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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Ⅱ. 근대화의 시련과 자주 운동
  • 2. 개화와 척사의 대립

2. 개화와 척사의 대립

〔학습 개요〕

흥선 대원군이 물러나고 민씨 세력이 들어서면서, 대외 정책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즉, 쇄국에서 개항으로 전환했던 것이다. 우리 나라로 침투할 기회만을 노리던 일본이 강력하게 통상을 요구해 오자, 1876년 강화도에서 조약을 맺게 되었다. 그 후, 미국을 비롯한 서양 여러 나라와 조약을 맺어, 우리 나라는 마침내 세계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외세의 침투에 대항하여 위정 척사를 부르짖는 세력이 대두됨에 따라, 국론이 개화와 척사로 엇갈려 정계에 혼란이 일어났으며, 침략적 야심을 품은 청과 일본의 대립으로 이 혼란은 더욱 격화되었다.

이러한 속에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학습 문제

1. 쇄국에서 개항으로의 정치⋅외교적 변화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2. 위정 척사 사상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3. 미국 및 서양 각국과의 조약은 어떻게 하여 맺어지게 되었을까?

4. 갑신정변은 어찌하여 일어났으며, 실패한 이유는 무엇일까?

강화도 조약

쇄국 정책을 강력히 펴 오던 흥선 대원군은 반대 세력에 의해 물러났다. 이어서 민씨 세력이 들어서자, 가장 먼저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 것이 대외 정책이었다.

19세기 중엽, 미국의 무력 외교에 굴복하여 개항을 하게 된 일본은 재빨리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 국가로 발전하게 되자, 외부로 눈을 돌려 우리 나라에 접근을 꾀하였다. 이 때, 흥선 대원군은 그들이 보낸 외교 문서의 형식 등이 이전과 다르다 하여 이를 거절하였다.

그 후, 흥선 대원군이 물러나자, 일본은 운요오 호 사건을 일으키고 다시 통상을 요구하였다. 이 무렵에는 이미 우리 나라에서도, 세계 정세의 변동을 깨달아 쇄국 정책을 버리고 여러 나라와 통상해야 한다는 의견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일본과 강화도에서 조약을 맺고(1876), 곧 이어 부산, 원산, 인천의 세 항구를 차례로 개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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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초지진 포대
강화도 초지진 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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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근대 지식에 어두웠기 때문에 강화도 조약은 우리 나라에 불평등하게 이루어졌고, 일본 정부에서는 서울에 공사관을 설치하면서 그 세력을 우리 나라에 침투시키고자 여러 방면으로 손길을 뻗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일본 세력의 침투에 불안을 느낀 청은, 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서양 여러 나라와 수교할 것을 우리 나라에 권고해 왔다.

한편, 국내의 일부 정치인들 중에는, 당시 러시아 세력의 침투에 대하여 그 위협이 커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국제 외교의 흐름을 이해하고, 우리 나라가 미국과 수교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먼저 미국과 국교를 맺게 되었는데(1882), 이것은 우리 나라가 서양의 나라와 국교를 맺은 최초의 일이다. 뒤이어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 여러 나라와 조약을 맺고 국교를 가지면서 우리 나라는 비로소 세계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개화 운동

오랫동안 굳게 닫혔던 쇄국의 문을 열고 세계 여러 나라와 교섭을 하게 된 우리 나라는 새로운 문물에 접하게 되었고, 발달된 서양의 근대 문명을 받아들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강화도 조약이 성립된 직후에 김기수를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하고, 이어서 김홍집을 파견함으로써 일본의 발전한 모습과 세계의 새로운 움직임을 알게 됨에 따라,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개화를 추진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 가게 되었다. 신사 유람단과 영선사의 파견 및 통리기무아문의 설치와 별기군의 조직이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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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수신사 행렬
제1차 수신사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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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 유람단은 박정양, 어윤중, 홍영식 등 젊은 관리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것으로, 일본의 여러 문물 제도를 시찰하고 오게 하였다. 그리고, 김윤식을 영선사로 삼아 학생들을 이끌고 청에 가서 근대 군사 기술을 배워 오게 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정책이 추진되자, 이를 맡아 처리하는 기구가 필요하게 되어 통리기무아문을 두었는데, 이것은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정치 기구였다.

한편, 우리 나라가 세계 여러 나라와 상대하게 되자, 우리의 국방력이 강해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별기군이라는 신식 군대를 조직하였다. 일본에서 들어온 새로운 무기와 새로운 훈련 방식으로 조직된 이 군대는, 양반의 자제들로 구성되었으며, 신식 군사 훈련을 실시하여 사관 생도를 양성하였다. 이러한 것은 모두 우리 나라의 개화를 위한 노력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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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식 군대의 훈련
신식 군대의 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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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와 척사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개화를 추진하려는 움직임에 대하여, 한편에서는 과거의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가지고 개화 운동을 반대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미 병인양요 때 이항로와 기정진 등이 개항을 반대하는 위정 척사론을 주장한 바 있었는데, 전국의 유생을 중심으로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개항이 이루어지고 정부에 의해 개화 운동이 추진되자, 유생은 또 다시 개화 반대의 상소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였다.

