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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족의 재통일과 발전

〔학습 개요〕

신라 말기 후삼국의 분열을 수습하고 재통일을 이룩한 것이 고려였다. 태조 왕건은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호족 세력을 통합하고 발해 유민을 흡수하며, 나아가서는 건국 이념으로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려는 북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북진 정책은 그 후에도 변함 없이 고려의 기본 정책이 되었다. 고려 초기에는 호족 세력에 의해 왕권이 위협당하는 형편이었으나, 광종은 왕권 안정을 위한 강력한 정책을 썼고, 이어 성종 때에는 왕권 안정을 바탕으로 정치, 경제, 과거, 교육 제도가 정비되기 시작하였다.

고려는 북진 정책의 수행 초기에 강력한 적을 맞아, 거란으로부터 세 차례에 걸친 침략을 당하였으나, 끝내 이를 물리쳤다. 이러한 초기의 발전 과정에서 고려의 사회, 경제, 문화는 귀족화하는 현상을 빚게 되었다.

학습 문제

1. 어찌하여 후삼국이 나타나고, 왕건은 어떻게 후삼국을 통일하였을까?

2. 고려는 민족 재통일을 위하여 어떤 정책을 썼을까?

3. 고려의 정치, 경제, 군사, 교육, 과거 제도는 어떠했을까?

4. 거란은 어찌하여 고려에 침입하였고, 고려는 이를 어떻게 격퇴하였을까?

후삼국의 혼란

통일 신라 말기의 호족들은 여러 마을을 차지하고 농민들에게서 많은 조세를 거두었다. 이들 호족 중에는 중앙 정부에 대항할 만한 세력을 갖춘 자도 나왔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견훤과 궁예였다.

견훤은 남서 해안을 지키던 장군으로, 많은 무리를 모아 후백제를 세우고, 도읍을 완산주(지금의 전주)에 정하였다(900). 그는 대체로 옛날의 백제 땅에 해당되는 지금의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의 지역을 아울렀다.

궁예는 양길의 부하로 활약하다가, 송악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우고 후고구려라 하였다(901). 후고구려는 뒤에 국호를 태봉으로 고치고, 도읍을 철원으로 옮겼다. 궁예가 다스린 땅은 지금의 강원도, 경기도, 황해도의 대부분과 평안도, 충청도의 일부로서, 대체로 고구려 옛 땅의 남부에 해당된다.

후백제와 후고구려가 신라와 맞서게 되자 나라 안은 세 나라, 즉 후삼국의 혼란한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 통일

후삼국에서 가장 세력이 큰 후고구려의 궁예는 교만, 포악하여 민심을 잃어 마침내 부하들에게 쫓겨나고 말았다. 궁예가 쫓겨난 후, 인망이 높은 왕건이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는데, 이가 곧 고려 태조이다(918). 왕건은 본래 송악의 호족으로, 궁예의 부하로 있으면서 싸움 때마다 빛나는 공을 세웠다. 태조 왕건은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라 하고, 이듬해에는 도읍을 철원에서 고향인 송악(지금의 개성)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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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의 형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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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후백제는 서로 세력을 다투었다. 고려는 후백제와의 대결에서 여러 차례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나, 점차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국력이 쇠약해져 후백제의 공격에 시달리던 신라는 마침내 나라를 고려에 넘기고 말았다(935).

이 무렵, 후백제에서는 큰 내분이 일어났는데, 견훤은 그의 아들 신검에게 쫓겨 고려 태조 왕건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태조는 그를 후히 대접하는 한편, 신검의 군대를 쳐서 후백제를 멸망시켰다(936). 이리하여, 약 반 세기 간 분열되었던 나라는 다시 고려로 통일되었다.

태조의 정책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는 안으로 나라의 기반을 튼튼히 하는 정책을 세우고, 밖으로 북진 정책을 건국의 이념으로 삼았다.

고려는 국호에서 보이듯이 고구려 계승 정신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기 위한 북진 정책을 내세웠다. 태조는 통일 신라 이후 평양을 서경이라 하여 이를 북방 개척의 기지로 삼아 적극적인 북방 진출을 꾀하였다. 이 결과, 태조 말년에는 청천강 하류에서 영흥 지방에 이르는 넓은 영역을 수복하였다. 북진 정책은 뒷날 북방 민족과의 사이에 충돌을 일으켰지만, 고려가 그 뒤에도 계속 추진했던 기본 정책이 되었다.

