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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대외 관계와 외침의 극복

〔학습 개요〕

조선 왕조는 국내 정치에 힘쓰는 한편,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외교 정책으로 사대 교린을 내세웠다.

일본에 대해서도 평화적 통상의 길을 열어 주었으나, 일본인은 여러 가지 제한에 불만을 품고 자주 소란을 피우더니, 마침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7년간에 걸친 임진, 정유의 왜란으로 국토의 대부분이 전란에 휩싸였다.

국난을 당하여 온 국민이 항전의 대열에 나섰다. 각지에서 궐기한 의병과 재편된 관군의 용전, 그리고 수군의 활동 등은 국민의 협력으로 마침내 왜란의 위기를 극복하였다.

그 후, 왜란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우리 민족은 북으로부터 만주족의 침략을 두 차례나 받아 다시금 국난을 겪었다. 남과 북으로부터의 국난으로 우리 나라는 큰 손상을 입었고, 전후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학습 문제

1. 조선 초기, 우리 나라와 일본과의 국교 관계는 어떠하였을까?

2. 어찌하여 왜란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우리 겨레는 어떻게 이 국난을 극복하였을까?

3. 양 난으로 말미암아 우리 민족은 어떠한 괴로움을 겪었으며, 그것은 우리에게 어떠한 역사적 교훈을 주었을까?

교린 정책과 삼포 개항

조선과 일본과의 관계는 왜구 문제로 건국 이전에도 복잡하였다. 왜구는 고려 말기부터 우리 나라 해안 각지를 침범하며 노략질을 일삼았다. 이에, 우리 나라는 일본에 대하여 교린 정책을 취하여, 한편으로는 강경하게 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회유에 노력하였다. 세종 때 이종무로 하여금 왜구의 근거지였던 쓰시마 섬을 정벌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 후 우리 나라의 세사미 등 생활 물자에 의지해서 살아 오던 쓰시마 섬의 거듭되는 요청을 받아들여, 그들이 통상할 수 있도록 3포(제포, 부산포, 염포)를 개항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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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포
삼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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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인들은 황, 구리, 소목, 약재, 향료 등을 가지고 건너와 쌀, 콩, 면직물, 도자기, 화문석 등의 생활 필수품과 서적, 공예품 등을 교역해 갔다.

삼포 개항 후 삼포에 거류하는 일본인들이 늘어 가자, 여러 가지 폐단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에, 우리 나라는 그들의 무질서한 교역 활동을 제한하고자 계해약조를 맺도록 하였다.

제한 조치로 그들의 경제적, 문화적 욕망을 채우기가 어렵게 되자, 그들은 때때로 삼포에서 난동하였고, 또한 남해안을 침범하였다. 중종 때의 삼포왜란, 명종 때의 을묘왜변 등이 그것이었다.

이와 같이 거듭되는 변란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마침내 일본과의 통교 관계를 끊어 버리고 말았다.

임진⋅정유의 왜란

일본은 15세기 중엽부터 오랫동안 내란에 시달리고 있었다. 100여 년 간의 전국 시대를 통일하고 실권을 잡게 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에 대한 일본 국내 불평 세력의 관심을 해외로 쏠리게 하고, 아울러 그의 침략적 야심을 펴기 위하여, 명을 정복하는 길을 빈다는 이유를 내세워 조선을 침입하여 왔다(1592). 이를 임진왜란이라 한다.

그간 거듭되는 당쟁으로 혼란하던 우리 나라는 일찌기 왜국의 야심을 알아채고 국방을 튼튼히 해야 한다는 이이의 주장마저 물리치고 국방을 소홀히 해 오다가 불의의 국난을 겪게 되었다.

조총이라는 신식 화기로 무장된 침략 왜군은, 부산과 동래에서 결사 항전하는 정발과 송상현의 군대를 깨고 충주의 방어선을 돌파한 후 마침내 서울을 침범하였고, 그 선봉 부대는 평안도와 함경도에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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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성 전투도
부산성 전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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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초기의 싸움과는 달리, 결국 의병 활동에 의한 후방 교란, 수군의 해상 교통로 차단, 명군의 내원 등으로 쫓기게 된 왜군은 화의의 기회를 찾게 되었다. 그리고, 명과의 화의 교섭을 전개하면서 남해안으로 물러나 정식 강화의 성립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 후, 4년간 끌어 온 화의 교섭이 결렬되자, 왜군이 다시금 북침하니, 이것이 정유재란이다. 그러나, 이 때에는 우리 관병과 의병에 의한 군비도 튼튼하고, 또한 명의 원병도 곳곳에 진주하고 있어 왜군의 북침은 난관에 부딪혔다.

한편, 한때 모략으로 물러났던 이순신이 재기용되어 명량에서 왜의 수군을 쳐부수자, 왜군은 본국과의 교통 보급로마저 위협을 받게 되어 궁지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왜군은 토요토미의 유언을 핑계삼아 본국으로 빠져 달아나니, 7년간의 이 전쟁은 많은 희생과 손실을 강요하고 끝났다.

