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2차 교육과정
  • 중학교 국사 2차
  • 단원 6. 세계의 움직임과 우리 나라의 근대화
  • Ⅰ. 19세기 서양의 발전
  • [1] 자유주의의 성장

[1] 자유주의의 성장

비인 체제와 신성 동맹

나폴레옹의 세력이 무너진 뒤 유럽 각국은 오스트리아의 비인에서 회의를 열고 유럽을 프랑스 혁명 이전의 상태로 돌릴 것을 결정했다(1815). 이러한 보수 정책을 자기들은 정통주의라고 부르면서 러시아⋅프로이센⋅오스트리아⋅영국 등의 국왕은 크리스트교의 사랑과 평화를 뜻하는 신성 동맹(神聖同盟)을 맺었다.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는 신성 동맹을 이용하여 자유주의가 성장하는 길을 막으려는 운동에 앞장 섰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후퇴하지 아니하고 여러 나라의 주민들은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을 받아 앞으로 전진을 계속하였고, 큰 나라에 눌려 지내던 여러 나라들도 자유의 정신에 힘을 얻어 독립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리이스는 오랫 동안 터어키의 지배를 받아 오다가 자유주의의 영향으로 독립 전쟁을 일으켰다. 신성 동맹은 이것을 반대하였으나 러시아⋅영국⋅프랑스의 원조로 독립을 얻었다(1829).

한편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들도 나폴레옹 전쟁으로 유럽이 혼란해지자 독립 운동을 일으켜 아르헨티나⋅칠레⋅멕시코 등이 독립하였다. 메테르니히는 이것도 반대하였으나 영국이 간섭에 반대하고 또 미국이 몬로 정책을 선언하여 그의 기세를 꺾었다.

확대보기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
팝업창 닫기

프랑스의 자유주의 운동

프랑스 혁명의 정신은 한때 반대파의 기세에 눌리었다. 루이 18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샤를마뉴 10세는 보수주의 정치가 폴리냑을 등용하여 언론의 자유를 누르고 신앙의 자유를 빼앗으며 의회를 해산하니, 이에 격분한 파리 시민들은 1830년에 7월 혁명을 일으켰다.

확대보기
7월 혁명
7월 혁명
팝업창 닫기

7월 혁명 후 프랑스 황제로 추대된 루이 필립은 처음에는 시민의 왕으로 자처하고 자유주의를 지킬 듯하였으나, 차츰 보수적 경향으로 흘러 나중에는 금권 정치(金權政治)를 하게 되었고 언론과 집회를 탄압하였다. 1848년 2월 루이 필립이 선거법 개정을 요구하는 집회를 무력으로 해산하자 시민들은 또 다시 폭동을 일으켜 루이 필립을 쫓아내고 루이 나폴레옹을 대통령으로 뽑아 공화제를 폈다(2월 혁명).

두 차례에 걸친 혁명으로 프랑스 국민들은 보다 많은 자유를 누리게 되고, 이 영향을 받아 벨기에는 독립했으며 프러시아⋅오스트리아 등 여러 곳에서도 자유를 위한 폭동이 일어났다. 특히 7월 혁명의 영향으로 메테르니히가 물러난 것은 유럽의 자유주의 발전에 뜻깊은 일이었다.

영국의 민주적 발전

영국에는 빅토리아 여왕이 나타나서 국세가 날로 떨치기 시작하였다. 영국의 민주 정치는 무엇보다도 정당의 발전에서 이루어졌다. 17세기에 토리당과 휘그당은 정당 내각을 이루더니, 1830년대를 전후해서는 보수당⋅자유당으로 이름을 각각 바꾸어 보수 세력과 시민 세력을 대표하였고, 디즈레일리⋅글래드스턴과 같은 훌륭한 정치가가 나타났다.

확대보기
빅토리아 여왕
빅토리아 여왕
팝업창 닫기

또한 1829년에는 종교적 차별을 폐지하는 카톨릭 해방법이 공포되었고, 1832년에는 선거법을 개정하여 인구 비례로 의원을 선출하도록 하였다. 1846년 곡물법을 폐지하였는데, 이것은 영국이 보호 무역으로부터 자유 무역으로 시책이 바뀌어져 갔음을 말한다.

《주요 용어》

비인 체제, 신성 동맹, 몬로주의, 7월 혁명, 2월 혁명, 토리당, 휘그당, 카톨릭 해방법, 곡물법 폐지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