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3차 교육과정
  • 중학교 국사 3차
  • Ⅳ. 고려 시대의 생활
  • 2. 고려 전기의 사회와 문화

2. 고려 전기의 사회와 문화

〔학습 개요〕

고려의 사회 구성은 귀족과 하급 관리들로 이루어진 지배층과, 농민과 천민으로 이루어진 피지배층으로 형성되었는데, 이들의 생활은 신분에 따라서 각각 달랐다.

고려가 귀족 중심의 사회라고는 하나, 민중 생활의 안정을 위하여 각종 구제 시설을 설치하였다. 문물 제도의 안정에 따라 상업 활동도 점차 활발해졌고, 화폐도 만들어졌다.

신라에 이어 고려에서도 불교가 융성했는데, 대장경판은 그 대표적 유산이다. 과거제의 시행은 유학과 한문학의 발달을 가져왔고, 삼국사기를 비롯한 각종 역사책도 편찬되었다. 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고려 청자가 나타나고, 송과의 문화적, 경제적 교류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학습 문제

1. 고려 전기의 사회 구성은 어떠했으며, 귀족과 민중의 생활은 어떠했을까?

2. 고려 사회에서 불교와 유학은 어떠한 역할을 하였을까?

3. 고려 문화는 어떠한 특색을 지녔으며, 대표적인 문화 유산은 어떠한 것들일까?

4. 송과의 문물 교류 활동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사회의 구성과 생활

신라 말의 혼란으로 크게 흔들렸던 사회 신분은 고려에 이르러 새로이 정비되었다. 고려 초의 호족이 중앙의 귀족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왕실과 혼인 관계를 가진 집안에서 세력을 누리게 되었다.

성종 이후 나라의 여러 문물 제도가 안정되면서 사회 신분은 대체로 왕족을 비롯한 문무 양반, 궁중에서 일하는 남반, 하급 관리와 기술직 관리, 군인, 농민 및 천민으로 나뉘어 자리잡혔다.

문무 양반을 중심으로 한 귀족은 국가에서 과전, 공음전 등의 토지를 받고, 국학에 입학할 수 있는 혜택이 있었다. 무관보다도 문관이 더 좋은 대우를 받은 사회였으므로 가문은 매우 중요시되었다.

궁중이나 관청에서 실무를 맡아 일하는 하급 관리와 기술직 관리 및 지방의 향리들은, 귀족만은 못하나 좋은 대우를 받았다.

일반 민중의 대부분을 차지한 농민은, 생산과 노동에 종사하며, 조세, 공납, 역의 의무를 졌다. 농민들은 공전을 경작하여 생산량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세를 국가에 바쳐야 했으나, 사전을 경작한 경우에는 생산량의 2분의 1에 해당하는 조를 그 토지의 주인에게 바쳐야 했다.

농민들이 바치는 조세와 공물은 국가 재정 수입의 바탕이 되었다. 농민들은 과거에 응시할 자격이 있었으나, 실제로 과거를 통하여 관리가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농민과 노비들이 군인이 되기도 했으므로, 이들의 신분이 무반으로 오르는 경우가 있었다.

천민으로는 노비, 화척, 재인(광대), 진척(뱃사공), 역정(마부) 등이 있었다. 노비에는 관청에 소속된 관노비와, 개인이 소유한 사노비가 있었다. 이 밖에, 향, 소, 부곡 등 특수 행정 집단에 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도 천민과 같이 취급되었다.

사회 시설

농업을 가장 중요시한 고려에서는 농민 경제와 민중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의창, 상평창, 제위보 등을 두었다. 의창은 곡식을 저장해 두었다가 흉년이나 춘궁기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빌려 주는 기관이었고, 상평창은 곡식의 값이 떨어졌을 때 사 두었다가 오를 때 팔아서 물가를 조절하는 기관이었다. 그리고, 보는 일정한 기금을 모아 그 이자로써 사업을 하는 일종의 재단인데, 그 목적에 따라 학보, 경보, 팔관보 등 여러 가지 보가 있었다. 제위보의 경우는 빈민 구제를 목적으로 세워진 보였다. 또, 빈민을 위한 의료 시설로서 개경에 동⋅서 대비원을 두기도 하였다.

사회 풍속

고려의 민중 생활에는 여러 가지 행사와 풍속이 있었는데, 그 중 불교 행사인 연등회와 산천의 토속신에게 제사지내는 팔관회가 대표적인 것이었다. 특히, 팔관회는 개경과 서경에서만 행했는데, 이 때에는 외국 상인들도 특산물을 바치며 무역하는 좋은 기회로 삼았다.

