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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Ⅰ. 조선 사회의 새 동향
  • 3. 학문 활동의 새 기운

3. 학문 활동의 새 기운

〔학습 개요〕

17, 8세기에 이르러 흐트러진 사회 질서가 바로잡히고, 산업의 진흥에 의해 국민의 경제 생활이 넉넉해지면서, 민족 문화를 바로 이해하려는 새로운 학문 활동으로 실학 운동이 일어났다.

실학은, 양반 사회가 많은 모순들을 드러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타개하지 못하고 실생활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이론에만 치우치던 당시의 성리학에 대한 비판을 바탕으로 하여 일부 학자들 사이에 서서히 자라온 새 학풍이었다. 이와 같은 새로운 학풍의 조성으로 영⋅정조 때에 많은 실학자들이 활발하게 학문 활동을 펴, 자랑할 만한 학문적 성과를 거두었다. 오늘날, 이 실학 운동은 자주적이고 발전적인 역사의 전개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이 무렵, 대륙으로부터의 서양 문물의 도입과 함께 이를 연구하려는 학자들이 생기게 되어, 조선 사회에는 더욱 새로운 기운이 감돌게 되었다.

학습 문제

1. 실학 운동이 일어나게 된 역사적 배경과 실학 사상의 성격은 어떠한 것일까?

2. 실학자들의 학문적 성과에는 어떠한 것이 있고, 그것은 우리 역사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일까?

3. 서양 문물은 어떻게 도입되었으며,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이를 어떻게 대했을까?

학문의 새 동향

조선 전기의 학문은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중국에서 전해진 성리학은 조선 전기의 여러 학자들의 노력으로 학문적 위치를 굳혔다. 그 후 성리학은, 이황, 이이의 연구 활동에 의하여 조선 성리학으로 독특한 깊이를 가지게 되었다.

당시의 학자들은 벼슬을 하면서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 학자들은 성리학에 열중한 나머지, 성리학만이 옳고 그 밖의 다른 학문은 모두 그르다는 배타적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불교는 물론, 같은 유학의 계통이지만 그 흐름이 다른 양명학마저도 배척하였다. 또, 기술학도 천한 것으로 여겨서 학교에서 교육하지 않고, 그 기술학을 필요로 하는 관청에서 교육하게 하였다. 당시의 이러한 경향은 자유롭고 실용적인 학문의 발달을 방해하였다.

이러한 학문 활동에 대하여 반성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왜란, 호란을 겪은 후부터의 일이다. 파괴되고 혼란한 사회를 재건하고 바로잡기에 성리학은 적합하지 못했던 것이다. 즉, 자유로운 학문 활동을 억누르고, 이론과 생각의 깊이만을 내세우는 성리학은 현실의 어려움을 타개해 나가는 데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이러한 사회의 움직임과 성리학에 대한 반성에서 실학이 일어나고, 한편으로는 서학을 연구하는 학문 활동의 새로운 움직임이 고개를 들었다.

실학 사상의 발생

실학 사상이란, 조선 후기 사회의 성리학적 유교 사상과 양반 사회가 안고 있는 내부적 결점이 밖으로 나타나면서 생긴 사회적 모순을 바로 잡아 민생을 안정시킬 방도를 찾고, 또 우리 겨레와 우리 나라의 것을 알아야겠다는 사상이다.

즉, 자유로운 비판 정신을 터전으로 하여 학문을 연구하고, 그 성과를 실생활에 활용해야 하며, 민족 의식을 일깨우고, 실용적이며 실증적인 학문을 해야 한다는 사상이었다.

실학 사상이 일어나게 된 이유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

첫째, 왜란과 호란을 전후하여 표면화된 양반 사회가 안고 있던 결점과, 그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일반 백성들의 생활의 어려움을 바로잡아야겠다는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둘째,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주기에는 종래의 성리학이 부적합하였다.

