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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조선의 성립과 발전

1. 조선의 성립과 발전

〔학습 개요〕

고려의 뒤를 이어 한반도를 5백여 년 동안 지배한 것은 조선 왕조였다. 오늘날 우리 겨레의 생활은 바로 이 시대의 유산 위에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조선은 고려 말, 안팎으로 위기를 맞게 된 우리 역사의 새로운 전환을 이루며 건국되었다. 그리하여, 유교적 정치를 내세워 왕권의 확립과 조직적인 국가 활동에 힘썼고, 한편 민생의 안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중앙 집권적인 양반 관료 조직은 건국 후 1세기 간에 걸친 노력으로 기틀이 확고하게 잡혔다.

이 기간에 모든 제도는 유교 중심, 양반 중심으로 정비되었다.

또한, 밖으로는 적극적인 사대 교린 정책에 의해 국제적 평화가 잘 유지되었다.

한편으로는, 정치적 발전과 사회적 안정을 바탕으로 활발한 민족 문화 활동이 벌어져 조선 문화는 큰 발전을 이룩하였다. 특히, 한글이 창제되어 민족 문화의 새로운 기틀이 마련되었다.

학습 문제

1. 조선이 건국하게 된 사정은 어떠하였으며, 조선의 건국은 어떠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 일일까?

2. 조선은 국가 기구를 어떻게 조직하였으며, 국제적 평화 유지를 위해 어떠한 노력을 폈을까?

3. 국민 생활의 발전을 위한 국가적 노력은 어떠하였을까?

고려 말의 정세

공민왕의 개혁 정치가 귀족 세력들의 반대로 실패에 돌아간 후, 고려는 안팎으로 더욱 어려운 사정을 맞게 되었다.

밖으로 홍건적의 거센 침략을 거듭 받았고, 남해안 각지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가 도서 각지를 침범했으며, 때로 남해안 깊숙이 넘나들었다.

한편, 안으로는 오랜 세월을 두고 권세를 잡아 온 구 귀족과, 새로이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 정계에 등장한 지방 출신의 신진 귀족 사이에 정치적 대립이 생겨 혼란을 빚었다.

신진 귀족들은 대체로 원으로부터 전해진 성리학으로 교양을 쌓고 벼슬길에 올라선 이른바 사대부 세력이었다. 이들은 안으로 고려 왕국이 겪고 있던 고난을 과감한 수단으로 극복하고자 나서게 되었다. 이리하여, 조준, 정도전, 하윤 등은 마침내 이성계를 중심으로 고려의 정치적 실권을 잡고자 활동하게 되었다.

조선의 건국

이성계는 북에서 나하추의 침입을 물리치고, 남에서 왜구를 격파하는 데 큰 공을 세우고 중앙 정계에 등장하게 된 장군이다. 대륙에서 원이 쇠약해지고 명이 들어서는 정세 전환이 있게 되자, 이성계를 중심한 신진 세력은 명과 정치적 관계를 맺고 새로운 국가를 세웠다. 조선 왕조 건국의 중심 인물들은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 영향을 끼쳐 온 불교를 배척하는 세력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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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
태조 이성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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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앞서 우왕 때, 명이 고려에 대하여, 한때 원이 점유하던 철령 이북의 국토를 돌려 주기를 요구해 오자, 당시 고려의 실권을 쥐고 있던 최영은 이를 거절하면서 요동(랴오뚱) 지방을 공격하고자 군사를 출동시켰다. 국제 정세의 흐름에 비추어, 또한 군사적 이유에서 요동 공격을 반대했던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이켜 개경을 점령하여 반대 세력을 물리치고 고려의 실권을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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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 부근도
위화도 부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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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실권을 잡은 이들 유교적 신진 세력은 불교 세력과 구 귀족 세력을 물리치는 한편,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과전법에 의한 토지 개혁을 단행하였다. 과전법의 실시로 말미암아 구 귀족은 군사권과 정치권에 이어 경제적 기반마저 잃어 무력해졌다.

사대부 신진 세력은 새 국가 건설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정몽주 등 일부 세력의 반대를 물리치고, 마침내 왕위를 양도받는 선양의 형식에 의하여 이성계를 왕위에 추대하고 조선 왕국을 건설하였다.

단심가

정몽주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 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

이로써 고려 왕국은 건국한 지 475년 만인 1392년에 망하였고, 조선 시대의 새 역사가 시작되었다.

왕권의 확립

유교적 이상 정치인 덕치주의를 내세우는 한편, 자주적 주권 국가 건설을 목표로 건국된 조선은, 이후 1세기 동안 적극적인 국가 활동을 펴 국가적 기초를 튼튼히 다졌다.

