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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삼국의 대외 항쟁과 통일

2. 삼국의 대외 항쟁과 통일

〔학습 개요〕

고구려는 한반도의 울타리 역할을 하여 중국 세력의 침입을 막아, 남쪽의 백제와 신라의 터전을 굳히게 해 준 나라이다. 또, 중국의 남북조 시대의 여러 나라와 교섭하고, 수, 당 등 통일 국가와 거듭 교전하면서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를 넓혔다.

백제는 일찌기 중국의 남조와 교섭하면서 문화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4세기경에는 복잡한 대륙 정세를 틈타 중국 지역에까지 세력을 넓히기도 하였다.

한편, 신라는 고구려, 백제에 비해 늦게 발전하였으나,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여 한반도의 중심부를 차지한 후, 당과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렸다. 그 후, 신라는 우리 땅을 지배하려는 당을 몰아 내고 마침내 삼국 통일을 이룩하여, 민족의 굳건한 기백을 보여 주었다.

학습 문제

1. 백제는 요서 지방에 어떻게 하여 진출할 수 있었을까?

2. 고구려는 수, 당의 침략을 어떻게 극복하였을까?

3.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이유는 무엇일까?

4. 삼국 중에 가장 늦게 발전한 신라가 어떻게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을까?

5. 신라는 당의 세력을 어떻게 몰아 낼 수 있었을까?

고구려의 대외 관계

고구려는 우리 나라에 침입하려는 중국 세력을 저지하는 한반도의 울타리 구실을 하였으며, 때로는 적극적으로 중국 세력을 교묘히 이용하여 그들을 견제하기도 하였다.

동천왕 때에는 중국 분열을 이용하여 바다 건너 오와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고구려가 중국 5호 16국의 혼란을 틈타 요동 지방에 진출하자, 선비족의 침략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수림왕 때에는 북방의 전진과도 친선 관계를 맺었으며, 장수왕 때에는 남북조의 분열을 역이용해서 만주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동북 아시아의 최대 강국으로 군림하였다.

이와 같은 고구려의 활발한 대외 관계는 한반도 내의 사정으로 계속될 수 없었다.

대체로 5, 6세기의 삼국은, 고구려의 남하 정책과 이에 대항하여 백제, 신라가 현상을 유지하려 하였으나, 6세기 중엽 이후 신라의 팽창과 수의 등장으로 극동의 정세는 새로운 경지를 맞게 되었다.

백제의 해외 진출

4세기에 이르러 고구려가 중국과 심한 충돌을 계속하고 있을 때, 백제는 마한 세력의 병합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마침내, 마한을 완전히 정복하고 국가 체제를 갖춘 백제는, 4세기 중엽 중국의 진이 약화된 틈을 타서 요서 지방에까지 나아갔다. 이것은 당시 고구려의 요동 진출에 맞먹는 것이다. 이 때, 백제인들은 산뚱 지방과 일본의 여러 지방에까지 진출하였다.

이러한 백제 세력은, 5세기 중엽 이후 고구려의 남하와 중국 세력의 압력으로 밀려났다. 비록 백제의 중국 진출이 약 1세기에 걸치는 기간이지만, 이는 백제인의 왕성한 해외 진출의 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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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해외 진출
백제의 해외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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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수 대첩

6세기 후반에 이르러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하자,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 이 무렵, 오랫동안 분열되었던 중국은 수에 의해 통일되었다.

수가 중국을 통일하자, 위협을 느낀 고구려는 군비를 갖추고 군량미를 비축하는 등 이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영양왕은 몽고 지방의 돌궐과 동맹을 꾀하는 한편, 말갈족을 이끌고 요서 지역을 먼저 공격하였다. 이에, 동방 진출을 꾀하던 수의 문제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는데, 고구려는 초전에 이를 크게 무찔렀다.

그 후, 수의 양제는 백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다시 침략해 왔다. 이 때, 을지문덕은 수의 30만 별동 부대를 평양성 근처까지 끌어들여 포위, 공격하였다. 그는 크게 패하여 후퇴하는 적군을 살수(청천강)에서 거의 전멸시켰다. 이 승리가 우리 역사상 가장 빛나는 살수 대첩이다(612). 그 뒤에도 고구려는 몇 차례나 침공해 오는 수의 군대를 번번이 쳐부수었고. 여기에 국력을 소모한 수는 내란까지 겹쳐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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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수 전쟁(민족 기록화)
고구려⋅수 전쟁(민족 기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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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성의 승리

수의 뒤를 이어 중국을 지배하게 된 당은 한때 고구려와 화친하였으나, 국력을 키워 고구려를 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에 고구려는, 국경 지대에 장성을 쌓아 대비하였다.

