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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민족 문화의 융성

〔학습 개요〕

민족 문화는 민족의 슬기와 노력에 의하여 발전된다. 조선 전기에 이룩된 민족 문화의 발전은, 고려 문화의 유산을 정리하고 유교 정치의 이상을 달성하기 위한 다방면의 활동 속에서 이루어졌다. 학문의 발전은 물론, 과학, 기술, 미술, 음악에 이르기까지 민족 문화는 크게 피어났다. 특히, 훈민정음의 창제로 문자의 독립을 이룩하고, 우리글로 겨레의 슬기를 펼 수 있게 되었음은 큰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성리학은 중국에서 받아들인 것이나, 차차 학문적으로 소화되어 이황, 이이 때에는 우리 나라 유학으로서의 독특한 발전을 보았다. 이후 유교는 사회 생활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학습 문제

1. 조선의 문화 활동의 바탕이 된 사상은 무엇이며, 문화 활동을 주도한 사람들의 신분은 어떠하였을까?

2. 성리학은 어떠한 학문이며, 조선 성리학이 지니는 역사적 중요성은 무엇일까?

3. 조선 전기의 기술 문화가 발달을 보게 된 이유는 무엇이며, 자랑할 만한 기술 문화의 유산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

4. 유교적 양반 사회에서의 예술 활동은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였을까?

민족 문화의 발전

건국 후 차차 제도가 갖추어져 정치가 안정되는 한편, 농본 정책의 추진과 유교 정치의 이상을 이루고자 하는 노력이 여러 가지로 전개되어 국민 생활이 자리잡혀 갔다.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안정을 배경으로 고려의 문화를 폭넓게 계승, 소화하고, 그 바탕 위에 새로운 유교 문화를 받아들여, 민족의 슬기를 펴고자 하는 활동이 여러 모로 활발해져 민족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조선의 문화는 세종에서 세조, 성종 때에 걸쳐 크게 발달하였다. 이 시대의 민족 문화의 유산은 오늘날까지 우리 문화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조선 시대는 고려 시대에 비하여 문화 활동의 폭이 넓어지고, 또 새로운 문화 요소가 가미되어 문화적 기반이 확대된 점에서 고려 시대에 비해 보다 활발한 문화의 발전을 볼 수 있었다.

훈민정음

우리 나라는 오랜 역사적 전통을 지녔으나, 조선 초까지 우리의 고유한 문자를 가지지 못하여 한자를 써 왔다. 따라서, 훈민정음 창제는 조선뿐만 아니라 우리의 전 역사를 통해서 가장 자랑할 만한 문화적 업적이 아닐 수 없다. 훈민정음 창제로 우리는 비로소 독립적인 문자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만들 때, 우리 고유의 언어에 알맞으며, 자유로이 생각하는 바를 적을 수 있고, 배우기 쉬운 글자를 창제하기 위해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28자의 표음 문자로 된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세종은 새 문자로 용비어천가를 지어 보고, 이 글자를 실용하는 데 자신이 생기자, 창제한 3년 후에 드디어 세상에 반포하였다(1446).

훈민정음 서문

우리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서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할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할 사람이 많으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 여덟 글자를 만드나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히어 날마다 쓰기에 편하게 하고자 할 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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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현전 학사의 훈민정음 창제 모습
집현전 학사의 훈민정음 창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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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은 민족 의식과 민족애가 깃들여 있는,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우리 문자이다. 훈민정음의 창제는 당시 일부 양반의 반대를 받았으나, 이로써 우리의 생각과 뜻을 마음껏 펼 수 있게 되어 민족 문화 발전에 새로운 계기를 이룰 수 있게 되었으니, 그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우리 겨레는 우리 문자를 가지게 됨으로써 겨레의 감정을 우리글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으며, 시조와 가사 문학 등의 발달을 촉진시켜 국문학의 새로운 발달을 보게 되었다.

편찬 사업

초기의 국왕들은 학문 발달에 힘을 기울여, 역사, 지리, 법전, 예악에 관한 많은 도서를 편찬, 간행하였다. 특히, 세종에서 성종 때에 걸쳐 집현전이나 홍문관의 학자들이 옛 문화를 정리하여 여러 가지 책을 엮어 냈다.

