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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한 민국의 수립과 시련

〔학습 개요〕

국내외에서 줄기차게 전개되었던 독립 전쟁과 연합군의 도움으로 우리 나라는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체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협력했던 미⋅소 양국이 전후에 다시 민주⋅공산 양대 진영으로 갈려지자, 그 날카로운 대립의 영향은 우리 나라에도 미쳐, 38선으로 국토 분단을 가져왔다.

그 후, 우리는 민주 국가인 대한 민국을 건국하였으며, 이북에서는 공산 집단의 괴뢰 정권을 세웠다. 소련의 사주를 받은 공산 집단은 민족의 소망을 외면하고 6⋅25 사변을 도발하여 우리에게 커다란 시련을 겪게 했고, 막대한 인명 피해를 가져왔다. 3년여에 걸친 이 전란은 굳건한 반공 의식을 가진 우리 겨레와 유우엔 군의 용전에도 불구하고 휴전에 그치고 말았다. 그리하여, 민족의 소망인 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제, 우리는 조국의 통일을 위해 국력을 길러야 하는 것이다.

학습 문제

1. 제2차 세계 대전 중 우리 민족은 독립을 위하여 어떻게 투쟁하였을까?

2. 38선은 왜 생겼으며, 우리에게 어떠한 문제를 가져왔을까?

3. 대한 민국 정부는 어떠한 경로로 수립되었으며, 6⋅25 사변의 시련을 어떻게 극복하였을까?

독립 전쟁의 격화

우리 겨레의 독립 투쟁에 새로운 희망을 준 것은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이었다. 이 두 전쟁은 모두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도발된 침략 전쟁으로, 결과는 일본의 패배를 가져왔다.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전시 체제로 그 조직을 바꾸어 광복군을 조직하여, 중국 각지에서 중국군과 힘을 합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중국 각지에 흩어져 살던 우리 청년들은 물론, 일본 군대로 끌려 나갔던 우리 청년 중에서도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광복군에 합류하여 우리의 독립을 위혜 싸운 사람이 많았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임시 정부는 즉각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고, 광복군을 멀리 버어마 전선에까지 파견, 영국군과 합류하여 일본군과 싸우게 하였다.

이 때, 광복군은 중국 땅에서 미군에게서 낙하산 훈련까지 받아 가며, 본토 진입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에 살던 우리 동포 600여 명도 의용군으로 미국 부대에 합류하여 독립 전쟁에 나섰다.

이와 같이, 밖으로 격동하는 세계 정세를 배경으로 우리의 독립 전쟁이 격화되자, 이 소식은 비밀리에 국내에 알려져, 국내의 국민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민족 해방과 국토 분단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를 거두자, 마침내 우리 민족은 감격적인 광복의 날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광복은 연합군의 승리만으로 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중국, 미국, 영국, 소련 등 연합군측 국가들의 후원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그 뒤에는 우리 겨레의 피어린 독립 투쟁이 있었음으로써 광복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광복은 바로 우리 민족의 줄기찬 독립 정신으로 이룩된 것임을 깊이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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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의 기쁨
광복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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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활동과 잇단 의거에 감동한 중국은, 중⋅일 전쟁을 계기로 적극적으로 우리의 독립 투쟁을 후원하였다.

또한, 줄기찬 거족적 투쟁을 통하여 독립 국가 생활의 역사와 높은 민족 문화의 전통을 이해하게 된 연합국의 후원도 있었다.

그리하여,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중국의 제안을 받아들인 연합국 수뇌들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남과 함께 우리 민족의 독립을 약속하였고, 포츠담 선언에서 다시 우리의 독립을 세계에 확약하였다. 이렇게 해서, 일제 36년간 우리 민족이 전개한 독립 전쟁의 보람이 민족의 광복으로 보답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감격적인 광복은 바로 독립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그것은 미⋅소의 군사적 결정에 의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소 양국군이 우리 나라 남과 북에 주둔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사적인 이 경계선은 그 후 복잡한 세계사의 움직임에 따라 정치적 분할선으로 굳어져, 우리 민족은 국토의 분단이라는 새로운 시련을 안게 되었다.

