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 개요〕
1876년의 개항 이후, 우리 나라는 선진 근대 국가와 연결되면서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짧은 시일 안에 근대 문물을 과감하게 받아들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한, 근대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예부터 내려오는 것을 지켜 나가야 한다는 보수적 세력도 대단하여 혼란이 컸다.
독립 협회의 활동에 자극되어, 국민을 계몽하고 애국 정신을 일깨우는 언론 활동과 사회 단체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근대적 교육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으며, 국학 연구가 활발해지고, 새 시대의 생활과 정신을 담은 문화 활동이 활발해졌다. 한편, 근대적 교통, 통신, 운수, 의료 시설이 개설되고, 상공업 활동에도 새로운 발전을 보게 되었다.
학습 문제
1. 근대적인 언론 활동은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교육 내용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2. 개항 후 문예 활동과 학문 연구, 그리고 종교 생활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3. 우리 민족은 개항 후 옛 전통 문화와 새로 받아들인 근대 문화를 어떻게 조화, 발전시켜 나갔을까?
정치적 자각 운동
쇄국에서 개항, 척사와 개화의 대립, 외세의 정치적, 경제적 침투와 정치적 혼란을 겪는 동안, 우리 민족은 차차 정치적으로 깨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민족을 수호하고 개화 문명을 받아들여 자주적 근대 국가를 이룩해야겠다는 각성을 하게 되었고, 이를 보다 광범위하게 심어 주기 위한 조직적인 자각 운동이 활발해졌다.
정치적 자각 운동의 선구 조직은 독립 협회였다. 독립 협회가 자주, 자강, 민권 운동을 펴다가 해산당한 후, 그 뒤를 이어 여러 단체가 조직되어 구국 운동을 펴게 되었다.
헌정 연구회, 대한 자강회 등의 활동이 대표적이었으며, 이 밖에도 많은 사회 단체가 있었다. 특히, 신민회는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교육, 문화 전반에 걸친 계몽 운동을 폈다.
언론 기관의 발달
정치적 계몽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언론 기관도 잇달아 창설되어, 국민을 계몽하고 민족 여론을 조성하는 데 큰 공적을 남겼다.
우리 나라 최초의 신문은 한성 순보(1883)였으나, 이는 관보의 성격을 띤 것으로 10일 만에 한 번씩 발행되었다. 그 뒤, 1주일에 한 번씩 발행되는 한성 주보로 바뀌었으나, 그 성격은 변함이 없었다.
그 후, 본격적인 신문으로 독립 신문이 나왔다. 한글과 영문으로 간행된 신문으로, 민중을 계몽하고 민족 의식을 일깨워 준 신문이었다. 이 무렵 황성 신문과 제국 신문도 창간되었다.
황성 신문은 굴욕적인 을사조약이 체결될 때 일제 침략에 대한 저항의 선봉으로 나섰으며, 제국 신문은 주로 부녀자를 대상으로 민족 정신, 계몽 의식을 강화하였다.
한편, 일제 통감 정치 밑에서 우리 겨레의 비판과 항쟁의 자유가 억눌렸을 때, 영국인 베델은 양기탁과 더불어 국문과 한문으로 대한 매일 신보를 창간하여 뉴우스를 제공하고 민족 여론을 펴기도 하였다.
근대적인 교육 활동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권의 확립을 위한 자각은 활발한 교육 운동으로 나타났다. 민족 운동을 추진하던 지식인들은, 신교육을 통해 민중을 계몽하고 민족 정신을 배양하기 위해 육영 단체를 조직하고 교육 기관을 설립하였다.
근대적인 학교의 시초는 원산 학사였다고 하지만, 본격적으로 신학문 교육을 위해 설립된 학교는 육영 공원(1886)이었다.
갑오경장 이후에는 새로운 교육 제도가 마련되어 소학교, 중학교, 사범 학교, 외국어 학교가 세워졌으며, 교육 입국 조서가 발표되어 교육의 중요성을 국민에게 깨우쳐 주었다.
한편, 선교사들에 의해 배재, 경신, 이화, 정신 등의 학교가 세워졌다. 20세기 초에 국민들 사이에 교육열이 높아지자, 보성, 양정, 오산 등을 비롯한 많은 사립 학교가 세워져 민족 교육에 이바지하였다. 이러한 교육 운동은 뒷날 근대 국가의 역군을 길러 내기 위한 민족 운동의 한 모습이었다.
한편, 정규의 학교와는 달리 전국 각지에 있던 서당에서도 새로운 학문을 가르치는 곳이 나오게 되고, 야학이나 강습회가 많이 조직되어 민중 교육에 큰 구실을 하였다.
새로운 문예 활동
근대 문물이 전래됨과 아울러 문예 활동에도 새로운 모습이 나타났다.
