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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민족 독립 투쟁의 전개

4. 민족 독립 투쟁의 전개

〔학습 개요〕

거족적인 3⋅1 운동은 일제의 야만적인 무력 탄압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일제는 보다 악랄한 방법으로 우리 민족을 착취하였다. 이러한 속에서도 우리 민족의 독립 투쟁은 국내외에서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중국 상하이에서는 민족 지도자들이 모여 대한 민국 임시 정부를 수립하여 국내외의 독립 투쟁을 이끌어 나갔고,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는 무장 독립군이 활약하였다. 국내에서도 산업, 교육 활동을 통해 민족의 힘을 키워 나갔다.

한편, 무장 독립군은 광복군으로 통합, 편성되어, 조국 광복을 위해 각지에서 일본군과 항쟁하였다. 이러한 국내외의 독립 투쟁은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의 능력을 세계 각국에 보여 주었다.

학습 문제

1.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민족사의 정통성과 어떠한 관련을 지니는 것일까?

2. 3⋅1 운동 이후의 독립 투쟁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3. 만주와 연해주에서의 무장 독립 투쟁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대한 민국 임시 정부

3⋅1 운동은 우리 민족의 독립 투쟁에 귀중한 교훈을 주었다. 이 때까지 여러 곳에서 주도해 오던 독립 투쟁을 보다 조직적이고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정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요구에 호응하여 국내외 각지에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면서, 여러 곳에 세워진 임시 정부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생각에서 얼마 후 상하이에 대한 민국 임시 정부로 통합하고,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선출했다.

임시 헌장 10조

1. 대한 민국은 민주 공화제로 함.

2. 대한 민국은 임시 정부가 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이를 통치함.

3. 대한 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임.

4. 대한 민국의 인민은 신교,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신서, 주소, 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가짐.

5. 대한 민국의 인민으로 공민 자격이 있는 자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음.

6. 대한 민국의 인민은 교육, 납세 및 병역의 의무가 있음.

7. 대한 민국은 신인의 의사에 의하여 건국한 정신을 세계에 발휘하며, 나아가 인류의 문화 및 평화에 공헌하기 위하여 국제 연맹에 가입함.

8. 대한 민국은 구 황실을 우대함.

9. 사형과 육형과 공동 매음은 전폐함.

10. 임시 정부는 국토를 회복한 후 1년 안으로 국회를 소집함.

상하이는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서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곳이었을 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와의 외교 활동을 펴기에도 쉬운 곳이었으므로, 독립 투쟁을 하는 데에는 가장 알맞은 지역이었다.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우리 민족의 정통을 계승하여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라 수립된 정부였다. 비록 해외에 자리잡은 임시 정부이지만, 온 겨레의 지지를 받고, 또 국내외의 동포에게 희망과 용기를 안겨 준 독립 투쟁의 본산으로서, 조국이 광복되는 날까지 활동을 계속하였다.

임시 정부는 연통제를 통하여 국내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독립 운동을 주도하였다. 독립 신문을 발간하여 국내외의 동포에게 독립 운동의 소식을 알려 독립 정신을 일깨우고, 여러 독립 운동 단체에 독립 운동의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한편, 구미 위원부를 설치하고, 유럽과 미국에서 외교적 활동을 통한 독립 투쟁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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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정부 요인들(좌)과 독립 신문(우)
임시 정부 요인들(좌)과 독립 신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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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임시 정부는 만주, 연해주의 독립군을 광복군으로 통합해서 중국 정부와 협력하여 항일 투쟁을 계속하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여 연합군과 함께 작전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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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의 민족 독립 투쟁
해외의 민족 독립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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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단 의거

3⋅1 운동 이후 독립 운동은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국내에서는 비밀 조직을 통하여 활동을 하고, 국외에서는 상하이의 대한 민국 임시 정부가 독립 투쟁을 이끌어 나갔다. 그리고, 만주, 연해주에서는 그 곳을 근거지로 하여 무장 독립 투쟁을 전개해 나갔으며, 미주 지역에서는 일제의 침략을 세계 여론에 호소하면서 독립 투쟁을 벌여 나갔다.

