에 힘쓰는 한편 서북 지방의 경계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평양에 서경(西京)을 두었다. 거란은 사신과 예물을 보내어 화친하기를 원했으나 사신을 목베고, 고구려의 옛터를 다시 찾으려는 북진 정책을 첫째로 내세웠다.
신라의 문화적 전통을 이어 받은 고려는 신라의 생활 풍습을 그대로 이어 불교를 숭상하였으므로 나라의 기틀이 속히 자리잡혔다.
지방의 세력 있는 사람들에게 자치를 허용하고 발해의 유민까지도 잘 포섭하여 민심을 얻었다.
사회의 안정
나라가 안정되자 경제적 사회적 발전을 이룩하기 위하여 광종(光宗)은 여러 가지 좋은 정책을 썼다. 쌍기(雙冀)의 의견에 따라 과거 제도(科擧制度)를 실시하여 문벌을 떠나 실력에 의한 관리를 뽑았다. 전시과(田柴科)는 관리들에게 봉급으로 토지를 나누어 주는 것으로, 땅의 매매를 금하였다. 그 밖에 공음전(功陰田)⋅공해전(公廨田)⋅구분전(口分田)과 같은 여러 가지 토지 제도를 마련하는 한편, 개간을 장려하고 노비들의 억울한 사정을 재판하여 해방시켜 주는 노비 안검법(奴婢按檢法)도 만들었다.
정비되는 여러 제도
6대 성종 때에 이르러서 정치 제도가 크게 정비되었다. 귀족 중심이던 신라의 정치 제도를 정리하여, 중앙에 3성(省) 6부(部)를 두고 지방을 12목(救)으로 나누었다가 다시 10도(道)로 고쳤다.
군대는 2군(軍) 6위(衛)를 두고 동북과 서북에는 병마사(兵馬使)를 보내어 변경을 지키도록 하였다.
이 밖에 어사대(御史臺)⋅중추원(中樞院)⋅홍문관(弘文館) 등의 여러 기관도 마련되었다. 교육은 크게 일어나지 못하였으나, 오늘날의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는 비서성(秘書省)⋅수서원(修書院)까지 마련하였다.
《주요 용어》
북진 정책, 과거 제도, 노비 안검법, 공해전, 전시과, 3성 6부, 병마사, 어사대, 수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