경국대전, 치평요람 등의 정치 관계 서적과,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등의 역사책도 편찬되었다. 조선 초기부터 역대 국왕의 실록을 계속 편찬하여 네 곳의 사고에 보관하였다. 실록은 조선 시대의 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며, 우리 문화의 자랑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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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실록
조선 왕조 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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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정치에 필요한 지리 지식을 얻기 위하여 팔도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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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여지승람에 실린 팔도 총도
동국여지승람에 실린 팔도 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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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농업 기술서인 농사직설과 한방 의약서인 향약집성방도 편찬하여 국민 생활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유교적 예속 생활의 본을 보이기 위하여 국조오례의나 삼강행실도를 편찬, 반포하여 유교적 예의와 도덕, 풍속을 우리 사회에 뿌리를 내리게 하였다.

사림과 성리학

고려 말에 원을 통하여 우리 나라에 수입된 성리학은, 조선 시대 유학의 주류를 이루어, 정치, 사회, 교육과 윤리⋅도덕 생활의 기준이 되었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성리학을 다만 공자, 맹자의 가르침을 담은 학문으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성리학의 근본이, 인륜 도덕과 왕도 정치를 펴 유교적 이상 사회를 실현하는 데 이바지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태조 때의 정도전, 권근이나 세종, 세조 때의 신숙주, 양성지 등이 그 대표적인 학자들인데, 이들을 관학파라고 부른다. 관학파 학자들은 고려 시대의 학자들이 시문에 힘쓰고 경전의 해석에 골몰하던 것과 달리, 성리학을 연구하고 그것을 직접 정치에 실천하기에 힘썼다.

이들 관학파의 성리학자들과 달리, 정치를 멀리하고, 지방에 내려가 학문에 힘쓰고 제자를 키우는 일에 열심히 한 학자도 있었는데, 이들을 사림파라고 부른다. 사림파 학자들은 대개 길재의 학문을 이어받은 사람들이었다.

중국에서 전해진 성리학이 우리 나라 학자들에 의해 소화되고 마침내 우리 민족의 생각이 담긴 우리 학문으로서의 특색을 나타내게 된 것은 이황, 이이 등이 활동한 16세기 중엽 이후부터의 일이다.

이황과 이이

조선 시대 성리학자로 특히 학문적 공헌이 크고 또한 후세에 큰 영향을 남긴 사람은 이황과 이이다. 이들은, 조선 초기 이후 여러 학자들의 노력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조선 성리학을 한층 더 연구하여, 성리학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 놓았다. 그들은 조선 성리학의 쌍벽으로서, 뛰어난 학자이며, 많은 제자를 키운 교육자이기도 하다.

이황은 고향인 경상도 예안에 도산 서당을 세우고 학문 연구에 힘써 성리학 관계의 많은 책을 지었다. 그리고, 유성룡 등 고명한 제자를 길러 내어 영남 학파의 스승으로 받들어졌다. 그의 저서는 뒷날 일본으로 전해져 일본 유학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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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서원
도산 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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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이는 정치에 관계하면서도 많은 책을 지었고, 교육에 크게 관심을 가져 김장생 등 여러 학자를 길러 냄으로써 기호 학파의 스승으로 받들어졌다. 뿐만 아니라, 국방 문제를 근심하여 10만 양병설을 주장하는 등 여러 방면에 공헌한 바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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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헌
오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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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서원은 성리학의 지방 전파와 지방의 학문 활동을 활발하게 하였다.

서원은 옛 학자를 받들어 제사지내고, 그 덕을 따르고자 세운 지방 교육 기관으로, 이 곳에서는 지방 유생들이 모여 독서와 강학에 힘썼다. 지방 선비들은 서원에 모여 성리학을 연구하고, 또 후진을 교육하여 그들의 학통을 이어 나갔다.

이처럼 서원이 학문 연구와 교육 활동을 통해 성리학과 지방 문화 발달을 이끌어 나가게 되자, 국가에서는 서원에 이름을 지어 내리고 노비와 전답을 나누어 주는 사액 서원 제도를 실시하여 서원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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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 서원
소수 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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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각 지방의 선비들이 여러 곳에 서원을 마구 세워 이곳을 중심으로 당쟁이 격화되기도 하고, 지방 사회에서 세력을 부리는 일도 생겨났다.