개항 후 유럽 여러 나라를 시찰하고 귀국한 유길준은 새로운 문체로 서유견문을 지어 서구의 문물을 소개하였고, 새로운 문체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한편, 한글의 보급과 교육 활동이 벌어지고 서양 문학이 차차 소개되어, 그 영향으로 새로운 사상과 생활을 담은 언문 일치의 신소설, 신시, 신극 활동이 벌어졌다.
신소설의 개척자는 혈의 누, 귀의 성, 치악산 등의 작품을 남긴 이 인직이며, 그 밖에 자유종을 쓴 이해조와 추월색을 쓴 최찬식이 뒤이어 활동하였다. 신소설은 개화된 사회와 자주적 생활을 그리는 내용을 담은 것이 특색이었다.
한편, 신소설과 때를 같이하여 창가가 크게 유행하였다. 찬송가가 서양식 악곡에 맞추어 소개되면서 창가가 우리 사회에 유행하게 되었다. 이 당시의 창가에는 애국가, 독립가 등 민족 의식을 담은 것도 있었고, 신교육, 새 문명 등을 예찬하는 것들도 많아서 시대의 움직임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신시에 있어서는 최남선이 종래의 정형시의 틀을 벗어난 신체시를 발표하여 현대시의 선구가 되었다.
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
최남선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때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때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처얼썩 처얼썩 척 튜르릉 꽉.
국학 연구의 새 기운
교육열이 높아지고 민족 의식이 앙양됨에 따라, 국어와 국사에 대한 연구열이 높아졌다.
국어 연구를 위하여, 국문 연구소를 설치하여 학자들에게 한글을 연구하도록 하였는데, 주시경은 국어 문법, 유길준은 대한 문전이라는 문법책을 지어 국어 연구의 새로운 면을 열어 주었다.
국어 연구와 더불어 중요한 일은 한글의 보급이었다. 한글의 보급이 급속하게 진행된 데는 성경, 찬송가 등 크리스트 교의 영향과 교육의 보급과 신문, 잡지의 간행 등이 크게 작용하였다.
국사 연구에는 신채호, 박은식, 최남선 등이 활약하였는데, 이들은 국사 연구를 통하여 민족 주체 의식과 민족적 자부심을 심어 주기에 힘썼다. 침략을 물리치고 민족의 전통을 지키려는 이들의 학문적인 노력으로 민족 사학이 발달되었다.
한편, 국민 계몽을 목적으로 을지문덕전, 강감찬전, 이순신전, 최도통전 등, 외국 침략에 대항하여 싸운 민족 영웅들의 전기가 세상에 많이 나왔다.
국사뿐만 아니라, 세계의 역사를 통하여 민족적 교훈을 주려는 책도 출판되었다. 미국 독립사, 이탈리아 건국 3걸전, 파란 분할사, 월남 망국사 등이 그 대표적 예로, 우리 나라와 같이 외국의 침략과 간섭을 받으면서도 독립을 지키고 통일을 완수한 국가의 역사와 지도자들의 전기가 중심이었다.
다양한 종교 활동
정치적 혼란과 사회의 동요를 배경으로 종교 생활에 새 기운이 나타났다.
동학 혁명 운동이 실패한 후 심한 탄압을 면할 수 없던 동학은, 일제의 침략이 강화된 한말에 다시금 조직을 가다듬고 민족 운동을 폈다. 즉, 3대 교주 손병희는 친일하는 일부 동학 세력을 내몰고, 동학을 천도교라 하여 농촌 사회를 중심으로 다시금 교세를 폈다.
한편, 이 때 나철 등은 단군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대종교라는 민속 종교를 일으켜 민족 의식을 고취하였고, 불교계에서도 불교 혁신 운동이 일어나 한용운이 불교 유신론을 펴고, 박중빈이 원불교를 편 것도 이 즈음이다.
특히,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 선교사들의 입국 후부터, 신교는 신앙뿐만 아니라 교육 사업과 사회 활동을 펴 우리 나라 개화에 큰 역할을 하였다.
교통⋅통신의 발달
개항 후, 서양의 근대 과학 문명과 발달된 기술이 전해졌다. 먼저, 우편 사무를 보는 기관으로 우정국이 신설되었으나 갑신정변으로 폐지되었다가, 뒤에 다시 근대식 우체국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만국 우편 연맹에도 가입하여 외국과 우편물을 교환하였다.
전신 시설은 청에 의해서 서울, 인천과 서울, 의주 사이에 처음으로 가설되었다. 그 뒤, 서울, 부산 간의 전선 가설에 착수하고, 조선 전보 총국을 설치하여 통신 사무를 관리하였다.
전화는 경운궁 안에서 사용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가설된 후, 서울, 인천 간의 시외 전화와 시내 전화도 가설되었다.
한편, 근대적 교통 운수 기관도 도입되었다. 처음으로 개통된 철도는 경인선이었고, 그 뒤 경부선, 경의선이 차례로 개통되었다.
