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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려 전기의 사회와 문화

〔학습 개요〕

고려의 사회 구성은 귀족과 하급 관리들로 이루어진 지배층과, 농민과 천민으로 이루어진 피지배층으로 형성되었는데, 이들의 생활은 그 신분에 따라 각각 달랐다.

고려가 귀족 중심의 사회이기는 하지만, 민중 생활의 안정을 위한 정책에도 많은 힘을 기울여 각종 구제 시설을 마련하였다. 문물 제도의 안정에 따라 상업 활동도 점차 활발해졌고, 화폐도 만들어졌다.

신라에 이어 고려에서도 불교가 융성했는데, 대장경판은 그 대표적 유산이다. 과거의 시행으로 유학과 한문학이 발달되었다. 그리고, 학문의 발달로 삼국사기를 비롯한 각종 역사책이 편찬되었다. 또, 귀족 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고려 청자와 같은 민족 예술의 걸작품이 나오게 되었다.

학습 문제

1. 고려 전기의 사회 구성은 어떠했으며, 귀족 및 민중의 생활은 어떠했을까?

2. 고려 전기 사회에서 불교와 유학은 어떠한 역할을 하였을까?

3. 고려 전기 문화의 특색과 대표적인 문화 유산은 무엇일까?

4. 고려자기의 특징은 무엇인가?

문벌 사회

고려 사회를 흔히 귀족 사회라 한다. 고려 사회는 가문이나 문벌을 중시하였으므로, 개인의 능력보다는 출생 신분이 매우 중요했다. 따라서, 문벌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면 자동적으로 귀족으로서의 관직, 토지와 함께 여러 가지 특권을 부여받았다.

귀족들은 문벌을 유지하기 위하여 다른 좋은 문벌과 혼인을 하거나 왕실과 혼인을 하여 외척으로 권세를 부리기도 했다. 이러한 귀족들은 음서와 공음전을 통해 정치적, 경제적인 특권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11세기에 전성을 맞았던 귀족 중심의 제도는 점차 모순이 나타나더니, 무신의 난으로 무너지게 되었다(1170).

귀족과 평민

신라 말의 혼란으로 크게 흔들렸던 사회 신분은 고려에 이르러 새로이 정비되었다. 고려 초의 호족이 중앙의 귀족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왕실과 혼인 관계를 가진 집안이 세력을 얻기도 하였다.

성종 이후 여러 문물 제도가 안정되면서 사회 신분은 대체로 왕족을 비롯한 문무 양반의 상류 계층, 궁중에서 일하는 남반, 하급 관리와 기술직 관리, 중앙 군인 등의 중류 계층, 그리고 그 아래에 평민 및 천민 등 네 계층으로 나뉘어 자리잡혔다.

문무 양반을 중심으로 한 귀족은 국가에서 과전, 공음전 등의 토지를 받고, 국학에 입학할 수 있는 혜택을 누렸다. 무관보다는 문관이 더 좋은 대우를 받았으며, 가문이 매우 중요시되었다.

궁중이나 관청에서 실무를 맡아 보는 하급 관리와 기술직 관리 및 지방의 향리들도, 귀족에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비교적 좋은 대우를 받았다.

백성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은, 생산과 노동에 종사하며 조세, 공납, 요역의 의무를 졌다. 농민들이 내는 조세와 공물은 국가 재정의 바탕이 되었다. 농민들은 과거에 응시할 자격은 있었으나, 실제로 과거를 통하여 관리가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천민으로는 노비, 화척, 재인(광대), 진척(뱃사공), 역정(마부) 등이 있었다. 노비에는 관청에 소속된 관노비와 개인이 소유한 사노비가 있었다. 이 밖에, 신라 때부터 존속된 향, 소, 부곡 등 특수 행정 집단에 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도 천민과 같이 취급되었다.

사회 시설

농업을 중요시한 고려에서는 농민 경제와 민중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의창, 상평창, 제위보 등의 제도를 두었다.

의창은 곡식을 저장해 두었다가 흉년이나 춘궁기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빌려 주는 기관이었고, 상평창은 곡식의 값이 떨어졌을 때 사 두었다가 오를 때 팔아서 물가를 조절하는 기관이었다.

