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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문예 활동과 종교 생활의 새로운 동향

〔학습 개요〕

정치의 안정과 경제의 성장, 그리고 실학 사상의 영향으로 영⋅정조 때에는 문화 활동이 매우 활발하였다. 유교 문화가 다시금 피어나는 한편, 서민층의 문화 활동이 활발해져, 조선 전기의 문화 활동에 비해 큰 진보가 있었다.

농촌 사회의 경제적 향상을 배경으로 교육의 기회가 농촌에까지 확대되었고, 서민층의 문화 의식이 높아져서 서민층과 여류 인사들의 문화 활동이 활발하였다. 그리하여, 서민의 감정과 생활을 담은 활동이 성장하게 되었다. 공예에 있어서도, 서민 사회를 내용으로 한 생활 공예품의 생산이 활발해졌다. 한편, 이 무렵에 중국 대륙을 통하여 서양 문물과의 접촉도 시작되어 서양 문물에 대한 우리 학자들의 이해가 생겨났고, 천주교가 우리 사회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학습 문제

1. 어떠한 사정으로 농촌과 서민 사회에서 문화 활동이 활발하였을까?

2. 농촌과 서민 생활을 배경한 문화 활동은 어떠한 특색을 지닌 것이었으며, 그 성과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을까?

3. 서양 문물과의 접촉은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서양 문물을 대하였을까?

서당 교육과 서민 문화

농촌 경제의 향상과 영⋅정조의 부흥 정치를 배경으로, 서민들도 교육과 문예 활동에 차차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농촌의 양반 자제와 부유한 서민 자제들이 읽기와 쓰기의 초등 교육을 받는 서당은, 조선 전기에도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 접어들어서는 전국의 마을에서 거의 볼 수 있을 만큼 보급되었다.

서당은 한자를 익히고, 나아가 유학과 역사 관계의 책을 학습하는 사설 교육 기관이었다. 서당의 전국적 보급에 따라 농민들 가운데서도 지식을 깨친 사람들이 나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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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의 학습 광경
서당의 학습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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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종래 사회적 활동을 전혀 할 수 없던 여성들 중에서도 한글을 익히는 사람들이 늘어 가게 되었다. 아울러, 이 무렵에는 한글 소설이나 민화와 같이 서민을 상대로 하는 작품이 쏟아져 나오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서민들이 문자를 익히고 안정된 생활을 하는 가운데 문화 활동에 뛰어드는 사람이 나오게 되었다.

실학과 국학의 발달과 더불어 서민 문화가 자라나게 된 것은 조선 후기 문화의 새로운 움직임으로 주목된다.

한글 연구와 국문학

한글은 반포된 후 양반 계급에 의해 천대를 받았다. 한글에 대한 연구로는 최세진을 비롯하여 신경준, 황윤석, 유희 등의 연구를 들 수 있는데, 이들의 연구 성과는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한글의 연구가 진행되는 동안, 한편 서민 생활을 소재로 하는 한글 소설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허균의 홍길동전, 김만중의 구운몽, 그리고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등과 같은 작품은 오늘날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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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
홍길동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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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본 춘향전
한글본 춘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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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한글 소설은 서민 생활과 그들의 소망을 그린 것으로, 양반 사회의 그릇됨을 지적한, 서민 감정이 담긴 서민 문학 작품들이었다.

시조 문학에도 새로운 모습이 나타났다. 즉,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중장이나 종장을 마음대로 늘려서 자기 생각을 자유로이 나타내려는 대중적인 사설시조가 유행하게 되었다.

한편, 김천택, 김수장 등이 예부터의 시조를 모아 엮은 청구영언이나 해동가요와 같은 책이 나왔다.

여류 문인의 활동

유교 중심 사회에서의 여성은 어진 어머니, 어진 아내로 참고 견뎌 내는 일만 강요당하고, 사회적 활동을 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여성들이 바깥 출입을 할 때에는 장옷이나 너울을 머리 위에서부터 써야만 했다.