한편, 백제와 고구려의 침략을 자주 받아 고립 상태에 있던 신라는, 이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당과 외교 관계를 강화하였다. 당 태종은 이러한 국제 관계를 틈타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당군은 당차, 포차 등 신무기를 이용하여 요동성을 함락시키는 등 한때 기세를 올렸으나, 고구려는 수 개월 동안 치열하게 계속된 안시성 싸움에서 당군을 크게 무찔렀다(645).

그 후에도 고구려는 당의 몇 차례에 걸친 침략을 받았으나 이를 모두 물리쳤다. 이것은 고구려인들이 일치 단결하여 국난을 극복한 빛나는 승리로서, 우리 역사상 특기할 만한 일이다.

백제의 멸망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하자, 고구려와 백제는 서로 동맹하여 신라를 자주 공격하였다. 곤경에 빠진 신라는 김유신 등으로 이를 막게 하는 한편, 당과 동맹을 맺었다.

이 때, 당은 고구려 정벌에 여러 번 실패한 뒤라, 방법을 바꾸어, 신라를 돕는 체하면서 백제, 고구려를 차례로 치려고 하였다.

한편, 백제의 의자왕은 신라에 대한 군사 작전을 자주 일으켜 부질없이 국력을 소모하고 있었다. 이 틈을 탄 신라군은 당군과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하였다. 이 때, 계백이 거느린 백제의 결사대는 신라군을 맞아 황산벌에서 용감히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다. 이어 나⋅당 연합군에게 사비성이 함락됨으로써 백제는 멸망하였다(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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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 동상
계백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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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멸망

백제를 무너뜨린 신라와 당은 그 이듬해에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한편, 고구려는 수, 당과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국력이 소모되어 차차 나라가 기울어 갔다. 이러한 가운데 연개소문이 죽자, 정권을 둘러싸고 지도층이 분열되어 국력이 더욱 약화되었다.

이 틈을 타 신라와 당은 남과 북에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고구려는 평양성을 굳게 지키며 1년간 항전하였으나, 끝내 함락되고 말았다(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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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동상
김유신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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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통일

백제와 고구려가 망한 후, 옛 영토에서는 부흥 운동이 줄기차게 일어났다.

옛 백제 지역에서는 복신, 도침, 흑치상지와 왕자 풍이 부흥 운동에 앞장 서 한때 그 세력이 대단하였으나, 지도층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옛 고구려 지역에서도 검모잠, 안승 등이 중심이 되어 여러 곳에서 부흥 운동을 일으켰으나, 내분이 일어나 실패하고, 안승은 신라에 투항하였다.

이 때, 당은 신라마저 그들의 지배하에 넣으려고 하였으나, 이를 눈치챈 신라는 이 땅에서 당군을 몰아 내기 위한 노력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0여 년 간에 걸쳐 신라와 당은 싸움을 거듭하였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 운동군을 도와 당군의 공격을 막는 한편, 백제의 유민과 힘을 합쳐 백제의 옛 땅에 주둔하고 있는 당군을 무찔렀다. 당은 많은 군대를 파견하여, 한강, 임진강 유역에서 신라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당군을 매초성 싸움에서 거의 섬멸하였고, 이어서 금강 입구에서 당의 해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리하여, 신라는 마침내 당군을 이 땅에서 축출하고, 민족의 숙원인 삼국 통일을 이룩하였다(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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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초성 싸움(민족 기록화)
매초성 싸움(민족 기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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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정리

1. 고구려는 중국을 통일한 수와 당의 침략을 받았으나, 살수와 안시성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나라를 지켰다.

2. 신라와 당과 이해 관계가 일치되어 나⋅당 연합군이 결성되었고, 이러한 관계에서 백제, 고구려가 무너졌다.

3. 신라는 우리 나라에 야심을 가진 당과 싸워 마침내 그 세력을 축출하고, 삼국 통일을 이룩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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