세째, 따라서 새로운 시대 정신을 담은 학문 활동을 통하여 잘못된 사회와 제도를 개혁하고, 새 문화를 키워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게 된 선각자들도 유학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같은 유학자이지만 종래의 성리학적 유학자와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중국 중심의 생각에서 벗어나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고, 나아가 우리의 역사, 지리, 언어, 경제, 군사 등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날카로운 비판과 주장을 서슴지 않았으며, 또 양반보다도 백성 전체의 생활을 돕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연구하고 제시하기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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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사구시
실사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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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 사상의 성장

이수광은 세 차례나 사신으로 명에 왕래하면서 세상을 넓게 보고, 지봉유설이라는 책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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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봉유설
지봉유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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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대의 한백겸은 역사, 지리를 고증해 가며 깊이 연구하였고, 김육은 서양의 역법을 중국에서 배워 와 시헌력을 만들었으며, 대동법의 실시 지역을 확대시켜 이용 후생에 힘썼다.

실학 사상은 효종, 현종 때의 학자인 유형원에 이르러 그 폭이 더욱 넓어졌다. 그는 벼슬을 하지 않고 일생을 학문에 힘써 반계수록이라는 책을 지었다. 그는 이 책에서 종래의 전제, 관제, 명제 등 여러 가지 제도에 대하여 논하고, 그것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이 무렵, 박세당은 성리학을 날카롭게 비판하여 문제가 되었고, 홍만선은 농업과 의학을 연구하고 산림경제라는 책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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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경제
산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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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숙종, 영조 때의 학자 이익은 서양의 과학과 기술에도 흥미를 가지고 관찰, 연구하였다. 나아가, 당시 사회의 잘못된 점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개혁의 방법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일생을 학문에 힘쓰며 안정복 등과 같은 많은 제자를 키워 냈다. 그 제자들의 활동으로 영⋅정조 때에 실학이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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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사설
성호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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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 운동의 전성

영⋅정조 때는 실학의 전성기였다. 이 무렵, 실학자들의 학문적 관심은 청의 고증학이나 청에서 흘러들어온 서학에까지 미쳤다. 많은 실학자들이 각 방면에 걸쳐 학문적 성과를 남겼다.

성리학을 통한 유학보다 유학을 그 근본에서부터 다시 연구하고자 하는 경학의 연구에는 정약용, 성해응, 김정희 등이 활약하였다.

또, 유교 양반 사회의 사회적, 경제적 모순을 비판하며, 실생활에 이용되고 국민 생활을 넉넉하게 하기 위한 학문 활동에는 유수원, 서유구와 그 밖의 많은 학자들이 활동을 하였다.

이들 사회적, 경제적 개혁을 주장하는 학자들 중에는 농업을 보다 중시하고 토지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상공업 활동을 활발히 하고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농업과 더불어 상공업을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한 학자들은 청에서 선진 문명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들을 북학파라고 불렀다. 북학파 학자 중에는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이 유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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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헌연기
담헌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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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우리 나라의 역사, 지리, 언어를 연구하여 민족의 삶에 도움을 주어야겠다는 국학 연구 활동도 활발하였다. 역사 연구에는 안정복, 한치윤, 이긍익이 유명했고, 지리 연구에는 이중환, 금석학에는 김정희, 어문 연구에는 신경준, 유희, 농학에는 서유구, 어류 연구에는 정약전 등의 활동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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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문지
언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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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을 접대성한 학자는 정약용이었다. 그의 학문 활동은 정치, 경제, 사회에서부터 과학, 의학, 종교나 유학의 근본을 다시 밝히는 경학에까지 미치지 않은 분야가 없을 만큼 다양하였다. 그의 학문은 500여 권이나 되는 많은 저술에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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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심서
목민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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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의 의의