그리고, 보는 일정한 기금을 모아 그 이자로써 사업을 하는 일종의 재단인데, 그 목적에 따라 학보, 경보, 팔관보, 제위보 등이 있었다. 제위보는 빈민 구제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한편, 빈민을 위한 의료 시설로서 개경에 동대비원과 서대비원을 두었다.

연등회와 팔관회

고려의 민중 생활에는 여러 가지 행사와 풍속이 있었다. 그 중, 불교 행사로 봄철에 여는 연등회와 겨울에 산천의 토속신에게 제사지내는 팔관회가 대표적인 것이었다. 특히, 팔관회는 개경과 서경에서만 행해졌는데, 이 때에는 외국 상인들도 특산물을 바치며 무역하는 좋은 기회로 삼았다.

5월 단오에는 격구나 그네, 씨름 등을 즐겼고, 6월 유두에는 동쪽으로 흐르는 냇물에 머리를 감으며 즐겼다. 또, 7월 보름(백중)과 8월 보름(한가위)도 즐거운 명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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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구도
격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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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풍수 지리설이 신라 말부터 신봉되어 왔다. 풍수 지리설에 따르면, 국가나 개인의 길흉 화복은 국가의 도읍이나 궁전 및 개인의 주택, 무덤 등이 자리잡고 있는 터와 주위의 산천 형세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풍수 지리설은, 고려 시대에는 물론, 조선 시대에 내려와서까지도 사회 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다.

상공업과 화폐

농업이 주산업이었던 고려에서는 수공업과 상업도 점차 발전되었다. 수공업품에는 각종 무기, 장신구, 직물, 종이 및 도자기 등이 있었다. 농업과 수공업의 생산력이 증가됨에 따라 상업 활동이 자라났으며, 개경을 비롯한 교통의 요지에는 시장과 상점이 생겼다.

국내의 상업이 자라남에 따라 외국과의 무역도 활발해져서, 벽란도에는 송, 왜 및 아라비아 상인들의 배가 드나들었다.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화폐도 만들어졌다. 성종 때 건원중보라는 철전을 만들어 사용하였고, 숙종 때에는 우리 나라의 지형을 본뜬 은병을 만들어서 이를 활구라 하여 화폐 대신 사용하였다. 그 뒤에 해동통보, 삼한통보, 동국통보 등을 만들었으나, 널리 사용되지는 못하였다. 이렇게 화폐 사용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농업 생산에 의존하는 자급 자족적인 경제 구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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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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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태종

불교는 고려 때에 매우 발전하였다. 태조가 불교의 숭상을 강조한 이래 많은 절과 탑이 세워졌고, 유명한 승려에게는 왕사, 국사의 칭호가 주어졌으며, 광종 때부터는 과거에도 승과가 마련되었다. 그리하여, 일반 민중은 물론 많은 귀족 자제들도 승려가 되기를 희망하였다.

고려 전기의 승려로는 문종의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이 유명하다. 그는 일찍부터 교종과 선종의 대립을 해소하는 데 노력하였으며, 송에 가서 불교를 연구하고 돌아와 천태종을 새로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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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국사 의천
대각국사 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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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융성에 따라 대장경의 조판이 거듭되었다. 대장경은, 현종 때에 거란의 침입을 받게 되자, 부처의 힘으로 적을 막기 위하여 만들기 시작하였다. 문종 때에 완성된 대장경 판목은 대구 부인사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몽고 침입 때에 불타 없어졌다. 그 후, 대각국사 의천이 송, 요, 왜 등지에서 구해 온 불교 서적들을 모아 간행하였는데, 이것을 현종 때에 만든 대장경과 구별하여 속장경이라 한다.

사학과 관학

불교가 민간의 신앙 생활을 주도하는 한편, 유교는 국가 통치의 지도 원리로서 매우 존중되었다.