항일 의거를 목적으로 조직된 독립 단원들이 국내에 숨어들어, 총독부와 각지의 경찰서, 그리고 식민 통치의 경제 착취 기관인 동양 척식 주식 회사 등을 폭파, 파괴하는 의거가 잇달았다. 특히, 이봉창 의사는 토오쿄오에서 일본 천황에게, 윤봉길 의사는 상하이 훙코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많은 일본인 고관들을 살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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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
윤봉길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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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의거는 우리 민족의 강한 애국 정신의 발로로서, 내외의 우리 민족에게 감동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인에게도 큰 감명을 주었다.

독립군의 조직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국내에서의 투쟁이 어려워진 한말의 의병들은, 만주, 연해주로 이동하여 새로운 무장 투쟁의 근거지를 마련하고 전력을 가다듬었다.

국경 3도(평북⋅함남⋅함북)에서의 독립군 활동
   구분
연도
독립군 활동 건수 독립군 활동 인원 수(명) 전투 횟수
국내 국경 밖
1920 602 3,148 73 87
1921 397 2,127 59 89
1922 454 2,797 91 40
1923 560 3,483 112 25

만주와 연해주에는 일찍부터 우리 겨레가 이주해서 살고 있었다. 일제의 억압이 강화되면서 이 곳으로의 이주가 증가하였는데, 경제적으로 점차 터전을 잡게 되면서 이 곳은 항일 독립 투쟁을 뒷받침하는 근거지가 되었다.

본국에서 3⋅1 운동이 일어날 즈음에는 이 지역에 50여 개나 되는 독립 운동 단체들이 항일 투쟁과 민족 운동을 펴 나갔는데, 특히 동북 만주의 북로 군정서, 대한 독립군, 남만주의 서로 군정서, 대한 독립단, 연해주의 의군부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들 독립군 부대들 중에는 압록강이나 두만강을 넘어 국내로 진입 작전을 펴서, 일본군과 경찰 및 식민 통치 기관을 공격하여 많은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독립군의 국내 진입 활동
  구분
연도
경찰 기관 관공서
공격 횟수 사살(명) 부상(명) 공격 횟수 사살(명) 부상(명)
1920 9 6 12 3 3 2
1921 13 9 19 1 - 3
1922 12 6 13 14 2 -
1923 9 14 15 2 - 5

청산리 전투

만주에서의 무장 독립군의 활동은 1919년부터 1920년 사이에 크게 활기를 띠어갔다. 그러자, 일본군은 이러한 독립군의 활동을 막기 위하여 군대를 파견하였는데, 이를 크게 격퇴시켜 대승리를 거둔 것이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이다.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 독립군이 국내에 진입하여 큰 전과를 올리자, 일본군은 이를 보복하려고 대한 독립군의 본부인 봉오동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를 먼저 알고 대비하고 있던 독립군은 일본군을 크게 무찔러 대승하였다. 이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이 편성된 이후 첫째 번으로 거둔 통쾌한 승리였다.

그 후, 일본군은 더욱 규모가 큰 부대를 만주에 보내 독립군을 공격하면서, 만주에 있는 우리 겨레를 학살하였다. 이러한 속에서, 김좌진이 이끈 북로 군정서군은 연성 대장 이범석 부대를 선두로 일본군을 청산리에서 맞아, 10일간 계속된 전투에서 일본군 대부대를 섬멸하였다. 이 전투가 바로 독립군 전사상 길이 빛날 청산리 대첩이다(1920). 이 때, 우리 독립군은 생명을 돌보지 않고 용전 분투하였으며, 만주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협력과 지형을 잘 이용하여 효과적인 작전을 수행함으로써 대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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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대첩(민족 기록화)
청산리 대첩(민족 기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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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독립군의 활약이 커지자, 일본군은 우리의 독립군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는 한편, 그 기반이 되었던 만주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살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독립군은 연해주 지역으로 이동하고, 그 후 자유시 참변을 겪는 등 독립군은 재편성을 거듭하면서 계속적인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독립군의 활동

여러 전투에서 패배를 한 일본군은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명목 아래, 대부대를 보내어 간도를 비롯하여 우리 동포가 살고 있는 여러 곳을 습격하여 동포들을 마구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러한 일본군의 작전으로 독립군의 활동은 한때 주춤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만주 각 지역의 독립군은, 항일 투쟁을 효과적으로 펴기 위하여 여러 독립군 단체의 통합 운동을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세 단체로 통합하여 항일 독립 투쟁을 계속하였다.