또한, 왕실과 미국인 콜브란의 합자로 세워진 한성 전기 회사는 서울에 전차를 놓고 이어 전등도 가설하였다.
세계 각국과의 교역 활동이 넓어짐에 따라, 화륜선(기선)을 사들이고 기선 회사도 설립하였다. 또, 치도국이 설립되어 도로의 건설 및 보수 등을 맡아 보았다.
근대적 의료⋅문화 시설
서양식 의료 기술이 선교사 알렌에 의하여 도입되었다. 그는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후에 제중원으로 고침.)을 설립하였다. 그 후, 크리스트 교에서는 세브란스 병원을 세워 의료 활동에 노력하였다.
한편, 정부에서는 진주 등 10여 곳에 자혜 의원을 설립하였으며, 대한 의원에서는 의료 요원도 양성하였다. 지석영은 이 기관의 책임자로 종두법을 보급시켜 국민 보건에 크게 공헌하였다.
문화 시설로는 서울의 원각사를 비롯하여, 큰 도시에는 극장이 세워져 연극이 상연되고 영화도 상연되었다.
독립문과 덕수궁 안의 석조전, 종현 성당(명동 성당) 등 근대식 건물도 세워졌다. 특히, 독립 협회가 주동이 되어 세운 독립문은 우리의 주체 의식을 보여 주고 있다.
근대적 산업 활동의 전개
세계 여러 나라와 직접적인 교섭이 전개되는 가운데 근대 기술 문명이 서서히 도입되어, 산업계에도 새로운 모습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 새로운 모습의 하나로 나타난 것이 민간인에 의한 근대 산업이다. 민족 산업은 상공업의 여러 분야에 걸쳐서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개항 이후, 개항장에 외국 상인들이 드나들면서, 이 곳을 중심으로 하여 외국 상인과 접촉하며 새로운 상업 활동을 펴는 도매 상인들이 생겨났다. 그들 도매 상인들은 외국 상인, 특히 일본 상인의 침투에 대항하여 상업 회사를 조직하였으니, 평안도의 대동 상회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상인 단체는 개항장에서 일본 상인의 불법 행위를 규탄하고, 또 우리 상인끼리는 상호간에 국내외의 경제 동향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며 상업 활동을 펴 나갔다.
한편, 공업 분야에도 근대적 시설이 갖추어져 갔다. 근대 무기를 제조하는 기기국, 화폐를 찍는 전환국, 출판물을 인쇄하는 박문국, 옷감을 짜는 직조국, 광산 개발을 위한 광무국 등이 설치되었다. 이들 기관은 정부에 의해 운영되었는데, 대한 제국이 수립된 이후로는 민간 기업인들도 근대 공업에 관심을 쏟기 시작하였다. 안경수, 김덕창 등은 일본 상품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그에 못지않은 좋은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여 대한 직조 공장, 김덕창 직조 공장 등을 세운 것은 유명하다.
해운업에 있어서도 일본 상선이 지배권을 넓혀 가자, 그에 대항하여 자주적 해운업의 성장을 꾀하였다. 정부에 의해 설치된 전운국, 이운사 등은 그 좋은 예이다. 광무 연간에는 대한 협동 우선 주식 회사, 인천 우선 회사 등의 민간 해운 회사가 설립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 자본에 의한 상공업 활동은 일본인의 그것에 비교하면 미약한 것이어서, 1910년 일제의 식민지가 되면서 민족 자본의 발전은 그 길이 더욱 막히게 되었다.
도시의 발달
상공업의 새로운 모습은 도시를 중심으로 나타났으니, 종래의 행정 도시는 상공업 도시로 바뀌어 갔다. 이전부터 교통이 빈번한 곳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새로이 큰 길이 닦이거나, 철도가 놓이면서 중요한 곳에 역이 설치되어 물화의 집산지가 생겨났다. 그리하여, 이 곳들을 중심으로 상업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근대 도시로 성장하여 갔다.
그리고, 개항장에 외국인의 왕래가 잦아지자, 그들을 위한 거류지가 허가되었다. 개항장 주위의 일정한 곳에 거류지를 설정하여 외국인이 생활할 수 있도록 하였다. 후에 개항장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이들 개항장은 새로운 도시로 성장하여 갔다. 인천, 군산, 목포 등은 이렇게 하여 생겨난 도시들이다.
학습 정리
1. 독립 협회는 해산당하였으나, 그 후 결사와 학회가 조직되고 언론 활동이 활발하여 정치적 자각을 촉구하였다.
2. 근대적 학교 교육이 시작되고, 근대 문명을 받아들여 개화되면서 문예 활동에 새로운 기운이 돌았다.
3. 개화와 더불어 전통 문화를 찾고, 이것을 연구하는 국학열이 높아졌으며, 특히 한글과 국사 연구가 활발하였다.
4. 세계와의 연결이 확대되고 근대 문명의 소개가 활발해지면서 근대적인 시설이 갖추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