도읍을 한양으로 옮겨 인심을 새롭게 하기에 힘쓰는 한편, 유교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 원리로 삼고, 농업을 적극 장려하여 국민 생활 안정에 노력하였다.

밖으로는 명에 대하여 능동적이며 신축성 있는 외교를 펴, 국가의 안전을 도모하고 새 왕조의 국제적 지위를 확보하는 한편, 이웃 야인이나 일본에 대해서는 교린 정책으로써 국제적 평화를 유지하기에 힘썼다. 왕권을 중심한 중앙 집권의 국가 조직은 태종 때에 들어 차차 다듬어지고, 세종, 세조를 거쳐 성종 때에 이르러 자리잡혔다.

태종은 개인이 거느린 사병을 없애어 병권을 왕권하에 집중시켰다. 또, 호패법의 실시로 전국 인구의 동태를 파악하는 한편, 의정부와 6조 제도에 의한 관제의 개혁을 실시하였다. 또한, 불교를 정리하여 유교 정치의 충실에 힘썼다. 혼란을 거듭하던 국도 문제가 해결되고, 새 서울인 한성부(한양)의 여러 가지 시설이 마련되기 시작한 것도 이 때의 일이다.

태종 때에 다져진 정치⋅경제⋅군사적 안정을 바탕으로 하여 세종 때에 들어 서 조선 사회는 더욱 튼튼한 기틀을 쌓고 문화적으로 큰 발전을 이룩하였다.

민생과 문화 발전에 관심이 컸던 세종과 황희, 맹사성 등 명상들의 보필과 집현전 학사들의 뛰어난 학문이 화합하는 가운데 유교 정치는 더욱 발전되고, 민족 문화의 발전을 보았으며, 국력이 북방으로 크게 뻗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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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대왕
세종 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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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로 왕위에 오른 세조도 혁혁한 업적을 남겼는데, 과감한 정책으로 두 차례에 걸친 북방의 반란을 진압하고 중앙 권신들과 지방 세력을 왕권하에 복속시켜 중앙 집권을 크게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성종 때에 이르러서는 문화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경국대전의 반포

조선은 갖추어진 법전에 의해 국가가 조직되고 운영된 점에서 큰 발전을 보였다.

국초에 기본 법전을 이룩하고자 힘쓴 이는 정도전이었다. 그는 고대 중국의 6전을 토대로 우리 나라의 실정에 알맞은 법 조직을 마련하고자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등을 편술한 바 있었다.

그 후, 조선의 국가적 기틀이 잡혀 가면서 필요에 따라 새 법령이 늘었다. 그리하여, 세조 때에 이르러서는 이미 만들어진 여러 법전과 교령 등을 종합하여 항구적인 법전을 마련하고자 새로운 법전 편찬에 착수하였다. 세조 자신도 편찬에 참가하였던 이 법전은 최항, 노사신 등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성종 초에 완성되어 1470년에 반포되었다.

이, 호, 예, 병, 형, 공의 6전으로 구성된 이 경국대전은 조선 왕조의 관료 조직과 사회, 경제 활동에 관한 기본 법전이었다. 그 후, 시대가 흐름에 따라 수정이 가해지기는 하였으나, 조선 왕조의 기본 법전으로서의 자리를 지켰다. 경국대전의 편찬, 반포로 조선 왕조의 왕권 확립은 일단락지어졌고, 조선은 유교적인 법치 국가로서의 발전을 이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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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대전
경국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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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의 개척과 사민 정책

조선은 태조 때부터 한반도 북부를 괴롭히던 야인을 몰아 내기에 힘썼다. 여진족이라고도 불리던 이들 야인은 고려 말 어수선한 틈을 타서 이 지방에 들어와 자주 북방을 시끄럽게 하였다. 태조 이후로, 귀순하는 야인에게는 관직과 생활 물자를 나누어 주는 한편, 경성, 경원에서 교역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북방 침략은 여전하여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

세종은 우리 조상들이 활동하던 옛 땅을 한 치라도 버려 둘 수 없다는 신념에서 적극적인 정책을 폈다. 즉, 김종서, 최윤덕 등으로 하여금 국경 지방에서 야인을 내몰고 6진과 4군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 지방에 남부 지방 사람들을 이주시키는 정책을 써서 국토의 확보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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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진(북동) 4군(북서)
6진(북동) 4군(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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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이후 북서 4군이 한때 철폐된 적이 있으나, 그것은 국방선의 일시적 후퇴이지 국토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집권적 정치 조직

조선의 정치는 국왕을 중심한 관료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었으나, 정치의 이상을 유교적 덕치에 두고, 민생의 안정을 내세웠다.