반탁 운동과 미⋅소 공동 위원회

38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에 진주한 미⋅소 양국은 각기 군정을 실시하였다. 군정하의 남한에서는 정국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해외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독립 투쟁을 펴 왔던 독립 투사들은 물론, 많은 해외 동포들이 광복된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많은 지도자들이 많은 정당을 만들었지만, 정치적 활동의 기반이 좀처럼 잡히지 못했다.

한편, 소련 군정하의 북한에서는 소련군의 조종을 받는 공산주의자들이 급속하게 자라나, 뒷날 공산 독재 정치를 밀고 나갈 기초 작업을 폈다

1945년 말,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 외상 회의에서, 우리 나라를 상당한 기간 연합국의 신탁 통치를 거쳐 독립시킨다는 신탁 통치안이 결정되었다. 국제적인 신의를 저버리고 우리의 역사와 전통을 무시하고 독립을 지연시키려는 이 결정에, 공산주의자만이 찬성했을 뿐, 우리 민족은 맹렬한 반탁 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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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탁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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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에서 미⋅소 공동 위원회가 열렸고, 이어 제2차 위원회가 열렸으나 결렬되었다. 즉, 정부 수립을 위한 타협의 대상에서 반탁 세력을 제외하기를 고집하는 소련의 부당한 요구로 실패하였다.

대한 민국의 수립

미⋅소 양국의 교섭을 통하여 한국의 독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열렸던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국은 한국 문제를 1947년에 유우엔에 제출하였다.

제2차 유우엔 총회에서는 유우엔 감시하에 한반도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의하였고, 이어 이 일을 맡아 볼 유우엔 한국 위원단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유우엔 한국 위원단은 소련과 북한 공산 집단의 방해로 북한에서는 그 임무를 수행할 수가 없었다. 이에, 유우엔 소총회에서는,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 총선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조직하도록 결의하였다.

1948년, 마침내 총선거가 실시되어 국회를 구성하고 국회에서 헌법을 제정하였으며, 헌법에 제정한 바에 따라서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민주 공화국으로서의 대한 민국의 수립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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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수립 선포식
정부 수립 선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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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민국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주 공화국이다.

북한의 실정

한편 북한에서는, 소련의 뒷받침으로 민주 세력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하게 된 공산주의자들이, 유우엔의 통일 정부 수립의 노력을 거부하고 자기들대로의 공산 정권을 조직하였다.

대한 민국 수립 당시의 우리 경제는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38선에 의한 국토의 분단이 우리의 경제 생활을 두 조각으로 갈라 놓았으니 더욱 어려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남한은, 풍부한 지하 자원과 수력 자원, 그리고 공업 시설을 갖춘 북한에 비해 농업 중심이었고, 전력도 부족하였으며, 또한 경공업 중심의 공업 시설밖에 없었다.

당시, 이와 같이 경제적으로 불리했던 대한 민국을 더욱 곤경에 몰아넣기 위해, 공산 집단은 민족의 정의를 저버리고 전력의 공급을 끊었으며, 남한의 공산 도배를 사주하여 파업과 파괴를 일으켜 마침내는 제주도와 여수, 순천 지구에서 반란을 일으키도록 하였다.

한반도의 공산 지배를 꿈꾸던 북한 공산 집단은, 소련의 도움을 받아 병력을 대폭 늘리고, 현대식 무기까지 갖추어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만을 보고 있었다.

6⋅25 사변과 자유 수호

남한에 주둔하던 미군이 철수하자, 기회를 노리던 북한 공산군은 드디어 1950년 6월 25일을 기하여 침략전을 도발하고, 38선을 넘어 자유 대한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불의의 공격으로 열세에 놓인 국군은 작전상 후퇴를 하며 용감하게 싸웠다.

