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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Ⅰ. 조선 사회의 새 동향
  • 2. 경제 성장과 사회 안정

2. 경제 성장과 사회 안정

〔학습 개요〕

영⋅정조의 중흥 정치로 정치 질서가 바로잡히면서 사회가 안정되기 시작했다. 또, 농업 기술의 발달, 수리 시설의 건설, 특용 작물의 재배 등으로 농업 생산이 증가되어 농민 중에는 넉넉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 늘어 갔으며, 이에 따라 일부 농민의 지위가 점차 향상되었다.

한편, 자유로운 수공업 활동이 자라나고, 상인과 공인의 활동으로 서울과 각 지방의 장시를 중심으로 하여 상거래가 활발해졌다. 이러한 경제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화폐가 전국적으로 유통되었으며, 여러 가지 경제 조직이 생겨났다.

그리고, 여진족 및 일본과 극히 제한된 교역을 행해 오던 무역 활동도 활발해졌으며, 서울과 개성을 비롯한 각지의 상인들이 활발한 교역 활동을 펴서 큰 부를 이루게 되었다.

학습 문제

1. 조선의 부흥과 민생의 안정을 위한 경제적 노력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2. 조선 전기에 비해 후기의 상공업 활동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3. 장시는 농촌 생활에서 어떠한 구실을 했으며, 상거래를 뒷받침하기 위한 경제 조직에는 어떠한 것이 있었을까?

이앙법과 상업 작물

18세기에 이르러 정치가 안정되면서 정부에서는 농업의 발달을 위해 여러 가지 권농책을 폈다. 수리 시설을 늘리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토를 넓히는 한편, 삼림 보호에 힘썼다. 또, 새로운 농사 기술을 보급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농서를 펴내기도 하였다.

한편, 쌀과 보리를 번갈아 수확할 수 있는 2모작이나, 모판에서 모를 길러 모내기를 하는 이앙법, 그리고 농사에 비료를 이용하는 법 등 향상된 농업 기술은 농업 생산을 크게 늘렸으며, 농촌 경제의 발전을 도왔다.

인삼, 담배 등 특용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의 일이다. 원래 인삼은, 자연 삼(산삼)을 공납으로 바쳤는데, 조공과 약재로 수요량이 늘어나는 반면에 자연 삼은 줄어들어, 자연 삼을 공납으로 바쳐야 하는 백성들의 고통이 매우 컸다. 그러나, 정조 때부터 인삼 재배가 보급되어 큰 도움을 주었다.

농민들은 담배, 인삼 등 특용 작물이나 무명, 삼베, 비단 등 가내 수공업품을 장에 내다 팔아 필요한 생활 물자를 사들이는 교환 경제의 방법을 활용하였다. 한편, 감자나 고구마 등도 전해져 재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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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 생산이 증가됨에 따라 농민들 중에는 많은 농토를 경작하는 부농이 생겨 났는가 하면, 농토를 가지지 못하고 머슴살이를 하거나 농촌을 떠나는 사람들도 나오게 되었다.

향약과 두레

조선 후기의 농촌 사회에는 서로 도우며 살아가기 위한 자조 조직이 발달하였는데, 향약, 두레나 계가 그러한 조직이었다.

향약은 본래 중국에서 기원한 것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이미 중종 때에 시도된 바 있었다. 그 후, 이황, 이이 등이 우리 나라 사정에 알맞게 향약을 고쳐 실시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한 향약이 농촌 사회에 널리 시행되었다.

착한 일을 서로 권하며, 좋은 풍속을 키워 나가고, 서로 도우며 살자는 내용을 담은 향약은, 농촌 사회에서 그 지방의 양반들이 중심이 되어 자치적으로 실시되던 조직이었다. 그러나, 향약은 양반을 중심으로 하여 조직, 운영되었으므로, 자연히 농민의 이익보다는 유교적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는 양반 계층의 이익을 중심으로 운용되었다.

향약의 4대 절목

1. 덕업을 서로 권함〔德業相勸〕.

