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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원 5. 조선 시대의 변천과 근대 세계의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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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사화와 당쟁

[1] 사화와 당쟁

유학계의 갈라짐

유학은 불교와 달라서 정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정치에 참여하는 유학자들도 많았고, 그들 사이에 의견이 대립되는 일도 자주 일어났다. 세조(世祖) 때부터 유학자들은 학문의 입장을 떠나서 파벌을 만들기 시작했다.

김종직(金宗直)⋅김일손 등의 신진 학자를 중심으로 한 사림파(士林派)와 정인지⋅신숙주⋅서거정 등과 같이 정치적 세력을 잡고 있었던 훈구파(勳舊派)가 날카롭게 대립되었다. 그 밖에도 세조의 처사에 반대하는 사람들이나 세상을 등지고 시가(詩歌)와 학문의 연구로 세월을 보내는 선비들이 또 따로 뭉치었다.

이러한 대립은 날이 갈수록 심하여져 마침내 사화(士禍)를 일으키게 되었다.

사대 사화

이러한 파벌들의 세력 다툼은 정치를 혼란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많은 학자들이 화를 입은 사화의 원인이 되었다.

연산군 4년(1498)에는 역사 기록을 그릇되게 썼다는 이유로 많은 학자들을 죽인 사건이 일어났다(무오〈戊午〉 사화). 6년 후 연산군은 어머니가 억울하게 죽은 원한으로 다시 많은 선비를 죽였다(갑자〈甲子〉 사화). 무오 사화는 사림파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연산군을 시켜서 한 일이고, 갑자 사화는 그 반대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중종 반정(中宗反正)으로 연산군을 쫓아낸 중종(中宗)은 조광조(趙光祖) 등의 신진 학자를 등용하여, 정계를 쇄신하며 미신을 타파하고 미풍 양속을 기르고자 향약(鄕約)을 실시하였다. 구 정치인들은 이에 반대하여 조씨 일파를 죽였는데, 이것을 기묘(己卯) 사화라고 한다. 명종(明宗) 때에는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외척 간에 반목과 암투를 계속하다가 또 여러 선비가 화를 입은 을사(乙巳) 사화가 일어났다.

유학계의 움직임

네 차례에 걸친 사화는 당파 싸움의 실마리가 되어, 이후 조선 시대 300년 간을 정치적 대립과 사회적 혼란으로 몰아 넣었다. 유학자들 사이에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났는데, 유성룡(柳成龍)과 같이 정계에 진출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많은 학자들은 정계에 뜻을 안 두고 학문 연구나 교육에만 전심하였다. 성혼(成渾)⋅서경덕(徐敬德)⋅조식(曹植) 같은 사람은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이황(李滉)⋅이이(李珥) 같은 이는 학문 연구를 하면서 가끔 조정에 나가 일을 하였다.

많은 학자들은, 정치 도구로서의 유학에서 벗어나서 학문 연구만을 위하여 벼슬을 버리고 시골에 내려가서 서원(書院)을 세워 제자를 기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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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의 풍속도(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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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쟁의 피해

서원의 수가 늘어나자 서원을 중심으로 또 파벌을 만들어 서로 다투게 되니 오히려 당파 싸움을 부채질하는 결과가 되었다.

선조(宣祖) 8년(1576),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 사이의 개인적 대립이 실마리가 되어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대립이 일어나게 되자 선비들은 차차 어느 쪽에든 가담하게 되고 패 싸움이 그치지 않았다. 이이는 당쟁이 심해져 가는 것을 염려하여 두 파를 화해시켜 보려고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당파 싸움이 심해짐에 따라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갈리고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어, 이른바 사색 당파가 생겨났다. 사색 당파는 제각기 수단을 가리지 앓고 정권을 잡으려 하니 관리들은 부패하고 사회는 더욱 혼란해졌다. 이 무렵 각지에 도적 떼가 일어났는데, 임꺽정(林巨正)의 무리는 그 대표적인 것이다. 우리 나라에 침입해 온 왜적을 막지 못한 것도 당파 싸움으로 인해 벌어졌던 민족의 비극이었다.

《주요 용어》

사대 사화, 향약, 훈구파, 사림파, 동인, 사색 당파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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