태조는 또, 민족 융합 정책을 취했다. 당시 각 지방에서 반독립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던 호족 세력을 잘 포섭하고, 고구려 계통의 발해 유민을 받아들였다. 또, 쓸 만한 인재라면 신라인이거나 후백제인에게도 벼슬을 주었다.

특히, 태조는 불교를 중히 여겨 많은 절을 세워, 국가와 왕실의 번영을 빌도록 하였는데, 부처의 은덕을 입어 국가의 안전과 발전을 바라는 호국 불교 사상은, 고려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왕권의 안정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는 계 백료서, 정계, 훈요 10조 등을 지어 신하와 자손들에게 가르쳤다. 그러나, 왕권에 대립하는 호족 세력 때문에 왕권이 건국 초부터 안정된 것은 아니었다.

훈요 10조

1. 사원을 지어 불공을 드린다.

2. 사원을 지을 때에는 도선의 설에 의한다.

3. 왕위 계승은 적자, 적손을 원칙으로 한다.

4. 거란과 같은 야만국은 본받지 않는다.

5. 서경은 지덕이 순조로우니 중시한다.

6. 연등⋅팔관회를 중시한다.

7. 소인을 멀리하고 현인을 가까이하며 세금을 가벼이 하고 상벌을 공평히 한다.

8. 인물의 등용을 신중하게 한다.

9. 관리의 녹은 그 직무에 따라 제정한다.

10. 경사를 널리 읽고, 옛 어른의 말을 거울삼는다.

혜종 때, 외척 왕규가 호족 세력을 기반으로 하여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실패한 일이 있었다. 이에, 광종은 왕권을 확립하기 위하여 호족 세력을 억눌렀다. 그는 먼저 노비 안검법을 실시하여 호족들이 불법으로 소유하고 있는 많은 노비를 해방시켰다.

또, 처음으로 과거제를 실시하여, 호족들의 자제가 관리로서 출세하던 그 때까지의 특권을 많이 제한하는 한편, 왕을 돕는 새로운 관리를 뽑았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 호족들의 세력은 약해지고 왕권은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왕권의 안정으로 나라의 기초는 튼튼해져 성종 때부터는 문물 제도가 정비되기 시작하였다.

정치 제도의 정비

건국 초에 신라와 태봉의 제도를 사용하던 고려는, 성종 때부터 문물 제도를 정비하기 시작하여 문종 때에 가서 거의 이루었다.

성종 때에는 내사 문하성(뒤에 중서 문하성이라 함.), 상서성, 중추원 등의 중앙 정치 기구를 두었다. 중서 문하성은 국가의 정책을 작성, 심의하는 기관이며, 또 상서성 밑에 이, 병, 호, 형, 예, 공의 6부가 예속해 있어 각기 행정을 맡아 집행하였다. 중추원은 왕명 전달, 군사 기밀 및 왕실 호위의 임무를 맡아 보았다. 또, 중서 문하성과 중추원의 고관들이 모여 국가의 중요 정책을 의논하는 도병마사라는 기관이 있었다. 그 밖에, 전곡을 출납하는 일을 맡은 3사와 감찰관인 어사대도 중요한 기구의 하나였다.

처음에 호족들의 자치에 맡겨졌던 지방 행정은, 성종 때에 12목이 설치되고 지방관이 파견되면서부터 차차 정비되기 시작하여, 그 후 전국이 5도 양 계로 나누어졌다. 안찰사를 파견하는 각 도에는 주, 부, 군, 현을 두는 한편, 향, 소, 부곡이라 하여 천민이 거주하는 특수 행정 구역도 있었다. 병마사가 다스리는 양 계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북방 국경 지대와 동해안 방면에 설치되었고, 그 밑에는 대부분 진을 배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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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도 양 계
5도 양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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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고려에서는 지방 호족들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사심관 제도와 기인 제도를 두었다.

군대는, 개경에는 2군 6위의 경군이 있었고, 지방에는 주현군이 있어, 국방은 물론 수도 및 지방의 경비와 치안을 맡았다.