공산군의 침략이 일어나자, 미국의 요구로 소집된 유우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북한 공산당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공산군의 철퇴를 요구하는 한편, 유우엔 군의 한국 파견을 결의하였다. 이리하여, 미⋅영⋅프랑스 등 강대국은 물론, 콜롬비아, 터어키 등 16개국이 세계 평화와 자유 수호를 위해 우리 나라에 군대를 보내 와, 유우엔 군의 깃발 아래 한국군과 같이 싸웠다.

한때 전세가 매우 위급하였으나, 재편 강화된 국군과 유우엔 군의 용전으로 서울을 수복하였고, 북한으로 진격하였다. 국군은 한때 압록강, 두만강 깊숙이까지 진격하였으나, 중공군의 불법 개입으로 말미암아 38선 부근으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치열한 전투는 계속되었으나, 유우엔 군과 공산군 사이에 1년간에 걸 친 휴전 회담이 진행되더니, 1953년, 우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휴전하기로 합의하여, 통일을 이룩하지 못한 채 전란은 일단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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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사변도
6⋅25 사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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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사변의 교훈

6⋅25의 공산 침략은 자유와 평화에 대한 도전이고, 동족 상잔의 비극이기도 했다.

근대 과학 무기와 막대한 병력을 동원하여 남북으로 후퇴와 진격을 거듭하기 3년간의 전쟁으로 우리 국토는 황폐할 대로 황폐했다. 이로 인한 물질적 손해는 물론, 인명의 피해도 막대한 것이었다. 전투원의 희생만이 아니라, 학살, 납치로 인한 일반 민중의 피해도 놀라울 정도로 컸다.

한편, 6⋅25 사변을 계기로 우리 국민의 반공 신념은 더욱 굳어졌다. 그것은 선전과는 다른 그들의 정체를 실제로 보았기 때문에 얻어진 귀중한 교훈이었다. 전란 중에 수많은 북한 동포가 자유와 평화를 찾아 사선을 넘어 자유 대한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4만여 명의 공산 포로가 북한 공산 세계로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자유의 땅에 남았음을 보아도 그 실정을 너무나 명백히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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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찾기 위한 피난 행렬
자유를 찾기 위한 피난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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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는 세계사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즉, 유우엔 군의 출동으로 세계 각국이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집단 안전 보장의 군사 작전을 이끌었으며, 자유 세계가 공산 침략에 대하여 새로운 깨달음을 가지고 대비하게 된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전후의 재건 활동

6⋅25 사변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입은 피해는 너무나 큰 것이었다. 인명의 피해만도 막대하였으니, 전투에 의한 사상자가 수십만이 되었고, 전재민은 수백만에 달하였다. 또한, 전쟁으로 인한 물질적인 피해도 컸다. 많은 건물을 비롯하여 도로, 교량, 중요한 공장과 발전 시설 등이 파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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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 침략으로 파괴된 주택
공산 침략으로 파괴된 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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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이 성립되자, 대한 민국은 황폐한 국토의 재건과 부흥에 전력을 기울였다. 미국을 비롯한 자유 우방들도 물심 양면으로 우리를 지원하였다. 그리하여, 복구 사업은 급속히 진행되어 다시금 생산 활동이 활발해졌다. 교통, 통신, 운수 기관이 나날이 개선, 발전되었고, 시멘트, 전기 등 기간 산업 시설이 마련되어 갔다. 교육 기관도 확충되어 전란 전보다 활발한 교육 사업을 펼 수 있게 되었다.

한편, 국방에 있어서도 군사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미국과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을 맺어 공산 침략에 대비하였다.

학습 정리

1. 제2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자, 우리 겨레의 독립 전쟁은 국내외에서 보다 조직적인 항일 전쟁을 폈다.

2. 민족의 해방은 연합군의 승리를 계기로 실현되었으나, 우리 민족이 보인 불굴의 독립 전쟁의 결과이기도 하다.

3. 한국 문제가 미⋅소에 의해 해결되지 못하자, 유우엔의 주선에 의하여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에 의해 대한 민국이 탄생하였다.

4. 신생 대한 민국은 공산 세력의 도전을 받았고, 6⋅25 사변의 민족적 비극마저 겪었으나, 민족의 항전과 자유 세계의 결속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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