2. 과실을 서로 경계함〔過失相規〕.

3. 예속으로 서로 사귐〔禮俗相交〕.

4. 환난을 서로 도와 줌〔患難相恤〕.

이에 비하여, 두레는 농민 중심의 농촌 자조 조직으로, 주로 경기 이남의 농촌에서 조직, 운용되었다. 두레는 협동 노동, 상호 부조, 공동 오락 등을 목적으로 한 촌락 단위의 조직으로, 농사철에는 서로 협조하여 농사에 힘썼고, 즐거운 때에는 여러 가지 놀이로 같이 즐겼다. 두레마다 깃발을 가졌고, 때로는 이웃의 두레와 여러 가지 경기를 가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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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레와 농악
두레와 농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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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는 농민들만의 것이 아니었으며, 여기에는 친목을 목적으로 한 것, 상호 부조를 목적으로 한 것, 동업자의 이익과 권리를 지키기 위한 것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민영 수공업

조선 초기에는 수공업 기술자들이 관청에 속하여, 국가의 통제를 받으며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수공업품을 제조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18세기에 이르러 정치와 사회가 안정되고, 농업 생산이 증가하면서 수공업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다. 또, 대동법을 실시한 후로 국가에서 필요한 물자를 공인들을 통해 조달하게 되자, 공인들의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수공업품의 생산도 활기를 띠었다.

조선 후기의 수공업 활동은, 관청에 속해 있던 관영 수공업보다 도시에서 자유로이 생산 활동을 펴 오던 민영 수공업 활동이 더욱 성장한 데 그 특색이 있다.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를 관청 소속의 수공업자에게 생산하게 하는 것보다 민영 수공업자들에게 생산하게 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유리하였던 것이다. 도시의 수공업자들은 자유로운 생산 활동을 했으며, 국가에 대해서는 장인세라는 세금을 부담하였다. 그들은 필요에 따라 공인 자본의 뒷받침을 받아 큰 규모의 주문 생산을 할 정도로 활발히 생산 활동을 폈다.

주요 생산품은 유기, 나전 칠기, 자기, 종이, 모시, 죽세공품과 농기구 등이었다.

자유 상인

조선 전기의 상업 활동은 국가의 통제를 받았다. 서울에서는 시전 상인이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납품하면서 정부의 보호 아래 번영을 누렸으나, 그 밖의 상인들의 활동은 부진하였다. 시전 상인들은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납품하는 댓가로, 일정한 지역이나 일정한 물품에 대한 독점권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와서 사회가 안정되면서 산업 활동도 성장하게 되었다. 특히 대동법을 시행함에 따라 국가가 필요한 물자를 자유롭게 사들이게 되자, 상업 활동이 보다 활발해졌다. 그리하여, 상인들의 활동도 점차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었다.

국가에서는 시전 상인들에게, 그들과 같은 상품을 취급하는 자유 상인들을 단속하는 권한인 금난전권을 보장해 주었는데, 이는 소비자와 생산자, 자유 상인 모두에게 손해를 주는 것이어서 말썽이 자주 일어났다.

그리하여, 정조 때에 와서는 활발해지는 상업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육의전 외의 모든 시전 상인들의 금난전권을 폐지하였고, 자유 상인들은 보다 자유로운 활동을 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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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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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패 시장도(남대문 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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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와 공인

15세기 후반부터 발생하기 시작한 지방의 장시는 후기에 들어 농촌 각지에 생겨났다. 그리하여, 18세기 중엽에는 정기적으로 장이 열리는 장시가 전국에 1천여 개나 되었다.

지방의 장시는 교역의 장소이면서, 농촌 사회의 사교장이나 오락장의 구실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조선 초기부터 소규모로 생활 일용 잡화를 가지고 각지로 행상하던 보부상이,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는 지방 장시를 돌면서 활발한 상업 활동을 폈다. 이들 보부상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조직을 가지고, 상업적 이득과 함께 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위한 노력을 폈다.