위정 척사론은, 서양 열강과 일본의 침략적 성격을 파악하여 그들의 침략을 막아 우리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민족 주체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문화는 우수한 것이고 서양이나 일본은 오랑캐이니 멀리하자는 입장이어서, 국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기도 하였다.

한편, 개항 이후 근대 문물과의 접촉이 활발해지면서, 새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우리도 하루바삐 근대 국가를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선각자들이 나타났다. 그 중심 인물은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인 젊은 정치가들로서, 이들은 일찍부터 개항을 주장한 바 있는 박규수, 유홍기 등의 영향을 받아 개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같은 개화론자이면서 서양 문물을 서서히 받아들이자는 온건 개화파가 있었다. 이들은 집권 세력인 민씨 일파와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로서, 민영익,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등이 이에 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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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집
김홍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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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위정 척사 사상, 급진 개화 사상, 온건 개화 사상 등의 여러 의견들이 대립하여 그것이 점점 심해지는 가운데,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이 일어나 우리 나라의 정치는 어지러워졌고, 이러한 속에서 청과 일본의 세력까지 끼여들어 서로 다투었다.

임오군란

임오군란은 개화론과 척사론의 대립, 민씨 세력과 대원군 세력의 갈등, 그리고 청과 일본의 세력이 얽힌 속에서 일어났다.

당시의 구식 군대는, 일본의 군제를 본받아 신설한 별기군과 차별 대우를 받고 있는데다가 적은 급료마저도 오랫동안 받지 못하여 곤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중, 모래와 겨 등이 섞인 쌀을 급료로 받게 되자, 쌓였던 불만이 폭발하였다(1882). 그들은 민씨 일파의 고관들을 죽이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였다. 이러한 변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흥선 대원군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이와 같이 혼란한 틈을 타 우리 나라에 세력을 펴고자 하는 청이 군대를 출동시켜 흥선 대원군을 잡아 가고, 민씨 일파로 하여금 다시 정권을 잡도록 하였으며, 외교 고문 등을 파견하여 우리 나라에 심한 간섭을 하였다. 한편, 정부는 일본과 제물포 조약을 맺어 군란으로 일어난 문제를 처리하였다. 이 조약에 따라 박영효 일행이 일본에 사절로 가게 되었는데, 이 때 그들은 우리 나라가 독립 국가임을 나타내고자 태극기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갑신정변

청의 지나친 내정 간섭과 또한 이에 호응하는 민씨 세력에 대항하여, 자주적 인 개화를 외치고 나선 것이 급진 개화파였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등은 근대화를 빨리 이룩하여 열강과 대등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비상 수단을 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마침내, 우정국 개설 축하연을 이용하여 반대 세력을 몰아 내고 정권을 잡은 후, 새로운 내각을 조직하고 14조에 달하는 정강을 발표하였다(1884). 그러나, 이 정변은 3일 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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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
김옥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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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게 된 것은, 급진 개화파와 온건 개화파 사이의 대립, 청의 간섭과 일본의 배신 등 여러 이유를 들 수 있겠으나, 근본적으로는 근대 국가 건설에 대한 국민적 자각이 없는 터에 소수의 선각자들만 성급하게 근대화를 서둘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일본의 후원을 과신한데다가, 청의 개입이 강했던 데도 원인이 있었다.

이와 같이 하여 정변은 실패로 끝났으나, 국제 간의 복잡한 문제는 더욱 얽혀졌다. 우리 나라와 일본 사이에는 정변의 뒤처리를 위해 한성 조약이 체결되었고, 청⋅일 사이에는 앞으로 두 나라가 우리 나라에 군대를 파견할 때에는 서로 사전에 문서로써 통고할 것을 약속한 톈진 조약이 체결되었다(1885). 이 조약에 따라 청⋅일 양국 군대는 우리 나라에서 물러났다.

학습 정리

1. 우리 나라는 세계 대세에 비추어 개항을 주장하는 선각자들이 있었으며, 강화도 조약을 계기로 하여 개항하게 되었다.

2. 개항 후 선진 문명을 받아들여 부강한 국가를 이룩해야겠다는 개화 세력이 자라났다.

3. 위청 척사 사상은 세계사의 흐름에 거스르는 성격을 띠고 있었으나, 외국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민족 의식이 담겨진 것이었다.

4. 개화와 척사의 대립은 마침내 임오군란, 갑신정변을 가져왔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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