성리학이 지방에 뿌리를 내리게 된 중종 이후, 유교적인 정신을 담은 자치적 규약인 향약이 각지에서 조직,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향약의 시행으로 유교적 예의 풍속은 점차 지방 사회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과학 기술

고려 후기에 전해진 중국과 아라비아의 과학의 소화와, 세종 때를 전후한 활발한 창조적 노력에 따라 조선의 과학은 큰 발전을 하였다.

신라 이래의 전통을 이어 서운관(후의 관상감)을 설치하여 천문을 맡아 보게 했으며, 측우기, 간의, 해시계, 자격루 등의 관측 기구를 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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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체 관측 모습(세종 대왕 기념관 소장 기록화)
천체 관측 모습(세종 대왕 기념관 소장 기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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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측 기구 중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측우기였다. 1442년, 전국 각지에 측우기를 설치하고 강우량을 측정하여 농업에 도움을 주었는데, 이것은 서양보다 200여 년이나 앞서 실시된 일이다. 이러한 과학 기구의 제작에는 장영실, 이천 등의 공이 컸다. 또, 세조 때에는 인지의를 제작하여 토지 측량에 이용하였다.

국초에 편찬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고려 때부터 활발했던 인쇄술은 더욱 발달하였다. 태종 때에 주자소를 설치한 후 금속 활자의 개량이 거듭되었다.

한의학에도 많은 발전이 있었다. 여러 가지 한의학 서적이 편찬되었는데, 향약집성방, 의방유취 등이 유명하다.

미술과 공예

조선의 예술 활동은 고려와는 달리, 유교 생활에 바탕을 두어 양반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국가적 필요에서 도화서를 두고 전문적 화가를 배치하여 인물화나 기록화를 그리게 하였다. 대체로, 조선 시대의 회화는 양반의 취미에 맞는 산수화를 비롯하여 인물화, 화조화, 사군자 등이 대부분이다. 화가로는 화원 출신의 안견, 최경, 이상좌와, 양반인 강희안 등이 유명하였다. 양반들은 스스로 글을 쓰고 산수화 등의 그림을 그리는 교양을 쌓았다. 서예가로는 세종 때의 안평 대군과 선조 때의 한호가 명필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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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도원도
몽유도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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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권의 권위를 자랑하기 위하여 화려하고 웅장한 궁성과 도성의 문루를 건축하였으나, 왜란으로 대부분 불타 버리고, 현재 그 모습을 전해 주고 있는 것은 숭례문 등 몇 개에 불과하다. 서울 파고다 공원의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석탑 건축물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조선 초기의 대표적 공예품은 자기이다. 조선의 자기는 귀족적인 맛이 풍기는 고려의 것과는 달리, 힘차고 소박한 가운데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분청 사기와 깔끔하고 세련된 백자가 각지에서 생산되었다.

음악과 오락

조선은 국초부터 궁중의 음악을 담당하는 관청을 설치하였다. 특히, 세종은 악기 제조, 악곡 정리 등을 통해 중국과 다른 궁중 음악의 자주화에 힘써 마침내 아악을 대성시켰다. 이 일에는 박연의 공헌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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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악 연주 모습
아악 연주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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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음악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인 악학궤범도 이 무렵에 간행되었다.

궁중 음악과 함께 민간에서는 민요 등의 속악이 자라났다. 또, 궁중 음악의 필요에서 궁중 무용이 발달했으며, 민간 사회에서는 농악, 무당춤, 승무 등 민속 무용이 유행하였다.

한편, 산대도감극이라는 가면극과 꼭둑각시놀음이라는 인형극도 차차 자라났다. 이것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민중 사이에 널리 퍼져서 많은 사람들이 즐겼다.

학습 정리

1. 조선은 정치적 발전과 사회적 안정을 바탕으로 하여 창조적 문화 활동이 활발하였다.

2. 유교적 왕도 정치의 실현을 위한 노력이 전개되면서 민족의 슬기가 발휘되어, 민족 문화의 큰 발달을 보았다.

3. 다양한 문화 활동이 전개되면서 성리학의 영향은 여러 면에 작용하였고, 한편 실용적인 과학과 기술의 발달도 있었다.

4. 세종에서 성종 때에 이르는 기간은 조선의 문화 활동이 가장 활발하였던 시기로, 많은 문화재를 후세에 남길 수 있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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