한편, 대동법의 실시로 공답이 미곡으로 통일되자,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를 조달해 주는 공인이 생겼다. 공인은 국가로부터 댓가를 받고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물자를 전국 각지에서 사들여 관청에 납품하는 상인이었다. 이들은 여러 가지 유리한 조건으로 활동을 펴 많은 이득을 보았는데, 조선 후기의 상업과 수공업은 이들의 활동으로 크게 자라날 수 있었다.

화폐와 금융

상업 활동과 교역 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물물 교환이나 쌀과 포목을 교환의 매개로 삼는 불편한 교역 방법이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조선 초기부터 일부 사용되어 오던 화폐가 널리 유통하게 되었다.

이미 인조 때에 동전이 만들어진 일이 있었는데, 17세기 말 숙종 때 이후로는 전국적으로 상평통보가 유통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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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평통보
상평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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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 활동이 활발해지고 수공업품의 생산이 늘어남에 따라, 경제 활동을 보다 편리하게 하기 위한 여러 가지 금융 조직이 생겨났다. 시장에는 거간, 감고, 전당업자 들이 생겨 거래에 편리를 주었고, 객주나 여각과 같은 숙박 시설과 위탁 판매 조직도 생겨났다. 또, 상인들의 상업 규모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어음 제도도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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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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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무역

조선은 원래 외국과의 무역 활동을 정식으로 펴지는 않았다. 다만, 중국과는 사신들의 왕래를 통하여 국가 간에 필요로 하는 물자를 조달하였으며, 또 교린 정책에 따라 일본이나 여진의 청을 들어 생활 물자를 교역하는 정도였다.

17세기 이후에 와서 국내 상업이 발달하고 청, 일본과의 외교 활동이 빈번해지면서 자연히 무역 활동이 늘어났다. 청과는 공적 무역 활동으로 개시 무역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사신이 왕래하는 기회에 상인들에 의해 후시 무역이라는 사무역 활동이 이루어졌다. 일본과는 왜관 개시를 통한 무역 활동이 이루어졌다.

청과의 무역에는 개성, 평양, 의주의 상인들이 종사하였다. 특히, 국내 상업과 국제 무역에서 송상이라고 불리는 개성 상인들의 활동이 컸다. 그들은 각지에 송방이라는 조직을 두고 활동했으며, 송도 사개 부기라는 독특한 상품 거래 장부를 고안하여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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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무역지와 상업 활동
조선 후기 무역지와 상업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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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증가와 도시

산업 활동이 활발해지고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농촌 인구가 증가되는 한편, 일부 농촌 인구가 지방의 시장 도시나 교통 요지로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지방 도시가 성장하게 되었다.

농촌의 인구와 도시의 인구는 다 같이 뚜렷한 증가를 보였다. 당시의 인구 조사는 오늘날과 같이 철저하지 못하여 정확한 것은 아니었으나, 기록에 의하면 순조 초의 전국 인구는 750여 만 명이었다 한다.

조선 후기의 전국 호구 수
연도 홋수(호) 인구(인)
1675(숙종 원년) 1,250,298 4,725,704
1699(숙종 25년) 1,333,330 5,774,739
1726(영조 2년) 1,614,598 6,761,226
1750(영조 26년) 1,679,460 7,035,400
1777(정조 원년) 1,715,371 7,238,522
1801(순조 원년) 1,757,973 7,513,792

학습 정리

1. 영⋅정조 때 중흥을 위한 여러 가지 정책에 힘입어 우리 나라는 경제 생활의 발전을 보았다.

2. 농본⋅중농 정책의 적극 추진으로 농업 생산이 증가되고, 농촌 사회는 협동에 의해 경제 생활이 넉넉해졌다.

3. 공인과 상인의 활동, 국제 무역의 발달 및 수공업의 성장으로 화폐 경제가 발달하였다.

4. 정치와 사회의 안정, 그리고 경제 활동의 성장을 바탕으로 인구가 늘고 도시가 성장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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