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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외침의 극복

〔학습 개요〕

조선은 국초부터 일본에 대해서 평화로운 통상의 길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무역 활동에 따른 제한에 불평을 품고, 해안 지대에서 자주 소란을 피웠다. 일본은 장기간의 내란이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통일되자, 조선에 대한 무모한 침략전을 일으켰다. 7년간에 걸친 임진, 정유의 왜란으로 우리 나라는 큰 고난을 겪었다.

국난을 당하여 온 겨레는 침략에 대항하여 싸웠다.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과 다시 편성된 관군, 그리고 수군의 용전으로 마침내 외침을 극복하였다.

그러나, 왜란의 상처가 미처 아물기도 전에 만주의 새 지배자로 등장한 여진족의 침략을 두 차례나 받았다. 남과 북으로부터의 외세의 침략으로 우리 나라는 크나큰 피해를 입었다. 뿐만 아니라, 그 상처는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 남았다.

학습 문제

1. 임진왜란 전에 우리 나라와 일본의 관계는 어떠하였을까?

2. 왜란이 일어난 원인은 무엇이며, 우리 겨레는 어떻게 이 국난을 극복하였을까?

3. 왜란, 호란은 우리 나라와 주변의 국가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까?

임진왜란

국초에, 일본인이 무역을 할 수 있게 3포를 개항해 주었다. 그러나, 점차 이 곳에 일본인 거주자가 생겨나 폐단이 일어나게 되자, 이들의 무역 활동을 제한하는 계해약조를 맺었다. 이러한 제한에 불만을 품은 일본인들이 때로 3포에서 난을 일으켰고, 남해안을 노략질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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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교역선
일본의 교역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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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일본인들의 거듭되는 난동으로, 마침내 우리 나라는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끊어 버렸다.

일본은 15세기 중엽부터 오랫동안 내란에 시달리고 있었다. 100여 년 간의 내란을 통일하고 실권을 잡은 인물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였다. 그는, 자신에 대한 불평 세력의 관심을 국외로 쏠리게 하고, 아울러 자신의 침략적 야심을 펴기 위해, 명으로 가는 길을 빈다는 터무니없는 구실을 내세워 우리 나라를 쳐들어왔다(1592).

일본은 내란기를 겪으면서 단련된 무예와 새로 도입한 조총으로써 활과 창칼로 대항하는 우리 나라에 침략을 감행했다.

그간 거듭되는 당쟁으로 혼란하던 우리 나라는, 일찌기 왜국의 야심을 알아채고 국방을 튼튼히 해야 한다는 이이의 주장마저 물리치고 국방을 소홀히 해오다가, 불의의 국난을 겪게 되었다.

왜군의 침략을 맞아 부산과 동래에서 정발, 송상현 등이 힘껏 싸웠으나, 이를 물리치지 못했다. 충주의 방어선도 무너져 마침내 서울이 적군의 수중에 들어가고, 적의 선봉 부대는 평안도와 함경도에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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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성 전투도
부산성 전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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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항전

위기에 처한 우리 겨레는 밀리면서도 굴하지 않고 줄기찬 항전을 벌였다.

침략군의 손길이 북쪽에까지 미쳤으나, 이순신이 이끄는 우리 수군은 거북선을 앞세워 옥포, 사천, 당항포, 한산도 앞바다 등 여러 곳에서 왜의 수군을 무찔러 침략하는 왜군과 일본과의 연락로를 차단하는 한편, 서해로 침범하려는 왜군의 야심을 꺾어 호남 지방의 군량과 국민을 확보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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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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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왜군이 점령하고 있던 후방 각지에서는 유생과 고승들이 나라의 위기를 구하고자 의병을 일으키니, 민중들도 이에 가담하여 무기를 들고 싸웠다.

의병은 국가의 위기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스스로 목숨을 내걸고 싸운 의용군이었다. 이들은 각지에서 왜군을 기습하고 점령지를 교란하는 등 왜군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의병 활동은 경상도에서 곽재우에 의해 시작되었다. 조헌은 승병장 영규와 700 의사를 거느리고, 밀려드는 왜적과 싸우다 금산에서 모두 전사했다. 이 밖에도 각지에서 의병 부대가 활약을 하였고, 승병들도 눈부신 활동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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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병들의 활동(민족 기록화)
승병들의 활동(민족 기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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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들의 활동(민족 기록화)
의병들의 활동(민족 기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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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의 의병 궐기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 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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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한때 흩어졌던 관군도 의병 부대와 연락을 취하면서 반격에 나섰다. 김시민은 진주성을 끝내 지켰고, 권율은 적군의 전라도 침략을 꺾었으며, 그 후 북상하여 행주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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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대첩(민족기록화)
행주대첩(민족기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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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의 싸움과 달리, 명군의 원조와 우리 겨레의 다각적인 항쟁으로 전세가 날로 왜군에게 불리해지자, 이에 당황한 왜군은 명의 화의 제안을 빙자하여 남해안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정유재란

