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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고려 후기의 사회와 문화

〔학습 개요〕

무신의 난 이후, 고려는 사회, 경제, 문화 등 각 방면에서 그 전과는 퍽 다른 모습을 보였다. 정치⋅경제면에서 무신들이나 친원 세력가들이 권력을 잡았다. 또, 불교계에서는 문신 귀족과 가깝던 교종이나 천태종보다는, 심성의 도야를 주장하는 조계종이 무신들의 지원을 받으며 융성하게 되었다. 대장경판 간행에 따른 목판 인쇄술의 발달은 활자의 발명을 촉진시켜서, 그 뒤 세계에서 가장 처음으로 금속 활자의 발명을 보게 하였다.

한편, 여⋅원 문화의 빈번한 교류로 목화와 화약 제조 기술이 수입되었고, 성리학이 보급되었다. 성리학은 그 후 무신 정권 이래 성장하고 있던 신진 관료들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학습 문제

1. 무신 정권 성립 이후 사회의 변동은 어떠하였으며, 이것은 문화 변동과 어떤 관련이 있었을까?

2. 불교 신앙의 변화는 어떻게 진행되었으며, 고려 불교의 폐단은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났을까?

3. 고려 후기의 문화는 전기의 그것과 어떻게 달라졌을까?

4. 우리가 세계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고려 시대의 문화 유산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귀족 사회의 변동과 새 세력의 등장

무신 정권이 성립된 이후의 고려 사회에는 지배층의 변화가 생겼다. 즉, 무신의 난 이전의 사회의 지배층은 가문을 중요시하는 문신 귀족들이었다. 따라서, 이들 외에는 높은 관리가 되거나 경제적인 특권을 가지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무신 정권 이후에는 이들 문신 귀족에 대신하여 이제까지 문신들에게서 멸시와 천대를 받던 무신들이 정권을 잡았으며, 원의 압력을 받던 시기에는 친원 세력들이 권세를 잡았다.

권문 세가들은 막대한 농장과 노비를 점유하여 경제적인 특권을 누렸다. 이 때, 농장은 소작인이나 노비에 의해 경작되었다. 이와 같이 권문 세가들이 농장과 노비를 많이 소유하였으므로 국가의 재정은 큰 타격을 받았고, 농장을 가지지 못한 관리들은 가난한 생활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고려 말에 이르러서는 학문적인 교양을 갖추고 행정적인 실무에도 밝은 새로운 관료들, 즉 신진 사대부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주로 지방의 향리 출신들로서, 과거에 합격하여 중앙 정계에 진출하였다. 신진 사대부들은 넓은 토지와 농장을 가진 당시의 권문 세가들과 대립하게 되었고, 드디어는 권문 세가들을 누르고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성리학과 신진 관료

무신 정권이 성립되자 문신들이 크게 화를 입어, 유학은 큰 타격을 받아 쇠퇴하였다. 최씨 무신 정권 시대에 최우가 문인들을 가까이하려 하였지만, 유학은 크게 발전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무신 정권이 무너지고 문신의 세력이 다시 일어나자, 유학은 점차 활기를 띠었다. 즉, 충렬왕은 학문을 진흥시키기에 노력하였고, 충선왕은 연경에 만권당을 설치하여 고려 유학의 부흥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고려 후기 유학의 특징은 성리학이 전래된 데 있었다. 성리학은 송의 주희가 집대성한 것으로서, 송학 또는 주자학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글귀의 해석 등에 치중한 종래의 유학과는 달리, 우주와 인간의 근본 문제를 탐구하는 철학적인 면을 강조한 것이다.

성리학을 처음 소개한 이는 충렬왕 때의 안향이며, 그 후 충선왕 때 백이정이 원에 가서 이를 직접 배워 왔고, 이제현은 충선왕을 따라 연경에 가서 성리학을 배워 왔다. 말기에는 이색, 이숭인, 정몽주, 길재 등과 같은 대가들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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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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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에 등장한 신진 관료들은 거의 성리학을 받들었다. 이들은 불교의 폐단과 모순을 지적하고, 또 불교를 옹호하는 권문 세가 및 사원을 공격하면서 그 세력을 급속히 넓혔다. 이리하여, 정도전, 조준 등 성리학을 신봉하는 신진 관료들이 홍건적과 왜구의 격퇴에 큰 공을 세운 이성계를 받들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성리학이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 이념으로 높여졌다.