국왕 중심의 정치였다고는 하나, 정책의 결정은 의정부의 3정승의 합의에 의하였고, 국왕은 사간원의 간언을 받아들여야 했으며, 국민들에게는 정치적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기회로서 상소의 길이 보장되었다. 국가 활동과 통치 조직은 경국대전에 터전하여 조직되고 운영되었다.

통치 조직은 왕권하에 통치권이 집중되도록 짜여졌다. 중앙 정부의 중요한 기관은 의정부와 6조였다. 의정부는 정책 조정 기관이었고, 6조는 그 밑에서 행정 실무를 나누어 맡은 기관이었다.

또한, 국왕의 고문 기관이라 할 홍문관, 관료를 감찰하는 사헌부, 국왕에 간언을 올리는 사간원 등이 있었는데, 이 세 기관을 3사라고 불렀다. 이 밖에, 국왕에 직속된 사법 기관인 의금부와 국왕의 비서 기관이라 할 승정원, 역사의 기록을 담당하는 춘추관 등이 중요한 기관들이었다.

지방 통치 조직은 전국을 8도로 나누고, 다시 도 밑에 부, 목, 군, 현 등의 여러 고을을 두었다. 도에는 관찰사(감사), 각 고을에는 수령(부사, 목사, 군수, 현령 등)이 중앙에서 파견되어 행정, 사법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이들 지방관은 일정한 기간 동안 그 직분을 맡고 농업의 장려, 교육의 진흥, 군정, 부역, 재판 등을 돌보는 한편, 그 지방에 배당되는 조세와 공부의 부과, 징수와 수송의 책임을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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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광경
재판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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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행정 기관의 행정 실무는 주로 그 지방 출신 향리가 맡았으며, 지방 양반들의 조직인 향청이 수령을 돕는 한편, 향리를 감찰하는 풍속 교정의 임무를 맡아 보았다.

모든 관직은 문반(동반), 무반(서반)으로 구분되었으며, 다시 중앙 관직인 경직과 지방 관직인 외직으로 구분되었다. 관료는 원칙적으로 과거를 거쳐 선발되었으나, 일부는 조상의 공로에 의해 임명되기도 하였다. 모든 문무 관직은 18등급으로 그 직분의 고하가 구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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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관 옷과 무관 옷
문관 옷과 무관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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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조직과 병역

무반의 최고 기관으로는 중추원이 있었으나, 실무를 담당하지는 않았다. 세조 때에 설치된 5위 도총부가 군사의 최고 지휘권을 쥐고 중앙의 다섯 부대(5위)를 지휘하는 한편, 지방 각 도에 병마 절도사(병사)와 수군 절도사(수사)를 두어 각각 육군과 해군을 통할하였고, 국방상 중요한 곳에 설치된 진을 지휘하며 국방을 담당하였다. 특히, 함경도에 병영을 두 곳 설치하고, 경상도과 전라도에는 수영을 두 곳 설치한 것은, 야인과 왜구를 방비하기 위한 국방상 필요에서 취해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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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수군 조련도
조선 수군 조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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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위의 갑사나 정병, 각 진영의 군인들 가운데는 시험을 통해 선발된 직업 군인도 있었으나, 그 대부분은 병역의 의무를 지니는 정군들이었다.

16살에서 60살까지의 양인 장정들은 정군 혹은 정군의 경비를 담당하는 봉족이 되어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였다.

국경 지방에서 발생하는 긴급 사태를 급속히 중앙에 연락하기 위해 마련된 봉수 제도나, 국경 지방과의 교통 통신을 급속히 취하기 위한 역마 제도 등도 군사 조직의 하나였다.

유교 중심의 교육과 과거

조선은 유교주의의 국가였다. 교육의 목적은 유교적 학식을 주는 한편, 왕도 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충성스러운 관료를 기르는 데 있었다.

교육은 양인에게도 그 길이 열려 있었으나, 대체로 양반 자제들이 그 혜택을 차지하였다. 초등 교육 기관으로는 서당이 있었고, 또 서울에는 4부 학당을, 지방 각 고을에는 향교를 두어 중등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어서, 양반 자제들은 생진과를 거쳐 최고의 교육 기관인 성균관에서 수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의학, 법학, 천문학, 산학, 외국어 교육과 같은 기술 교육은 각기 그 일을 맡아 보는 관청에서 따로 실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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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륜당
명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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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를 선발하기 위한 시험인 과거는 조선 시대에 더욱 정비되었다. 과거는 문과, 무과, 잡과의 세 부문에 걸쳐 실시되었다.