민족의 항전

우리 나라는 왜군의 침략으로 기습을 당하였다. 더우기 왜군은 익숙한 전투 기술과 조총이라는 신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위기에 처한 우리 민족은 굴하지 않고 줄기찬 항전을 벌였다.

비록 왜군의 상륙을 막지는 못했으나, 정발과 송상현의 순국이나 또는 충주의 싸움과 같은 관군의 격렬한 저항이 있었다.

육전에서 거듭 패하여 침략군의 손길이 북쪽 깊숙이까지 뻗쳤으나, 우리 수군은 이순신 장군의 신묘한 지휘하에 한산도, 당포, 당항포 등 여러 곳에서 왜의 수군을 무찔러 본국과의 연락로를 차단하는 한편, 서해로 진출하려는 야심을 분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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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해전도
임진왜란 해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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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왜군이 북침을 계속하는 동안 각지에서 유생, 고승 들이 궐기하고, 민중들이 이에 호응하여 의병 활동이 전개되었다. 의병은 국가의 위기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스스로 전투에 뛰어든 의용군으로서, 각지에서 왜군을 기습하고 점령지를 교란하는 등 왜군에 큰 고통을 주었다.

의병은 먼저 경상도에서 궐기한 곽재우에 의하여 선도되었다. 조헌은 승병장 영규와 700 의사를 거느리고 전라도로 밀려드는 왜군을 맞아 싸우다 모두 옥쇄하였다. 이 밖에, 고경명, 김천일, 정문부의 의병 활동과 휴정, 유정이 이끄는 승병들의 활동은 두드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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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의 의병 궐기도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 궐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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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한때 흩어졌던 관군도 의병 부대와 연락을 취하면서 반격에 나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김시민은 진주성을 끝내 지켰고, 권율은 배치 전투에서 적군을 무찔러 전라도를 왜군의 침략에서 수호하였으며, 그 후 북상하여 행주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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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 산성의 전승탑
행주 산성의 전승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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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모함으로 삼도 수군 통제사의 자리에서 물러났던 이순신이 다시금 기용되어 12척의 함선으로 적의 대부대를 명량에서 격파하였다. 그러나, 그는 왜군이 본국으로 철수할 때, 이를 격멸하기 위해 싸우다 노량에서 전사하였다.

7년간의 국난을 극복함에 있어서는 이순신, 권율 등 장군의 진두 지휘와, 유명한 의병장들의 활약도 훌륭하였지만, 한편 의병이나 관군으로 싸운 무명의 농민과 군졸들, 그리고 부녀자까지도 전투에 참가한 국민의 총력전의 힘은 매우 컸던 것이다.

왜란의 영향

왜군의 파괴, 약탈, 살생, 납치로 우리 나라가 입은 경제적 손실이나 문화재, 인명의 피해는 말할 수 없이 컸다. 일본으로 납치된 인물 가운데는 노예로 멀리 남양으로 팔려 간 사람도 많았다. 한편, 경복궁, 불국사, 그리고 각지의 사고가 불타고, 많은 서적과 미술품이 타 버리거나 약탈당하였다.

인명의 피해와 토지의 황폐로 경제 상태는 몹시 악화되어, 국가에서는 부득이 관직을 매매해야 할 만큼 사정이 긴박하였다. 왜란 전 약 150만여 결이나 되던 토지 대장의 농지가, 왜란 직후에는 약 50만 결로 줄어든 것만 보아도 당시의 국민 생활의 어려움과 국가 재정의 파탄 상태가 어떠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전쟁을 통하여 일본에 대해서는 민족적 감정이 악화되었고, 구원병을 출동 시켰던 명에 대해서는 국민의 모화심이 깊어졌다. 이순신과 의병장들은 국민의 존경을 받게 되어 그들을 모시는 사당이 여러 곳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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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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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일본도 부질없는 전쟁으로 많은 인명을 잃었고, 국민들은 큰 고통을 받았다. 그 결과로 토요토미 정권이 몰락하고 도쿠가와 정권이 들어서는 정권의 교체를 가져왔다. 이 전쟁은 일본 문화 발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납치한 조선 유학자에 의하여 성리학이 전해졌고, 탈취한 금속 활자를 모각하여 많은 활자를 만들어 다수의 책을 찍어 냈다. 공예면에서는, 납치해 간 조선 도공들에 의해 우리 나라 도자기 기술이 전해져 일본 도자기 발달의 신기원을 이루었다.

한편, 많은 군대를 동원하여 우리를 도왔던 명은 국력이 쇠약해져 국내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이를 틈타 만주에서 여진족이 일어나게 되는 커다란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왜란 후의 대일 관계

왜란으로 일본과의 외교 관계가 단절된 것은 물론이다. 일본에서 토요토미 정권을 무너뜨리고 일본의 통치권을 장악하게 된 것은 토쿠가와 이에야스였다. 그는 에도(오늘날의 토오쿄오)에 막부를 설치하였다. 이 후 260여 년 간 그의 집안이 일본을 지배하게 되는데, 이 때를 에도 시대라 한다.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그 후계자는 조선과의 국교 회복을 열망하여 납치해 간 사람을 돌려 보내는 등 성의를 표하였다. 이에, 우리 나라는 일본과 다시금 교린 관계를 맺음으로써 양국의 국교는 회복되었다. 교린 관계의 최대 의례는 사신을 교환하는 일이었다.