5월 단오에는 격구나 그네, 씨름 등을 즐겼고, 6월 유두에는 동으로 흐르는 냇물에 머리를 감으며 즐겼다. 7월 보름(백중)과 8월 보름(한가위)도 즐거운 명절이었다.

확대보기
격구도
격구도
팝업창 닫기

신라 말부터 신봉되어 오던 풍수 지리설이 고려 때에 와서는 더욱 성행하였다. 풍수 지리설에 따르면, 국가의 도읍이나 궁전 및 개인의 주택, 무덤 등이 그 자리잡고 있는 터와 주위의 산천 형세에 따라 길흉 화복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풍수 지리설은 고려 시대에는 물론, 조선 시대에까지도 사회 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다.

상공업 활동과 화폐

농업이 주산업이었던 고려에서는 수공업과 상업도 점차 발전되었다. 수공업품에는 각종 무기, 장신구, 직물, 지물 및 도자기 등이 있었다. 농업과 수공업의 생산력이 증가됨에 따라 상업 활동이 자라났으며, 개경과 교통의 요지에는 시장과 상점이 생겼다.

국내의 상업이 자라남에 따라 외국과의 무역도 활발해져서, 벽란도에는 송, 왜 및 아라비아 상인들의 배가 드나들었다 한다.

상업의 발달에 따라 화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성종 때 건원중보라는 철전이 만들어졌고, 숙종 때에는 우리 나라의 지형을 본뜬 은병을 만들어서 이를 활구라 하여 화폐 대신 사용하였다. 그 뒤에 해동통보, 삼한통보, 동국통보 등이 만들어졌으나, 널리 사용되지는 못하였다. 이렇게 화폐 사용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농업 생산에 의존하는 자급 자족적인 경제 구조 때문이었다.

확대보기
화폐(삼한통보)
화폐(삼한통보)
팝업창 닫기

불교의 융성

불교는 고려 때에 이르러서도 매우 발전하였다. 태조가 불교의 숭상을 강조한 이래 많은 절과 탑이 세워졌고, 유명한 승려에게는 왕사, 국사의 칭호가 주어졌으며, 광종 때부터는 승과 제도가 마련되었다. 그리하여, 일반 민중은 물론 많은 귀족 자제들도 승려 되기를 희망하였다.

고려 전기의 승려로는 문종의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이 가장 유명하였다. 그는 일찍부터 교종과 선종의 대립을 해소하는 데 노력하였으며, 송에 가서 불교를 연구하고 돌아온 후 천태종을 새로 폈다.

확대보기
대각국사 의천
대각국사 의천
팝업창 닫기

불교의 융성에 따라 대장경의 조판이 거듭되었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받게 되자, 부처의 힘으로 적을 막기 위하여 대장경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문종 때 완성된 이 대장경 판목은 대구 부인사에 보관되었으나, 몽고 침입 때에 불타 없어졌다. 그 후, 대각국사 의천이 송, 요, 일본 등지에서 구해 온 불교 서적들을 간행하였는데, 이것을 현종 때 만든 대장경과 구별하여 의천의 속장경이라 한다.

고려 때, 사원은 왕실과 귀족들로부터 많은 토지를 기증받았고, 면세의 특전까지 누렸다. 또, 사원에서는 불보, 장생고 등을 두어 이자놀이를 하고, 장사, 목축, 술담그기 등을 행하여 재산을 늘리기도 하여, 후에는 경제적 폐단이 점차 생겨나게 되었다.

유학의 발달

불교는 개인의 신앙 생활을 주도하였으나, 유교는 국가 통치의 지도 원리로서 매우 존중되었다.

고려에서 유학이 발달하게 된 것은 과거 제도의 시행과 관계가 깊다. 과거에 합격하여 관리로서 높이 출세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시험 과목인 유학을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유학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유학을 장려하여 그 기초를 닦게 한 이는 성종이었다. 그는 최승로와 같은 유학자의 건의에 따라 개경에 국자감을 세우고, 지방에도 학자를 보내어 유학의 교육에 힘썼다.

고려의 유학은 문종 때에 이르러 가장 성하였는데, 이 때에는 국자감을 중심으로 한 관학보다도 유명한 학자들이 세운 사학이 더 발달하였다. 당시 사학은 개경에만 12개소나 있었는데, 이를 12도라 하였다. 해동 공자라 불린 최충이 세운 문헌공도는 특히 유명하였다.

이렇게 사학이 발달하고 관학이 부진하게 되자, 예종은 관학을 진흥시키기 위하여 양현고라는 장학 기금을 설치하고, 또 국학에 7재를 두어 교육 내용의 충실을 기하였다.