문관 시험인 문과가 가장 중시되어 주로 양반 자제들이 응시할 수 있었고, 잡과는 그 성격에 비추어 주로 중인 계급이 응시하였다.

과거는 3년에 한 번씩 실시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그 밖에 여러 가지 부정기 시험이 있었다. 따라서, 후대에 올수록 과거에 합격하고도 관직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 가게 되어 많은 문제를 빚어 냈다.

토지 제도의 변천

국가 재정의 근본과 관료 조직의 경제적 뒷받침은 농토였다. 토지 제도는 고려 말의 과전법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과전법에 의하면, 관리가 된 사람은 누구나가 등급에 따라 일정한 토지를 나누어 받았으며, 또한 퇴직자에게도 주어졌다. 그러나, 이 토지를 실제로 경작하는 사람들은 농민이었으니, 이들 관리들은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들에게서 그 댓가로 바치는 조를 받아 생활하였다.

과전은 1대에 한하는 것이 원칙이나, 휼양전, 수신전 등의 이름으로 어린 자식들이나 부인에게 세습되었다. 한편, 공신에게는 자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공신전이 주어졌는데, 과전과 더불어 경기도에 한하여 지급되었다.

이와 같이, 양반 관리들의 생활을 보장하기 위한 점이 조선 토지 제도의 특색이었다. 따라서, 관료들은 이러한 경제적 보장으로 안락한 생활을 누리며 행정을 맡아 보는 한편, 문화 활동에 이바지하였다.

왕권이 확립되고 국가 활동이 활발해지는 가운데 관리의 수가 늘고, 또 세습되는 토지가 차차 확대되어 과전으로 내줄 토지의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 이에, 세조 때에는 과전법을 폐지하고 현직 관리에게만 토지를 지급하는 직전법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생기게 되자, 마침내 국가가 토지를 관리하여 녹봉만을 주는 이른바 관수 관급제를 실시하였다.

중앙이나 지방의 관청과 공공 기관에는 공해전이라는 이름의 토지를 주어 그 기관의 운영 경비에 쓰도록 하였다. 이 밖에도, 군인전, 학전, 원전, 역전, 둔전 등의 이름으로 토지를 각 기관에 나누어 주었다. 국가가 토지를 나누어 준 것은 경제 생활의 기초가 농토였기 때문에 취한 것이었다.

국가 재정과 국민 부담

국가 재정은 주로 조세 수입으로 조달되었다. 조세 수입은 전세, 부역, 그리고 공물이 기본이었다.

전세는 농토에 부과된 세납으로, 곡식을 현물로 납부하도록 되어 있었다. 전세를 부과함에 있어서도, 민생을 염려하여 정확을 기하고자, 세종은 황희의 의견을 받아들여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을 실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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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
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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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전세 제도를 잘 운영하기 위해서는 토지를 측량하여 농토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해야 했다. 그리하여, 국초부터 전국에 걸쳐 양전을 거듭하여, 성종 때에 이르러 전국의 양전을 끝내고 토지 대장을 정리하여 농토의 소유 관계를 파악하는 작업을 끝냈다.

부역은 국민에게 노동력을 제공하도록 하는 의무로서, 국가의 토목 사업 등에 동원하는 요역, 그리고 정남이 지니는 군역이 있었다. 정남은 직접 군에 나가 군역에 종사하거나 또는 그 댓가로 군포 2필을 바쳐야 했다.

역의 시행을 위해서는 호구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국초부터 군적 또는 호적을 위한 호구 조사가 있었으며, 호패 제도나 오가작통법 등은 역의 정확한 실시를 위한 인구 파악의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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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패
호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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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물은 각 지방의 특산물을 현물로 바치게 한 세납이었다. 공물의 종류는 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물품에 걸쳤다. 현물로 바치는 세납이었기에, 그것의 납입과 운반, 보관에 있어 적지 않은 고통을 국민에게 주었다.

조운과 역원 제도

전국 각 고을에 수납된 세납물은 조운 제도에 의해 수로와 해로를 이용하여 서울로 운반되어 국가 재정에 충당되었다.

전국 해안과 한강, 낙동강변의 내륙 요지에 조창이 마련되었는데, 각 고을에서 조창으로 운반된 세납물은 조창에서 선박에 실려 수로나 해로를 이용하여 서울 경창에까지 수송되었다. 다만, 평안도와 함경도의 세납물만은 국방 활동의 비용에 충당되므로 서울로 옮기지 않았다.

한편, 육운을 위한 역원제가 있었다. 주요 도로에 약 30리의 거리를 두고 역을 설치하여 역마와 숙식 시설을 갖추어 놓고 공문 전달, 공물 수송 및 출장 관리의 편리를 보아 주도록 하였다.