한편, 동래부와 쓰시마 도주는 국제 정보를 긴밀히 교환하는 일을 맡아 보았다. 일본의 요청에 의하여 우리 나라에서 파견된 통신사의 일행은 약 500명이나 되는 대부대로, 일본측의 정중한 대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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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통신사의 행렬
조선 통신사의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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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의 왕래는 양국 간의 문화 교류의 기회이기도 했다. 우리 나라 사신이 일본에 상륙하여 에도에 이르는 도중에, 일본 문인과 예술가들은 사신 일행과 활발한 문화적 교섭을 가져 우리 문화 섭취에 힘썼던 것이다.

일본과의 무역도 행해졌다. 우리 나라에서 해마다 수십만 필의 면포가 일본으로 나가고, 일본에서 다량의 구리가 도입되었다. 담배, 고추, 토마토, 고구마 등이 이 때에 우리 나라에 전해졌다.

정묘⋅병자의 호란

임진왜란의 또 하나의 영향은, 조선을 돕기 위하여 거듭 군대를 출동시켰던 명의 국력이 쇠약해진 것이다. 이 때를 틈타 누루하치는 만주에서 여진족을 통일하고, 광해군 때에는 만주 땅에 후금을 건국하였다(1616).

대륙 정세의 이와 같은 새로운 변화를 맞아 광해군은 국방을 강화하는 한편, 중립적인 외교를 폈다. 그 후, 인조 반정, 이괄의 난 등으로 우리 나라의 정계가 혼란해지고, 외교적으로 후금에게 강경히 대하자, 마침내 후금은 우리 나라에 쳐들어왔다. 아직 왜란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다시금 국난을 겪게 되었다. 그리하여, 정충신의 활약과, 철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정봉수, 이입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평산까지 침범당하였다. 그러나, 이 정묘호란은 그 이상 확대되지 않고 양국 간에 화의가 성립되었다(1627).

정묘호란 후 내몽고 지배에 성공한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우리 나라에 대하여 군신의 예를 요구하였다. 이에, 우리 나라의 항청 의식이 높아지게 되자, 청 태종은 대군으로 재차 침입해 왔다. 우리 나라에서는 남한 산성에서 농성전을 벌였으나, 결국 강화를 맺어 명과는 국교를 끊고 청과 통교하게 되었다. 이 전쟁을 병자호란이라 한다(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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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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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론과 백두산 정계비

왜란이 끝난 지 30년 만에 맞은 호란으로 우리 나라의 고난은 말이 아니었다. 아직 왜란의 피해도 회복되지 않은 때인지라, 결국은 김상헌 등 강화 반대파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청과 사대 관계를 약속하고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후 우리 사회의 반청 정신은 매우 높았다. 임경업의 꾸준한 항전이 있었고, 효종 때에는 송시열, 이완 등을 중심으로 북벌론이 활발하였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명이 망하고 청이 중국을 지배하게 되면서 우리 나라는 청과 국경 호시장(의주, 중강, 회령, 경원)을 열고, 사신을 청에 자주 파견하여 정치적 관계를 굳히는 한편, 경제, 문화 교류를 꾀하였다. 1650년에는 만주 북부 헤이룽 강에 침범해 온 러시아 세력을 격퇴하기 위해 청이 원병을 요청해 오자, 우리 나라는 두 차례에 걸쳐 조총 부대를 출동시키기도 했다. 이를 나선 정벌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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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선 정벌도
나선 정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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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세력의 출현으로 만주를 성지로 받들던 청국인은 크게 놀라 만주 주변 지역의 국경을 확실히 하는 한편, 외인의 출입을 금하였다.

우리 나라와도 국경을 확정짓는 교섭이 진행되어 백두산 정계비를 세웠다(1712). 이 백두산 정계비는 그 해석으로 뒷날 청과의 사이에 간도 문제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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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정계비문
백두산 정계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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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정리

1. 조선은 국제 평화의 유지와 국가적 실리를 얻기 위해 외교적으로 교린 정책을 취하였다.

2. 양반 사회의 분열로 인한 혼란은 외세의 침략 야욕이 틈탈 수 있는 기회를 주어, 우리 나라는 국난을 맞았다.

3. 왜란은 열렬한 저항 정신을 가진 의병 운동과 이순신, 권율 등의 구국 활동을 중심으로 한 온 국민의 구국 항쟁으로 극복되었다.

4. 왜란에 이어서 호란이 벌어졌고, 그 결과 북방 민족에 대한 우리의 적개심은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5. 우리 민족의 자주 정신은 북벌 계획을 수립시켰고, 한때 러시아에까지 군대를 출동시켰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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