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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무신 정권의 고려

[1] 무신 정권의 고려

최씨의 집정

최충헌은 흩어진 정치를 바로 잡고 자주 일어나는 반란을 진압하였다. 왕에게 봉사 십조(封事十條)를 올려 그릇된 정치를 충고하고 문신을 다시 등용하였으며, 또한 권세를 부리는 귀족을 누르니 고려에 새로운 기운이 솟아나는 듯하였다.

그러나 최씨의 권력이 커져 이들은 왕도 마음대로 폐립하였으며 사병(私兵)을 기르고 도방(都房) 정치를 하였다. 최충헌의 아들 최우(崔瑀)가 정권을 이어 받자 자기 집에 정방(政房)을 꾸미기에 이르니 마치 최씨의 고려가 된 느낌이었다.

몽고의 침입

이러한 어려운 때 칭기스칸이 통일한 몽고가 금(金)을 멸하고 1231년 고려에까지 쳐들어왔다.

몽고군은 박서가 지키고 있는 귀주(龜州)를 두고 길을 돌아 직접 개경을 포위 공격하니 고려는 부득이 몽고에 항복하게 되었다. 몽고의 장군 살리타(撒禮搭)는 72명의 다루가치(達魯花赤)를 두고 고려의 정치를 감독하게 하였다.

몽고의 간섭이 심해지자 최우는 강화도(江華島)로 도읍을 옮기고 최후의 힘을 다하여 몽고에 대항하였다. 몽고는 30년 동안 여섯 차례에 걸쳐 고려에 침입하였으나, 물에 익숙치 못하여 강화에는 쳐들어가지 못하고 내륙 지방을 모조리 파괴 또는 약탈하였다.

강화도에 40년을 머무르는 동안에 나라의 살림은 쪼들리고 문화재는 파괴되었으나 귀족들은 그 안에서도 사치한 생활을 하고 있어 백성들의 고통은 심하였다.

최씨의 몰락과 삼별초

최우가 죽고 항(沆)⋅의(竩)가 정권을 이어 받았으나, 나라 안의 형편은 날로 혼란해져서 귀족들은 최씨를 몰아 내고 강화도에서 나와 몽고에 항복하였다.

그러나 삼별초(三別抄)는 몽고에 끝까지 대항하기 위해서 배중손(裵仲孫)을 중심으로 뭉쳐서 강화도에 남아 계속 대항하다가 근거를 진도(珍島)로 옮겼고, 다시 제주도에까지 가서 끝내 굽히지 않았다.

삼별초는 고려 무인들의 기상을 나타낸 양규⋅강감찬⋅윤관 등과 더불어 독립 정신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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