참의부는 대한 민국 임시 정부에 직속되어 한⋅만 국경 지역, 정의부는 하얼삔 이남의 만주 중부 지역, 신민부는 북만주 일대에서 각각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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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 3부의 활동 지역
독립군 3부의 활동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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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들 3부는 단순한 항일 독립 운동 단체의 성격뿐만 아니라, 만주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기반 위에 설립된 자치 정부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그 후, 1920년대 후반에 와서는 3부 통합 운동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국내에 진입하여 일본 경찰이나 일본인 경영의 광산을 습격하는 등 많은 전과를 올렸다.

한편, 1931년에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면서 만주국이라는 괴뢰 정부를 세우자, 독립군은 일제의 침략을 막으려는 중국 군대와 한⋅중 연합군을 조직하여 일본군과 만주국에 대항하면서 항일전을 펴 나갔다.

이러한 한⋅중 연합군의 활약은 많은 성과를 올렸으나, 일본군의 공세가 강화되자, 독립군의 활동은 여러 가지 제약을 받았다. 그리하여, 일부는 국경 지대에서 계속 투쟁하고, 일부는 중국 본토로 이동해 광복군에 합류되어 투쟁을 하였다.

물산 장려 운동

3⋅1 운동 이후 국내에서의 일제의 침략 정책이 민족의 이간과 경제 착취의 강화로 굳어 가자, 독립 운동도 이에 대항하여 경제적, 사회적인 측면에서 추진되었다.

민족의 힘을 키울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은 산업의 육성과 진흥에서 이룩된다 하여, 일반 민중 사이에 물산 장려 운동이 일어났다. 자급 자족, 소비 절약, 국산품 애용 등을 내세운 이 운동은 자작회, 물산 장려회, 토산 애용 부인회 등이 주도하였으며, 전국적 규모로 발전하여, 일본 상품 배격과 국산품 애용을 경제적 민족 운동으로 발전시켰다. 이 운동은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20여 년 간이나 계속되었다.

물산 장려회 구호

입자, 조선인이 찬 것을.

먹자, 조선인이 만든 것을.

쓰자, 조선인의 손으로 된 것을.

우리 생활은 우리 물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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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산 장려 운동
물산 장려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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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920년대에 일제의 경제적 침략과 착취가 심해지면서 소작 쟁의, 노동 쟁의가 활발히 일어났는데, 이는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는 일반 민중의 경제적 독립 운동의 하나였다.

한편, 국내 지식층 사이에서는 항일 운동 단체의 통합 기운이 일어나 신간회가 창립되었다(1927). 신간회는 당시의 민족 운동가들이 참여한 최대 규모의 단체로서, 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구하면서 단결을 주장하였고, 일제를 규탄하였다.

광주 학생 운동

국내에서 전개된 개인 또는 단체나 조직에 의한 의거 활동과는 달리, 3⋅1 운동의 정신을 계승하여 학생을 중심으로 한 민중의 대규모 독립 투쟁도 거듭 일어났다.

3⋅1 운동의 선구가 되고 주역을 맡았던 학생들은, 3⋅1 운동 후에도 독립 투사들과 손을 잡고, 강연, 연극, 야학 활동 등을 통하여 민중을 계몽하는 한편, 일제의 식민지 교육에 반대하여 왔다.

그러던 중, 대한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던 순종이 돌아가자, 장례일을 맞이한 학생들이 다시금 독립 운동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6⋅10 만세 운동이다(1926). 장례 행렬이 지나가는 연도의 민중들이 호응하는 가운데 학생들의 만세 운동이 진행되었는데, 일제는 무력으로 이를 탄압하였다.

일제에 항거하는 학생들의 투철한 민족 정신은 광주 학생 운동을 계기로 또 한 번 발휘되었다.