이와 같이 모든 방면에서의 사회적 활동이 막혀 왔던 여류 사회에서도,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양반 상류층의 여성들과 특수한 직업에 종사함으로써 사회와 접촉할 수 있었던 기생들 가운데서 문예로 이름을 후세에 남긴 사람들이 나왔다.

선조 전후에는 신사임당, 허난설헌, 송덕봉 같은 사대부 부인과 황진이, 이매창 같은 기생들이 활약하였고, 경종 이후로는 혜경궁 홍씨, 윤지당 임씨, 의유당 김씨 등이 훌륭한 작품을 남겼다.

허난설헌의 시

하늘하늘 창가의 난초잎

어쩌면 그렇게 향그러울까.

하늬바람 잎새에 스치고 나면

그만 찬서리에 이울어져요.

유생들에게 언문이라고 하여 천대받던 한글은, 익히기가 쉽고 우리의 감정을 적기에 알맞은 글이어서 안방글이라고 불릴 만큼 여성들 사이에서는 널리 사용되었다.

대중 오락의 발달

조선 후기에는 서민층들이 즐길 수 있는 오락이 또한 발달하였다. 한글로 엮어진 국문 소설은 서민들이 가까이할 수 있는 문학 작품이었고, 그 내용으로 읊어지는, 우리 나라 고유의 노래인 판소리가 생겨났으며, 나아가 이것을 극화한 창극이 발달하여 서민들을 즐겁게 하였다.

한편, 가면극, 인형극도 이 무렵부터 서민 생활과 밀착되어 넓은 기반을 닦게 되었다. 또한, 민요, 속요도 유행되었는데, 그 때의 노래들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널리 애창되고 있다.

농촌에서는 두레를 중심으로 농악을 즐겼고, 지방에 따라서는 탈춤, 광대놀이 등 그 지방 고유의 오락을 즐겼다. 남부 해안의 부녀자들은 달 밝은 밤에 강강술래를 즐기기도 했다.

글씨와 그림의 새 동향

붓글씨는 양반들의 교양으로, 누구나 서도를 익히기에 힘썼다. 조선 후기 명필로서 뛰어난 서예 솜씨를 나타낸 사람은 김정희였다. 그는 종래의 서예가들이 중국인의 솜씨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 데 대하여, 추사체라고 일컬어지는 독특한 서체를 이루어 놓은 점에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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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체의 글씨
추사체의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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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때의 화가 정선과 심사정은 우리 나라의 산수를 잘 그렸고, 김홍도와 신윤복은 특히 서민 생활을 즐겨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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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도
금강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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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서도 김홍도는 조선 후기 최고의 풍속화가로서, 농민, 수공업자, 상인 등 생업에 종사하는 서민의 생활과 그 즐거움을 구수하고도 익살스러운 필치로 묘사하여 서민의 멋과 가락을 잘 나타냈다.

한편, 이름 모를 서민들의 솜씨에 의하여, 전통적인 동양화와는 다른 민화가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민화는 민간 생활과 직접 관계가 깊은 그림으로서, 민중의 감정이 잘 표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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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화(백선도 병풍)
민화(백선도 병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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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과 공예의 새 모습

건축에 있어서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대표적인 것은 석왕사의 대웅전, 해인사의 대적광전, 법주사의 팔상전 등이다.

한편, 정조 때에 이루어진 수원성은 중국의 성곽을 참고로 하여 건설된 것으로, 특히 화홍문, 방화수류정, 팔달문 등에 그 특색이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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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홍문
화홍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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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예로는 특히 자기, 목공, 칠기 등이 자랑할 만하다. 자기는 실용적인 백자 예술의 흐름을 받은 청화 백자가 널리 보급되었다. 이 때부터 푸른색 안료가 생산되었는데, 이 푸른색 안료로 산수, 화조, 초목 등을 그려 구운 청화 백자는 주로 술병, 꽃병, 연적, 필통 등 실용적인 작품들로서, 실생활에 널리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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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백자
청화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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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공으로 장롱, 궤, 문갑, 책상, 소반 등 실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많이 생산하였다.