토지 제도의 정비

고려의 토지 제도는, 경종 때에 마련된 전시과 제도를 토대로 하여 정비되었다. 전시과 제도는 관리들에게 그들의 지위에 따라 일정한 토지와 임야를 나누어 주는 제도였다. 토지를 분배받은 관리들은 그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들에게서 조세를 받아 생활을 하였다. 전시과의 토지는 세습할 수 없으며, 본인이 죽으면 나라에 돌려 주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리고, 공신이나 고급 관리에게 지급되는 공음전이 있었는데, 이것은 자손에게 상속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밖에, 왕실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내장전을 비롯하여, 관청의 경비를 마련하는 공해전도 있었으며, 또 사원에 딸린 사원전도 있었다.

교육과 과거 제도

태조 때에 이미 개경과 서경에 학교가 설립되었으나, 일종의 국립 대학인 국자감이 개경에 세워진 것은 성종 때이다. 국자감은 유학의 경전과 문예를 가르치는 국자학, 태학, 사문학과, 기술 부문의 교육을 맡은 율학, 서학, 산학으로 나누어졌다.

초기에 경학 박사와 의학 박사 1명씩을 보내어 지방 교육에도 힘쓰던 고려는, 인종 때 지방 교육을 위하여 향학을 세웠다. 이 때의 교육은 관리를 양성하는 데 더 큰 비중이 주어졌으므로, 교육 제도는 과거 제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광종은 왕권 강화책의 하나로,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기 위하여 과거 제도를 실시하였다.

과거에는 문예를 시험하는 제술과(진사과)와, 유교의 경전을 시험하는 명경과, 그리고 의술, 법률, 산술 등을 시험하는 잡과 및 승려들을 위한 승과가 있었다. 무신 등용을 위한 무과는 고려 말 공양왕 때 생겼기 때문에 고려 시대에는 거의 시행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고려 때 관리로 등용되는 길은 과거제 외에 귀족의 자제를 특별히 채용하는 음서제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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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의 관료 승진도
고려인의 관료 승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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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과의 투쟁

고려는 안으로 호족 세력을 눌러 왕권을 안정시켜 문물 제도를 정비하고, 밖으로 북진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는데, 북방 민족인 거란(요)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에,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자 태조는 거란과의 외교 관계를 끊었고, 정종은 광군을 조직하여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한편, 거란은 고려가 북진 정책을 추진하면서 송과 손을 잡고 거란을 배격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성종 때 거란 장수 소손녕이 대군을 거느리고 고려에 침입하였다(993). 이 때, 고려의 많은 신하들은 땅의 일부를 내주고 화평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서희는 적진에 들어가 거란을 설득시켜 물리쳤다. 이 때, 고려는 압록강 동쪽의 이른바 강동 6주를 얻게 되었다.

현종 때 거란의 제2차 침입을 받았다. 이에 앞서, 고려에서는 강조가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세우는 정변이 일어났다. 거란의 성종은 이를 트집잡아 대군을 거느리고 고려에 쳐들어와 개경을 함락시키고, 현종의 입조를 조건으로 하여 돌아갔다.

그 후, 거란의 장수 소배압이 제3차로 침입해 왔으나(1018), 강감찬이 거느린 고려군에게 귀주에서 거의 전멸되었는데, 이를 귀주 대첩이라 한다.

당시 고려가 거란의 침입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국초부터 북진 정책을 내세워 국방을 튼튼히 하였고, 문물 제도를 안정시켜 나라의 힘을 길렀기 때문이다.

세 차례의 거란 침입이 있은 후, 두 나라는 평화 관계를 맺고 사신을 교환하였다. 화평이 성립된 이후에도, 고려는 국방을 소홀히 할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닫고 개성 둘레에 튼튼한 나성을 쌓는 한편, 압록강 입구에서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지역에 걸쳐 천리 장성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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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 6주와 천리 장성
강동 6주와 천리 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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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 장성
천리 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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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정리

1.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는, 안으로 호족 세력을 회유하고 불교를 숭상하였으며, 밖으로 북진 정책을 썼다.

2. 초기에는 호족 세력 때문에 왕권이 불안하였으나, 광종의 왕권 강화책으로 왕권이 안정되고, 제도의 정비가 뒤따르게 되었다.

3. 고려의 경제 생활은 전시과를 토대로 유지되었고, 또 새로운 관리 등용법인 과거제의 실시는 왕권을 강화하였다.

4. 고려는 북진 정책의 추진 과정에서 거란의 침략을 거듭 받았으나, 이를 물리치고 건국 이념인 북진 정책을 계속 추구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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