고려 시대에 유학이 발달하게 된 것은 과거 제도의 시행과 관계가 깊다. 과거에 합격하여 관리로서 출세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시험 과목인 유학을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학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유학을 장려하여 그 기초를 닦게 한 이는 성종이었다. 그는 최승로와 같은 유학자의 건의에 따라 개경에 국자감을 세우고, 지방에도 학자를 보내어 유학의 교육과 보급에 힘썼다.

고려의 유학은 문종 때에 이르러 가장 성하였는데, 이 때에는 국자감을 중심으로 한 관학보다도 유명한 학자들이 세운 사학이 더 발달하였다. 당시 사학 중에는, 해동 공자라 불린 최충이 세운 문헌공도가 가장 유명하였다.

이렇게 사학이 발달하고 관학이 부진하게 되자, 예종은 관학을 진흥시키기 위하여 양현고라는 장학 기금을 설치하고, 또 국학에 7재를 두어 교육 내용의 충실을 기하였다.

문학과 역사학

유학의 발달과 과거 제도의 시행으로 한문학 중심의 문학이 발달하였다. 이 때의 문장가로서는 최충, 김부식 등이 있었고, 시인으로서는 정지상이 유명하였다.

고려 초기까지도 향가가 유행하여 균여대사가 지은 향가 11수가 전하고 있다. 뒤에는 향가 대신 정과정곡을 비롯한 가요가 불려졌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으로 역사 기록이 많이 불타 없어졌다. 이에, 현종은 태조 때부터 목종 때까지의 7대 실록을 편찬하였으나, 전해지지 않고 있다. 지금 남아 있는 가장 오래 된 역사책은 인종 때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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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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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발전

고려 귀족 사회는 불교의 발전과 더불어 많은 예술품을 낳게 했다.

고려의 예술을 대표하는 것으로는 고려 청자를 들 수 있는데, 여기에는 고려 사람들의 예술적 재능과 창의력이 매우 잘 나타나 있다. 고려 청자의 뛰어난 점은 형태가 지니는 선의 흐름과 아름다운 색깔, 그리고 상감 기법을 비롯한 무늬의 아름다움에 있다. 고려 청자는 은근하고 밝은 비취색과, 여러 가지 형태의 회화성을 지닌 무늬가 조화되어 예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고려 청자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뛰어난 것은 상감 청자인데, 이것은 자기 표면에 음각의 무늬를 새기고 여기에 백토나 흑토를 메워 넣어 표면을 고르게 한 다음, 초벌구이를 하고 다시 유약을 발라 구운 것이다. 이와 같은 상감 청자는 고려 사람들의 창의력과 세련된 문화 생활을 반영한 것으로, 대접, 술잔, 병, 항아리 등의 식기와 문방구, 향로, 화장 그릇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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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청자
고려 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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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에는 현화사 7층 석탑과 월정사 8각 9층 석탑이 유명하고, 부도에는 정토사의 홍법국사 실상탑과 법천사의 지광국사 현묘탑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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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
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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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으로는 관촉사의 석조 미륵보살 입상과 부석사의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 등이 있으나, 여기에 나타난 조각은 공예 분야와는 달리 통일 신라에 비해 예술적 솜씨가 뒤떨어진다.

고려에서는 일찍부터 궁중에 도화원을 설치하여 그림 그리는 사람을 양성하였다. 인종 때의 이영은 예성강도를 그려 송 휘종의 찬사를 받았고, 그의 아들 이광필도 산수화를 잘 그렸다.

글씨로는 문종 때의 유신, 인종 때의 탄연, 고종 때의 최우가 능하여, 신라의 김생과 함께 신품 4현으로 손꼽힌다.

학습 정리

1. 고려는 신분 사회였다. 귀족은 문벌을 중시하고 특권을 누렸으며, 농민과 천민은 생산과 노동에 종사하였다.

2. 호국 불교의 성격을 띤 고려의 불교는 국가 활동과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3. 고려의 교육은 유학과 과거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으며, 국자감을 중심으로 하는 관학과 더불어 사학의 활동이 활발하였다.

4. 고려 문화는 귀족 생활과 불교 신앙을 배경으로 하였는데, 그 문화재 중에는 세계적 자랑이 될 수 있는 것이 많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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