불교계의 변화

무신의 난 이후 불교계에서는, 종래의 교종 세력이 약화되고, 심성의 도야를 강조하는 선종이 강조되었다.

대각국사 의천이 천태종을 시작한 후, 고려에서는 한동안 천태종이 우세하였다. 그 후, 무신 정권을 전후하여 선종 9산이 조계종으로 통합되어 세력을 떨치기 시작하였으므로, 불교계의 성격이 달라졌다. 조계종을 확립하여 선종의 융성에 크게 이바지한 이는 보조국사 지눌이다. 그는 인간의 마음은 곧 부처의 마음이라고 가르치고, 이를 깨닫기 위하여 꾸준히 수양하며 노력하라고 설법하였다. 또, 인간의 본성을 터득하기 위한 수양의 방법으로서 참선을 중요시하고, 염불과 간경도 아울러 강조하였다.

앞에서 말한 의천의 천태종이 교종의 입장에서 교종과 선종의 일치를 주장한 것이라면, 지눌의 조계종은 선종의 입장에서 교종과 선종의 조화를 주장한 것이다.

지눌 이후의 이름난 승려로서는 고려 말의 태고, 나옹 등이 있었다.

고려 초기에 부처의 힘을 빌어 외적을 막고자 하는 의도로 처음 만든 대장경판은 몽고 침입 때에도 만들었다. 몽고의 침입을 받아 강화도에 피난 중인 어려운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전등사 경내에서 16년간에 걸쳐 이를 완성하였다. 이것이 우리가 세계에 자랑하는 고려 대장경(8만 대장경)인데, 지금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다. 전쟁 중에도 이 거대한 사업이 완성된 것은, 당시의 사람들이 부처의 힘을 빌어 적의 침략을 물리치겠다는 굳은 신앙심을 가졌고, 국난 극복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려의 불교는 사회, 문화 발전에 이바지한 공이 매우 컸다. 그러나, 후대에 내려오면서 여러 가지 폐단이 나타났다. 즉, 불교 사찰에는 국가와 민간으로부터 기부받은 면세의 토지가 많이 늘었으며, 여러 가지 세속적인 사업을 행하여 사원은 큰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다. 승려들도 종교적인 면보다는 세속적인 일에 열중하여 많은 토지와 노비를 가졌고, 때로는 민간 사회에 여러 가지 폐단을 자아내기도 했다. 이에,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는 주장이 일어나게 되었다.

인쇄술의 발달

우리 나라 인쇄술의 전통은 매우 오래 되었다. 이미 배운 바와 같이, 불국사 3층 석탑에서 발견된 다라니경은 통일 신라 시대의 목판 인쇄로 알려지고 있다. 고려 때에는 이 목판 인쇄 기술이 더욱 발전되어, 3차에 걸친 대장경 간행 사업이 완수되었다.

목판 인쇄술의 발달은 활자의 발명을 촉진시켜, 13세기 초에는 금속 활자를 사용하여 책을 찍어 내는 인쇄 기술을 발명해 냈다. 즉, 고종 21년(1234)에는 금속 활자를 사용하여 상정고금예문이라는 책을 간행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세계에서 금속 활자에 의한 인쇄의 시초로서, 서양보다 200여 년이나 앞선다. 그 후, 활자 인쇄술이 더욱 보급되어, 공양왕 때에는 금속 활자로 인쇄하는 서적원까지 생겼고, 조선 초에 이르러서는 정교한 활자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고종 때 찍었다는 상정고금예문은 현재 전해지지 않으나, 1377년에 간행된 금속 활자본 직지심경이 프랑스 파리의 국립 도서관에 있는데, 이것은 현재 남아 있는 세계 최고의 금속 활자본으로, 우리 민족의 귀중한 문화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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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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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면과 화약

고려와 원의 관계가 밀접해지자, 두 나라 사이에는 빈번한 문화의 교류가 있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성리학, 목화, 화약의 전래이다.

목화는 공민왕 때 문익점이 원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 씨를 가져오고, 그의 장인 정천익이 재배에 성공함으로써 보급된 것으로, 이와 아울러 씨아와 물레가 만들어졌다. 목화의 보급은 명주, 모시, 삼베를 주로 입던 우리 나라 의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화약은 최무선이 중국 상인에게서 그 만드는 법을 배웠다. 그는 화통도감을 만들게 하고 각종 화포를 만듦으로써 왜구를 소탕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나아가, 우리 나라의 무기 제조 기술과 전투 기술에 큰 혁신을 가져 왔다.