문학과 역사학

유학의 발달과 과거 제도의 시행으로 한문학 중심의 문학이 발달하였다. 이 때의 문장가로서는 최충, 김부식이 있었고, 시인으로서는 정지상이 유명하였다.

고려 초기에는 아직도 향가가 유행하여 균여대사가 지은 향가 11수가 전해지고 있으며, 뒤에는 향가 대신 정과정곡을 비롯한 가요가 불려졌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으로 역사 기록이 많이 불타 없어졌다. 이에, 현종은 태조 때부터 목종 때까지의 7대 실록을 편찬하도록 하였으나, 지금 전해지지 않는다. 지금 남아 있는 가장 오래 된 역사책은 인종 때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이다.

확대보기
삼국사기
삼국사기
팝업창 닫기

진 삼국사표

우리 해동 삼국은 지나온 연조가 장구하와, 마땅히 그 사실이 방책에 나타나 있어야 하겠사오므로, 노신으로 하여금 이를 편찬하도록 명하신 줄 아오나, 스스로 돌아보오매 견식이 부족하와 어찌할 줄을 모르겠사옵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성상 폐하께옵서는 당요(唐堯)의 문사(文思)를 바탕으로 삼으시고 하우(夏禹)의 근검을 본받으시와, 소한(宵旰)의 여가에 예전 사적을 널리 보시고,……

이 밖에, 고려 초기의 저술로서는 가락국기, 균여전, 대각국사 문집 등이 전해지고 있다.

예술의 발전

고려 귀족 사회는 불교의 발전과 더불어 많은 예술품들을 만들었다.

고려의 예술을 대표하는 것으로 고려 청자가 있는데, 이는 고려 사람의 예술적 재능을 유감 없이 발휘한 것이다. 고려 청자의 우수한 점은 색깔과 형태와 무늬의 아름다움에 있다. 즉, 은근하고 아름다운 비취색과 여러 가지 형태의 장식과 다양한 무늬가 조화되어 예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확대보기
고려 청자
고려 청자
팝업창 닫기

부도에는 정토사의 홍법국사 실상탑과 법천사의 지광국사 현묘탑이 대표적이고, 석탑에는 현화사 7층 석탑과 월정사 팔각 9층 석탑이 유명하며, 불상으로는 관촉사의 석조 미륵보살 입상과 부석사의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 등이 있으나, 여기에 나타난 조각은 통일 신라에 비하여 그 예술적 솜씨가 뒤떨어지고 있다.

고려에서는 일찍부터 궁중에 도화원을 설치하여 그림 그리는 사람을 양성하였다. 인종 때의 이영은 예성강도를 그려 송 휘종의 칭찬을 받았고, 그의 아들 이광필도 산수화를 잘 그렸다.

글씨로는 문종 때의 유신, 인종 때의 탄연, 고종 때의 최우가 능하여, 신라의 김생과 함께 신품 4현으로 손꼽힌다.

음악에는 전부터 전해 오는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향악과 중국의 음악인 당악이 널리 유행하였으며, 예종 때에는 송에서 대성악이 전해져 궁중 음악인 아악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송과의 교류

고려는 송과의 문화 교류에 힘썼다. 고려는 금, 은, 구리, 화문석, 유기, 종이, 먹, 인삼 등을 수출하고, 책, 비단, 자기, 약재, 악기, 향료 등을 수입하였다. 송의 문화는 고려의 청자와 목판 인쇄술의 발달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고려가 송과 관계를 맺은 것은 광종 때부터이지만, 거란의 압력이 미치자 일시 중단되었다. 송은 그 뒤 금의 압력을 받게 되자, 고려에 군사 동맹을 제의한 때도 있으나, 고려는 군사적인 관계보다 경제적, 문화적 교류에 주력하였다. 송의 상인들뿐만 아니라, 송과 무역을 하고 있던 아라비아 상인들도 벽란도에 출입하면서 수은, 향료, 약품 등을 가져왔다. 이들 아라비아 상인들에 의해 고려의 이름이 서방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학습 정리

1. 고려는 신분 사회였는데, 귀족은 문벌을 중시하고 특권을 누렸으며, 농민과 천민은 생산과 노동에 종사하였다.

2. 고려는 문화 민족으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송과는 문화적, 경제적 교류를 하였고, 다른 민족의 침략에 대해서는 과감히 싸워 물리쳤다.

3. 호국 불교의 성격을 띤 고려의 불교는 국가 활동과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으나, 사회⋅경제면에 폐단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4. 고려의 교육은 유학 중심이었고 주로 과거를 목적한 것이었으며, 국자감을 중심으로 하는 관학과 더불어 사학의 교육 활동이 활발하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