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2차 교육과정
  • 중학교 국사 2차
  • 단원 3. 통일 국가의 형성과 세계
  • Ⅲ. 고려 후기의 사회와 아시아
  • [3] 고려 후기의 문화

[3] 고려 후기의 문화

불교와 유학

정치와 사회가 불안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세력만은 커져서 절의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군대도 기르고 양조⋅제지와 같은 수공업품도 만들어 내었다. 지눌(知訥)⋅모은(慕恩)⋅혜근(惠勤)과 같은 명승이 나왔고, 몽고병이 태워 버린 대장경을 다시 만들어 내었는데, 이것이 유명한 8만 대장경으로서 지금도 합천 해인사에 간직되어 있다.

확대보기
대장경
대장경
팝업창 닫기

송 나라에서 일어난 성리학(性理學)을 안향(安珦)이 받아 유학을 더 발전시키고 이제현(李齊賢)⋅이색⋅정몽주 같은 이는 불교를 배척하는 운동까지 일으켰다.

확대보기
안향
안향
팝업창 닫기

학문의 발달

충선왕은 원 나라에 있을 때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학자들을 왕래시켰다. 고려 시대 후기의 문학 작품으로서는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 이규보(李奎報)의 동국 이 상국집(東國李相國集),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 등이 있어 고려 시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시가(詩歌)에 있어서도 한문에 이두를 섞어서 지은 장가(長歌)⋅관동 별곡(關東別曲)과 같은 것이 전해 오며 평민들이 부르던 가요로도 청산 별곡(靑山別曲)과 그 외에 몇 편의 시조가 전해 오고 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역사책으로는 김부식(金富軾)의 삼국 사기(三國史記), 일연(一然)의 삼국 유사(三國遺事), 이승휴(李承休)의 제왕 운기(帝王韻紀)가 있다.

미술 공예

미술 공예도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섬세한 신라 예술품에 비하여 다소 떨어진 감이 있다. 더구나 후기의 정치적 혼란으로 예술 활동은 활발치 못하였다.

영주 부석사(浮石寺)의 무량 수전(無量壽殿)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서 그 기둥 모양의 특수함과 아미타여래의 목조 좌상으로 유명하다. 석조 불상으로는 논산의 은진 미륵이 있고 그림은 공민왕이 잘 그렸는데 천산 대렵도(天山大獵圖)는 지금까지 남아 있다.

확대보기
부석사 무량 수전 내부
부석사 무량 수전 내부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은진 미륵
은진 미륵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공민왕의 천산 대렵도
공민왕의 천산 대렵도
팝업창 닫기

글씨는 송설체(松雪體)가 유행하여 탄연(坦然)이 뛰어났고 유신(柳伸)은 신라의 김생과 더불어 신품 사현(神品四賢)이라고 불리웠으며, 인종도 글씨에 능하였다.

확대보기
인종의 글씨
인종의 글씨
팝업창 닫기

고려 시대의 자랑은 역시 고려 자기이다.

특히 상감 청자(象嵌靑磁)는 세계에서도 이름이 높으며, 그 밖에 청기와⋅유리 그릇도 만들었다. 몽고병을 쫓으려는 신앙심에서 출발한 8만 대장경은 불교뿐만 아니라 인쇄술의 발달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한 금속 활자의 발명(1234)은 서양보다 200년이나 앞선 것으로서 우리 나라의 큰 자랑이다.

확대보기
상감 청자
상감 청자
팝업창 닫기

사회 생활

신라의 풍습을 이어 받아 민족 국가로 발전한 고려 시대는 전통의 틀이 잡혀진 시기로서, 풍속 생활과 민간 신앙이 고정되어 연등회나 팔관회 등의 행사는 국가 경제에 영향을 끼칠 만큼 성행하였다. 서양에까지 코리어(Corea)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고려는 중국이나 일본은 물론 원을 통해서 서방으로부터 과학을 배워 들였다.

한편 우리 나라에 성씨(姓氏) 쓰기가 보급되게 된 것도 이 때의 일이었다. 또한 이 시기는 우리 나라 역사상 인종의 교류가 가장 많았던 때이었다.

의복(衣服)에 혁명을 일으킨 무명은 문익점(文益漸)이 원에 사신으로 갔다가 얻어 온 것이며, 이로부터 무명 옷을 입게 되었다.

《주요 용어》

성리학, 8만 대장경, 만권당, 장가, 삼국 사기, 삼국 유사, 부석사, 상감 청자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