3년을 두고 끌어오던 화의 교섭이 결렬되자, 왜군은 다시 북침을 재개하니, 이를 정유재란이라 한다.

그러나 이 때에는, 우리 관군과 의병도 준비를 갖추고 있었고, 또 명의 원병도 곳곳에 진주하고 있어서 왜군을 막을 수 있었다. 다만, 왜의 수군은 그들의 이간책으로 한때 이순신이 물러난 틈을 이용하여 우리 수군을 격파하여 기세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시 이순신이 기용되어 뛰어난 작전으로 명량에서 왜의 수군을 격멸함으로써 본국과의 연락로를 위협하였다.

이에 왜군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언을 핑계삼아 달아나려 하였다. 이순신은 이를 노량에서 대파하고 전사하였다. 이로써 왜란은 끝을 맺게 되었다.

7년간에 걸친 국난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순신, 권율, 김시민 등 명장의 뛰어난 지휘력과, 거북선과 우수한 성능을 가진 화포, 곽재우, 고경명, 정문부 등의 명장들의 활약과, 의병이나 관군으로 싸운 무명의 군졸과 농민들의 불타는 애국심, 그리고 싸움터에 직접 뛰어들었던 부녀자들의 노고가 한데 어울린 온 국민의 총력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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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의 장군 기념비
홍의 장군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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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의 영향

왜란으로 우리 나라가 입은 인적, 경제적, 문화적 손실은 엄청났다. 일본으로 납치된 동포들 중에는 노예로 멀리 동남 아시아에까지 팔려 간 사람도 있었다.

농토는 황폐하여, 왜란 전 약 150만 결이나 되던 토지가 왜란 직후에는 약 50만 결로 줄어들었다.

이 전쟁을 통하여 우리 겨레는 민족 의식의 강화를 가져와 일본에 대한 민족적 감정이 오래도록 풀리지 않게 되었다. 한편, 이순신과 여러 의병장에 대한 국민의 존경심은 대단하여, 그들을 모시는 사당이 여러 곳에 세워지게 되었다.

무모한 전쟁을 일으켰던 일본도 많은 인명을 잃었고, 국민들도 큰 고통을 받게 되어, 토요토미 정권에 대한 불평이 폭발하여 토쿠가와 집안에서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약탈된 우리 문물은 일본 문화 발전에 큰 혜택을 주었다.

즉, 납치한 조선 성리학자를 통해 성리학을 배웠고, 도자기 기능공을 통해 우리 나라의 발달된 도자기 공예 기술이 전해져 일본 도자기 공예에 새 역사가 열렸다. 또, 많은 서적과 금속 활자를 빼앗아가 많은 책을 만들어 내어, 일본 문화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한편, 많은 군대를 동원하여 우리 나라를 도운 명은 그 부담이 커 국력이 쇠약해졌고, 불평 세력들의 반란이 국내 각지에서 일어났다. 이러한 때를 이용하여 만주의 여진족이 명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처럼 왜란은 동북 아시아의 역사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통신사

왜란으로 일본과의 국교가 단절되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토요토미 정권을 타도한 후, 에도(토오쿄오)에 막부를 설치하고 일본의 통치권을 장악한 다음, 우리 나라와의 국교 회복을 열망하였다. 그는 납치해 간 사람을 돌려 보내는 등 성의를 다하며 다시금 교린 정책을 취해 줄 것을 요청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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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운대사가 일본인에게 써 준 시문
송운대사가 일본인에게 써 준 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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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에서도 이웃 나라와 교린을 하고자 하는 국초부터의 원칙을 살려, 토쿠가와 정권과의 교린을 재개하였다.

그리하여, 교린 정책의 정신을 살려 기유약조를 맺고, 일본의 요청에 의해 통신사를 파견하고, 일본 배들이 부산항을 드나들며 교역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 주었다.