이 밖에도, 죽제품, 나전 칠기 등의 기술이 발달하였는데, 조선 후기 공예는 양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서민 생활에도 혜택을 주는 폭넓은 활동을 보이게 된 데 특색이 있다.

서양 문물의 전래

우리 나라에서 서양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얻게 된 것은 선조 말에, 뻬이징에서 우리 사신들이 들여 온 서양 지도에 의해서였다.

지리상의 발견 이후, 서양 사람들은 동양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명의 신종 때에는 서양 신부들이 뻬이징에 들어와 활약하였는데, 뻬이징을 왕래하는 우리 사신들이 그들과 접촉하여, 그들에게서 여러 가지 서양 문물과 서적을 받아 본국으로 돌아왔다.

인조 때 정 두원은 화포, 천리경, 자명종, 만국 지도, 그리고 천문, 역법에 관한 책과 천주교 관계 서적을 받아왔고, 호란 때 볼모로 청에 가서 생활하던 소현 세자가 귀국할 때에도 과학 서적과 서양 종교 서적을 들여 왔다.

한편, 이보다 앞서 임진왜란 때 왜군을 따라 세스페데스 신부가 남해안에 상륙하였다가 일본으로 돌아간 바 있었고, 네덜란드 사람인 벨테브레(Weltevree), 하멜(Hamel) 등은 제주도에 표착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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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문물의 전래
서양 문물의 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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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 표류기의 표지
하멜 표류기의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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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우리 사신들에 의해 꾸준히 전래되는 서양 문물과 남으로 표류된 서양인과의 접촉을 통해 직접적으로 서양의 존재를 알게 되어, 서양 문화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서학과 그 영향

영⋅정조 때에는 우리 사신들과 서양인의 접촉이 더욱 활발해졌다. 이 무렵부터 서양의 학술과 기술, 그리고 종교와 윤리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은, 서양인들이 한문으로 엮은 서양 관계의 책, 즉 서학서를 열심히 읽게 되었다. 특히, 실학의 선구자인 이수광과 이익, 그리고 그의 많은 제자들이 서학을 활발히 연구하였다.

서학의 연구에 따라,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중국 문화에 대하여 품고 있던 높은 신뢰가 흔들렸다. 지리 지식의 확대에 따라 의식의 변화가 나타나, 보다 넓게 세상을 보고 학문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이러한 의식의 확대와 자아의 깨우침은 실학 운동을 보다 활발하게 하는 하나의 자극이 되기도 했다.

한편, 서학이 과학과 기술에 끼친 영향도 컸다. 김석문, 홍대용 등은 서양의 천문 지식을 받아들여, 지구 구형설과 지동설까지도 논하였다.

천주교 신앙이 우리 나라에 자리잡게 된 것도 서학 연구의 결과였다. 즉, 서학을 연구하던 일부 젊은 학자들이 서양 종교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인 이승훈은 뻬이징에 들어가 한국인 최초의 신자가 되었다. 곧 이어 귀국한 그는, 이벽과 함께 전교에 힘썼고, 그 결과 서울과 내포, 전주를 중심으로 천주교가 퍼짐으로써 우리 땅에 크리스트 신앙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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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의 비밀 종교 집회
천주교의 비밀 종교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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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정리

1. 정치적 안정과 산업의 발달, 그리고 실학 사상의 영향에 힘입어 유교적 조선 문화가 다시금 피어났다.

2. 경제적 성장에 따른 농촌 사회의 안정과 서당의 보급으로 서민의 문화 의식이 자라나 서민 문화가 크게 발달하였다.

3. 조선 전기의 문화 활동이 아직 상류 지배층을 중심한 것이었으나, 후기에는 서민층에까지 문화 활동이 확대되어 민족 문화의 폭이 넓어졌다.

4. 서학의 연구가 진행되는 가운데 천주교 신앙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자, 우리 사회에 새로운 문제가 생겨났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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