이상과 같이, 같은 실학자라 하여도 그들이 가진 관심이나 연구하는 분야, 그리고 추진하려는 개혁의 내용은 여러 가지로 나타났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비판과 그것을 개혁하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학문 활동이 실생활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생각 아래 학문에 힘쓰고 현실을 개혁하고자 했으나, 그들의 학문이 아직 성리학적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또 실제적인 정책에 영향력을 끼치기에는 어려운 위치의 관료이거나, 일생을 학문에만 힘써 정치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생각과 주장이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고 학문으로만 끝났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러한 실학 사상은 정약용 이후 이규경, 최한기 등 소수의 학자들에 의해 이어졌고, 그 후에 개화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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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남루 총서
명남루 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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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문물

선조 말경부터 명에 왕래하던 우리 나라 사신들을 통해 서양 문물이 전해졌다.

이미 임진왜란 때에 일본으로부터 포르투갈 사람인 세스페데스 신부가 남해안에 들어온 일이 있었고, 인조 때에는 네덜란드 사람인 벨테브레 일행이, 효종 때에는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착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 나라에 별로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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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 표류기
하멜 표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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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말에는 명의 수도에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들이 만든 세계 지도가 전해졌고, 그 후에 화포, 천리경, 자명종 등의 서양 과학 기구와, 천문, 역법, 지리에 관한 책, 그리고 한문으로 번역된 서양의 학술 서적인 서학서가 오랜 시일에 걸쳐 계속 전해졌다. 인조 때의 정두원이나 소현 세자에 의한 서양 문물의 도입이 그 한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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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명종
자명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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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여전도
곤여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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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되어 온 서양인들과 명, 청을 통해 꾸준히 도입된 서양 문물을 통하여, 조선의 지식인들은 그때까지의 중국을 중심한 아시아보다 더 넓은 세계와, 한문 문화와는 또 다른 새로운 문화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양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하였으며, 이에 따라 서양의 과학, 기술을 받아들이고 연구하려는 새로운 기운이 일어났다.

서학

선조 말 이 후 100여 년 간 서양 문물이 계속 전래되어 일부 학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효종 때의 김육이나 숙종 때의 이이명 같은 사람은 북경에 사신으로 갔을 때, 호기심을 가지고 서양인들을 찾아가 학문을 논하기도 하였다. 영⋅정조 때에는 우리 사신들과 서양인의 접촉이 더욱 활발해졌다.

실학을 깊이 연구한 이익은 누구보다도 서학에 대한 관심이 커, 여러 가지 한역 서학서를 읽고 서양 문물에 대한 학문적 이해를 깊이 했다.

이익의 강한 서학 연구열은 그의 여러 제자들에게 이어졌다. 이익의 제자인 실학자들 중에는 스승의 서학 연구열에 영향을 받아 서양의 과학과 기술, 그리고 윤리와 종교 관계 책을 구해 읽기도 하였다. 이에 이르러, 서학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하나의 학문으로 연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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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실의
천주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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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학을 연구함에 따라,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중국 문화만을 높이 여기던 생각이 흔들리게 되었다. 지리 지식의 확대와 함께 과학과 기술에 새로운 눈이 열리면서, 의식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따라서, 세계를 보다 넓게 보게 되었고, 실용성 있고 과학적인 학문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의식의 확대와 자아의 각성은 실학을 보다 활발하게 하였으며, 중국을 통해 서양의 과학, 기술을 받아들이자는 북학파를 출현시켰다.

학습 정리

1. 양반 사회의 모순이 확대되고, 성리학이 현실 사회와 동떨어진 데 대한 반성을 바탕으로 하여 실학 사상이 움텄다.

2. 실학은, 국가 재건과 민생 안정을 위한 중농적 제도 개혁, 상공업 활동의 진흥, 실용적인 기술의 도입 등을 주장하였다.

3. 현실을 바로 보고 우리의 것을 알자는 학문적 노력에 따라 국학 연구가 활발하였다.

4. 서양 문물은 사신과 그 수행원에 의해 중국으로부터 도입되었으며, 처음에는 호기심에서 가깝게 하였으나, 후에는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서학의 활동으로 자라났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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