통신사는 약 500명으로 편성되었는데, 일본의 정중한 대접을 받으며 왕래하였다. 통신사의 왕래를 통하여 정치적 관계가 이루어지고 양국 간의 문화 교류도 활발하였다. 우리 나라 사신이 일본에 상륙하여 에도에 이르는 도중에 일본의 학자, 예술인 등이 찾아와 우리의 문물을 배우고자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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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의 조선 통신사의 행렬
일본에서의 조선 통신사의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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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의 무역도 행해졌다. 우리 나라에서 해마다 많은 면포가 일본으로 나가고, 일본에서는 구리가 들어왔다. 담배, 고추, 토마토, 고구마 등도 이 무역을 통해 우리 나라에 전해졌다.

병자호란

왜란으로 명의 세력이 쇠약해지자, 만주 각지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이 명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누루하치는 여진족을 통일하고, 광해군 때에 후금을 건국하였다(1616).

조선은 국초부터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살던 여진족에 교린 정책을 써 왔으나, 후금의 건국을 전후해서는 북방의 새로운 세력에 대해 새 정책을 펴야 했다.

광해군은 도성 주변의 산성을 손질하고 국방을 강화하였다. 한편, 명이 후금을 치고자 조선에 협력을 요청해 왔을 때, 조선은 군대를 출동시키기는 하였으나, 전투에는 적극성을 띠지 않는 중립적 작전을 폈다.

인조 반정으로 광해군이 물러나고 인조가 즉위하게 되었다. 이 때, 이괄의 난 등이 일어나 사회가 혼란해지자, 기회를 노리고 있던 후금은 우리 나라를 침략하였다.

왜란이 끝난 지 30년 만에 조선은 다시금 전란을 겪게 되었다. 후금의 침략을 받아 정충신의 항전과 정봉수, 이입 등의 의병 활동이 있었다. 그러나, 황주까지 침략하였던 후금군은 우리 나라와 강화를 맺고 만주로 물러났는데, 이 전쟁을 정묘호란이라 한다(1627).

정묘호란 후, 내몽고 지배에 성공한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치고, 우리 나라에 대해 군신의 예를 요구하며 다시 침략해 왔다. 청군의 침략을 받은 우리 나라는 남한산성에서 45일간에 걸친 항거전을 폈으나, 결국 청과 강화를 하고 국교를 맺게 되었다. 이 전쟁을 병자호란이라 한다(1636).

북벌론과 나선 정벌

두 차례의 침략을 받았던 우리 겨레의 반청 정신은 매우 높았다. 청에게서 당한 부끄러움을 씻기 위해 임경업과 같은 장군은 꾸준한 반청 군사 작전을 폈고, 효종 때에는 송시열, 이완 등이 북벌론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청은 만주와 중국 본토를 지배하는 강국이 되었기 때문에 청에 대한 사대적 관계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청과 국경 호시장을 열고, 사신을 청에 자주 파견하여 정치적 관계를 두터이하며, 경제, 문화 교류에 힘썼다.

1650년에는 만주 북부 흑룡강 부근에, 꾸준히 동방 침략을 꾀하던 러시아 세력이 나타났다. 이 때, 청의 요청으로 우리 나라는 두 차례에 걸쳐 조총 부대를 출동시켰는데, 이것을 나선 정벌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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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선 정벌
나선 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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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변화의 움직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우리 민족이 겪은 시련 중에서도 큰 것이었으나, 우리는 이 시련을 잘 이겨 낼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그 피해를 복구하여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종래에 소홀한 감이 있었던 국방을 튼튼히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정부에서는 여러 가지 개혁을 추진하게 되었다. 또, 학자들 중에는 학문의 연구가 국민의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의견을 가지고 연구하는 사람도 나왔다. 이에 따라 국민 생활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개혁과 학문 연구의 새 움직임은 조선 사회가 전반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하게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학습 정리

1. 조선은 국제 평화를 유지하고 국가 실리를 얻기 위해 교린 정책과 사대 외교를 폈다.

2. 양반 사회의 분열과 대립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은 외세에 침략의 기회를 주게 되어, 외침을 당하게 되었다.

3. 왜란이 일어나자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 이순신이 이끈 수군, 재편된 관군의 전투 등 온 국민이 벌인 구국 항쟁으로 마침내 이를 극복했다.

4. 왜란에 뒤이은 호란으로 북방 민족에 대한 경계심은 오래도록 남아 있었으나, 청이 중국 대륙을 지배하게 되자, 한말까지 국교가 유지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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