기술의 향상

고려에서는 과거제가 실시될 때부터 잡업이라고 하는 기술관 시험이 있었다. 여기에는 법률, 산수, 의술, 지리 등이 포함되었는데, 이들은 문관 시험 과목보다 격이 떨어져서 대체로 천시되었으므로, 주로 기술직 관리들이 이를 배워 계승하였다. 기술학의 교육은 의약을 맡은 태의감과, 천문, 지리, 측후, 시간 관측을 맡은 서운관 등에서 담당하였다.

여⋅원 문화의 활발한 교류로, 원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의 우수한 문화나 혹은 그 주변의 우수한 문화가 고려에 전파되었다. 달력(수시력)이 보급되고 천문학과 산술도 발달하였다.

한편, 상업 활동에 따라 부기도 발달하였으며, 농업에 관한 기술 연구도 진행되었다.

문학과 역사학

무신의 난으로 한때 침체되었던 문학은, 최씨 정권이 확립되면서 다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무신 정권과 몽고의 압력하에서는 문인들이 대체로 자신과 민족의 어두운 면을 문학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이 때의 문학은 이른바 패관 문학이라 하여 한문으로써 주로 전설과 설화를 다룬 것이었다. 이인로의 파한집, 이규보의 백운 소설, 최자의 보한집, 그리고 이제현의 역옹패설 등은 이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이 밖에,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이색의 목은집, 정몽주의 포은집 등은 유명한 문집으로 남아 있다.

국문학은 초기의 향가에 이어 정과정곡, 가시리, 청산별곡 등 민중들이 즐겨 부르는 장가체 가요가 유행하다가, 후기에 와서는 한림별곡과 같은 경기체가와 단가인 시조가 유행하였다.

청산별곡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애 살어리랏다.

멀위랑 다래랑 먹고

청산애 살어리랏다.

얄리 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제1장〉

역사에 관한 저술로는 삼국유사가 가장 유명한데, 이것은 충렬왕 때 승려 일연이 지은 것으로, 단군 신화와 불교 관계의 설화, 향가 등이 실려 있어 유명하다. 특히 단군 신화는, 당시 몽고족의 침입으로 쓰라린 시련을 겪던 우리 민족의 민족적 자각과 자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그리고, 이규보는 동명왕편을 지어 고구려의 전통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 이승휴의 제왕운기와 각훈의 해동고승전의 일부도 남아 있어 역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건축과 예술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목조 건물로 안동 봉정사의 극락전,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조사당, 예산 수덕사의 대웅전이 유명하다. 석탑으로는 목조 건축의 양식을 모방한 경천사 10층 석탑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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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무량수전
부석사 무량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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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천사 10층 석탑
경천사 10층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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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청자는 인종, 의종 때를 거쳐, 강화 시대에 이르러 그 전성기를 이루었다. 청자 중에서도 특히 창의성이 발휘된 것은 상감 청자인데, 그 수법이나 모양이 세계 최고의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 후, 고려자기는 기술적 발전을 보지 못하여 말기에는 쇠퇴하고 말았다.

그림에 있어서는 명종 때의 이광필과 고유방이 유명하였고, 공민왕이 그렸다는 천산대렵도 및 수덕사와 부석사의 벽화가 지금도 남아 있다.

글씨로는 신품 사현의 한 사람인 최우가 있었고, 전기에 유행한 구양순체와 왕희지체 대신 후기에는 조맹부체가 유행하였다.

음악은 우리 나라의 향악과 중국 음악인 당악이 있었는데, 송에서 대성악이 수입되어 궁중 음악으로 발달하였고, 향악곡으로는 동동, 대동강, 한림별곡 등이 있었다. 이와 함께 산대놀이라는 가면극이 유행하였다.

학습 정리

1. 무신 정권 성립 후, 고려의 사회와 문화는 그 전에 비하여 많은 변화가 있었다.

2. 고려의 불교는 교종과 선종의 사상적 대립을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한편, 여러 차례에 걸친 대장경의 간행을 보게 되었다.

3. 고려 후기의 역사 서술은 시련기를 맞아 민족의 주체적 자각과 자부심을 불러일으켰다.

4. 권문 세가에 의한 농장과 노비의 점유 결과는 국가 경제와 국방력에 타격을 주었다.

5. 고려 후기, 향리층에서 성장한 사대부들은 성리학을 사상적 배경으로 하여 새 사회 건설에 박차를 가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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