일본 학생들의 못된 행동에 격분하여, 그 동안에 억눌렸던 민족 감정이 폭발되면서 학생과 시민들이 또 다시 거족적 항일 운동을 폈다(1929). 시민들까지 합세한 광주의 대규모 항일 운동은 곧 전국적인 민족 운동으로 확대되어, 남으로는 목포, 부산에서, 북으로는 신의주, 함흥에 이르기까지 항일 투쟁의 시위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광주 학생 운동은 단순한 학생 운동이 아닌, 일제의 우리 민족 차별 정책에 대한 반대, 나아가서는 민족의 독립을 되찾기 위한 투쟁이었다. 이 운동은 3⋅1 운동 이후에 일어난 최대의 민족 투쟁으로, 침략자에 대항하여 민족의 생존과 조국의 독립을 기어이 이룩해야겠다는 우리 학생들의 결심을 행동으로 보여 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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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학생 운동 기념탑
광주 학생 운동 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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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일제의 지배하에서 민족의 독립 운동을 이끌어 간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여러 가지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민족 독립 운동의 중심 기관으로 활동을 계속하였다. 일제가 중⋅일 전쟁을 일으켜 중국 정부가 충칭으로 옮겨 가자, 우리 임시 정부도 그 곳으로 옮겨 가면서 정부 기구를 전시 체제로 정비하였다.

한편, 만주에서의 무장 독립 운동이 어려워지자, 지청천을 비롯한 다수의 독립군 지도자들은 중국 본토로 이동했다.

이러한 가운데,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여러 독립군을 한국 광복군으로 통합하였다(1940). 지청천을 총사령관으로 하고 이범석을 참모장으로 하여 창설된 한국 광복군은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군대로서, 이후에 많은 활약을 하였다.

광복군은 중국 각지에서 중국군과 협력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중국 각지에 흩어져 살던 우리 청년들은 물론, 일본 군대로 끌려 나갔던 우리 청년들도 일본군에서 탈출해서 광복군에 합류하여 독립을 위해 싸웠다.

대일 선전 포고

우리 겨레의 독립 투쟁에 새로운 희망을 준 것은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이었다 이 두 전쟁은 모두 일제에 의해 도발된 침략 전쟁이었다.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1941), 임시 정부는 즉각 일제에 선전 포고를 하고, 연합군과 손을 잡고 항일 독립 전쟁에 나섰다. 이 때, 임시 정부는 멀리 인도, 버어마 전선에까지 광복군을 파견하여 영국군과 합류해서 일본군과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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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광복군
한국 광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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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의 배치 상황(1944년 말)
광복군의 배치 상황(1944년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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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광복군은 중국 땅에서 미군으로부터 낙하산 훈련 등 특수 훈련을 받아 가며, 본토 진입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당시 멀지 않아 일제가 패망할 것을 예상하고, 우리의 힘으로 본토를 되찾기 위한 작전을 추진하고 그에 대비한 훈련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미국에 살고 있던 우리 동포 중에서는 600여 명이 의용군으로 미국 군대에 참가하여 독립 전쟁에 나서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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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의 본토 진입 계획
광복군의 본토 진입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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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격동하는 세계 정세를 배경으로 우리의 독립 전쟁이 격화되자, 이 소식이 비밀리에 국내에 알려져, 우리 국민들에게 많은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카이로 회담

일제의 식민지 억압하에서도 민족의 독립 투쟁은 국내외에서 꾸준히 펼쳐졌다. 이러한 우리 민족의 독립 투쟁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진행되는 가운데 여러 외국에 알려졌다.

또, 임시 정부의 외교 활동과 광복군의 독립 전쟁으로, 세계 열강은 우리 민족이 독립의 능력이 있음을 인식하여, 연합국 수뇌가 모인 카이로 회담(1943)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을 약속하였고, 그 후 포츠담 선언에서 다시 우리의 독립을 확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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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츠담 선언
포츠담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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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은 일제의 압제로부터 광복을 맞는 마지막 순간까지 독립 투쟁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민족의 끈기 있는 투쟁이 있었음으로 해서 세계 여러 나라로부터 독립을 약속받을 수 있었으며, 마침내 조국의 광복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학습 정리

1. 3⋅1 운동은 가혹한 무단 통치의 탄압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민족의 역량을 내외에 보인 거족적 독립 운동이었다.

2. 3⋅1 운동 이후의 독립 운동은 물산 장려 운동, 신간회 운동과 같이 경제적, 사회적으로도 전개되었다.

3. 3⋅1 운동 후에도 학생 운동은 꾸준히 계속되어 독립 운동의 큰 흐름을 이룸으로써 6⋅10 만세 운동, 광주 학생 운동으로 이어졌다.

4. 대한 민국 임시 정부와 광복군의 독립 전쟁은 국제적으로 우리 민족의 독립을 약속하는 힘이 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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