이 때, 출장 관리는 마패에 새겨진 말의 수효에 따라 역마를 이용할 수 있었다. 역에는 역장, 역졸이 배치되었고, 몇 개의 역을 묶어서 감독하는 찰방이 배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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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패
마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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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여행자들의 편리를 위하여 국가가 교통의 요지나 한적한 도로변에 숙박 기관인 원을 마련했는데,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 왕래하는 여행자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농본 정책과 농업의 발달

농업은 천하의 대본이라는 왕도 정치의 사상에서 국초부터 농업을 보호, 육성하여 민생을 안정시키려는 농본 정책이 취해졌다.

역대 국왕들은 적전과 친잠소를 두고 몸소 농잠에 모범을 보였다. 한편, 태종 때에는 국농소라는 농사 연구 기관을 설치하였고, 세종 때에는 박서생의 의견을 들어 수리에 수차를 이용하게 되었다. 농업 생활에 편리를 주기 위하여 달력을 찍어 반포하는 한편, 농사직설과 같은 농업 관계 서적을 펴내 농업 기술 발달을 도왔다. 또한, 강우량을 과학적으로 측정하여 농업 생활에 도움을 주고자 측우기를 제작하여 각지에 설치하였으니, 이 제도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앞서 실시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노력에 힘입어 농업 기술이 발달되고 새로이 농토도 개간되고 저수지 건설도 진행되어, 농업 생산력은 크게 늘었다. 한편, 국가에서는 야채, 과수, 약초, 목면 등 특수 작물의 재배와 양봉을 장려하였다. 또한, 농민들의 경작권을 보호하는 정책을 쓰고, 의창, 상평창 제도를 실시하여 농민 생활을 도왔다.

정치 질서의 확립과 농업 생산력의 증가에 따라 농민 생활이 향상되고, 국세가 충실해져 국초에 약 100만 결이던 총 경지 면적이 세종 때에는 약 160만 결로 늘었으며, 태종 때 18만 호이던 호구가 세종 때에는 22만여 호로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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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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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성장과 상업⋅수공업 활동

태종 때에 국도 문제가 해결된 후, 서울 한성부는 도성 내의 도시와 성의 10리의 인접지를 포함하는 행정 수도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남대문을 비롯한 성곽과 성문이 건설되고, 궁궐이 장엄하게 세워졌으며, 경복궁 정문 좌우에는 행정 관청이 배치되었고, 운종가를 중심으로 남북에 민가가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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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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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종가(종로)에는 800여 간의 긴 행랑을 세워 여러 시전이 들어서 상업 활동을 폈다. 또한, 개천을 파서 배수를 처리하였다. 세종 8년에 서울 한성부는 18,000호에 인구가 약 93,000명이었다.

상업은 서울과 지방의 행정 도시를 중심으로 자라났다. 서울에는 시전 외에도 몇 군데 장시가 생겨났다. 지방에도 농산물이나 수공업품의 교역을 위한 장시가 있었으나, 상업 활동이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그것은 아직도 조선 사회가 농업 중심의 자급 자족적인 경제 생활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태종 때에 저화, 세종 때에 조선통보 등의 화폐를 만들어 통용시키고자 한 국가적 노력도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수공업품을 생산, 공급하기 위한 전문적인 수공업자인 장인들은 관에 등록되어 생산 활동의 통제를 받았다. 장인의 신분은 양인과 노비로 되어 있었으나, 사회적으로 천대를 받았다. 농촌에서 볼 수 있었던 부업적인 가내 수공업도 자급 자족의 단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대표적인 수공업 생산품은 마직, 면직의 의료품과 농기구, 종이, 목기, 죽제품 등이었다.

요업은 고려에 뒤지기는 하였으나, 전국 각지의 자기소에서 비교적 활발하게 생산되었고, 종이는 중앙의 조지서와 전국 각처에서 생산되었다.

학습 정리

1. 고려 말, 안으로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동요, 밖으로 이민족의 계속적 침략으로 민족이 고난을 겪게 되자,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나타난 것이 조선 왕국이다.

2. 조선 왕조는 새로운 정치적 목표를 내세우고 양반 관료 국가의 조직을 가다듬기에 노력하는 과정에서 집권적 관료 국가의 틀이 잡혔다.

3. 집권적 관료 조직을 바탕으로 지방 제도, 군사 조직, 경제 활동의 체제가 이루어져 국가 활동이 보다 활발해지게 되었다.

4. 유교는 조선 왕국의 정치적 배경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문화 활동 전반에 영향을 주는 사상적 기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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