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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Ⅰ. 우리 나라 역사의 시작
  • 2. 고조선의 건국과 발전

2. 고조선의 건국과 발전

〔학습 개요〕

서기전 10세기를 전후하여 요령 지방과 한반도 일대에서는 청동기 문화가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민무늬 토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동검, 반달 돌칼 등이 만들어졌으며, 농업 생산력도 높아졌다. 이 무렵에 우리 나라의 여러 곳에서는 정치적 사회들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사회들이 국가를 성립시켰는데, 그 중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나라가 단군이 세운 고조선이었다. 고조선의 건국과 관련된 단군 이야기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 정신을 기리는 이념으로 계승, 발전되어 왔다.

건국 이후, 독자적으로 발전하던 고조선은 한의 침략을 받았으나, 우리 민족은 이에 대항하여 굳세게 싸워 민족의 자주성을 지켜 나갔다.

학습 문제

1. 우리 나라 청동기 문화의 특징과 대표적인 유물은 무엇인가?

2. 청동기의 사용은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는가?

3. 고조선은 어떻게 발전하였는가?

4. 단군의 건국 이야기는 어떠한 내용이며, 이것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청동기 시대의 유물과 유적

한반도에서는 서기전 10세기경, 만주에서는 이보다 앞서서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사람들은 처음으로 금속을 사용하였으며, 그들이 사용한 토기도 보다 단단해졌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로는 동검과 청동 거울이 있다. 동검은 비파형 동검에서 세형 동검으로 발전하였다. 비파형 동검은 요령 지방과 한반도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으며, 세형 동검은 한반도의 각 지역에서 고르게 발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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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검
동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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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청동 거울은 거친무늬 거울에서 잔무늬 거울로 발전하였는데, 그 출토 지역은 동검의 출토 지역과 거의 같다. 또 청동을 부어 그릇이나 칼을 만드는 거푸집도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는 민무늬 토기이다. 민무늬 토기의 빛깔은 대개 적갈색이며, 모양은 바닥이 좁은 것과 판판한 것의 두 가지가 있는데, 주로 집터나 고인돌에서 간석기 등과 함께 발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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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무늬 토기
민무늬 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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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 시대의 무덤으로는 고인돌과 돌널무덤이 있다. 선돌과 함께 청동기 시대 유적의 특징을 보여 주는 고인돌은 한반도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고인돌보다 발전된 무덤인 돌널무덤은 만주와 한반도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이 무덤에서는 비파형 동검을 비롯하여 많은 청동기와 민무늬 토기가 출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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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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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널무덤
돌널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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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유물의 분포 지역과 그 모습으로 보아, 한반도와 요령 지방의 청동기 문화는 같은 계통의 문화라는 것과, 중국의 청동기 문화와는 다른 독자적인 문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회 변동과 국가의 성립

청동기 시대의 유적은 신석기 시대의 유적과는 달리, 주로 야산이나 구릉 지대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농경을 주로 하여 식량을 생산하였는데, 이 때에 재배된 곡식으로는 벼, 보리, 콩 등이 있다.

청동기 시대의 유적에서 많이 출토되는 돌로 만든 홈자귀, 반달 돌칼, 갈판 등은 농사를 짓고 곡물을 가공하는 데에 쓰인 도구들이다.

청동기 시대에는 벼농사를 비롯한 농사가 확대됨에 따라 살림살이가 나아졌다. 주거 생활도 달라져서, 움집의 깊이가 얕아지면서 지상 가옥에 가까워지고, 그 모양도 긴 네모꼴로 바뀌어졌다. 이러한 움집이 많이 모여서 마을을 이루었다. 이와 같이, 청동기 시대에 이르러서는 인구가 증가하고, 정착 생활이 안정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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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 시대의 움집터
청동기 시대의 움집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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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 시대의 이러한 사회⋅경제 생활의 변화를 바탕으로 정치적 사회가 성립되었으나, 그 규모는 크지 않았다. 이 때 정치적 지배자로서의 군장은 농업 생산의 증대에 따라 재산을 모았을 뿐 아니라, 동검을 무기로 사용하여 그의 세력 범위를 넓힘으로써 권력을 키워 나갔다. 또, 군장은 종교 의식을 주관하여, 종교적 지도자로서의 권위도 아울러 지니고 있었다.

이 시대에는 거대한 고인돌과 돌널무덤이 만들어졌는데, 돌널무덤에는 평소에 군장이 사용하던 동검, 청동 거울 등이 함께 묻혔다.

단군의 고조선 건국

군장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정치적 사회는 요령 지방과 한반도의 북부에서 먼저 나타났는데, 이들 지역은 다른 지역보다 문화가 앞선 곳이었다. 초기에는 읍락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의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이 사회를 이끌어 간 지배자는 자신이 하늘의 아들이라 하면서 정치와 종교를 아울러 지배하였다. 그리고 점차 복잡해져 가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법률도 만들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가장 먼저 성립된 나라가 단군이 세운 고조선이었다. 고조선의 단군 왕검은 종교와 정치를 함께 지배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삼국유사에는 단군의 건국(서기전 2333)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환인(하느님)의 아들 환웅이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목적으로 바람, 비, 구름을 각각 주관하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태백산에 내려와 신시를 열고, 곡식, 생명, 형벌 등 인간에게 필요한 360여 가지를 주관하며 사람들을 다스렸다. 그러던 중에 곰이 찾아와 사람이 되기를 원하므로 환웅은 곰을 여자로 변하게 하고, 그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가 곧 단군이다. 단군 왕검은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하였다.”

단군에 의한 고조선의 건국 사실은 우리 나라의 역사가 매우 오래 되었음을 말해 준다. 또, 단군에 의한 고조선의 건국 사실과 홍익 인간의 건국 이념은, 우리 민족이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자긍심을 일깨워 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고조선의 발전

고조선은, 주변 지역에 정치와 문화적인 영향을 끼치면서 보다 발달된 국가로 성장하여 갔다. 그리하여 고조선의 영토는 요령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한반도까지 아우르고 있었다.

서기전 4세기 중엽의 고조선은 매우 강성하여 중국의 연을 치려 한 일도 있었다. 그 이후에 고조선은 오히려 연의 침입을 받고, 서쪽 2천 리의 땅을 빼앗겼다. 고조선은 연의 침입으로 일시나마 쇠약해졌지만, 서기전 3세기 말엽까지도 부왕과 준왕이 차례로 왕위에 오르는 등 강력한 국가의 모습을 지켜 가고 있었다.

서기전 3세기 말엽에는 중국에서 진과 한이 교체되면서 일어난 혼란을 틈타 많은 사람들이 고조선으로 옮겨 왔다. 그 중 위만이라는 사람이 무리를 이끌고 들어오자, 고조선의 준왕은 그에게 서쪽 변방을 지키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무력으로 준왕을 쫓아 내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며, 주변 지역을 정복하여 세력을 크게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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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세력 범위
고조선의 세력 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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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고조선의 발전에는 철기 문화가 밑바탕을 이루었다. 즉 철제 농기구의 사용으로 농업 생산이 증가하고, 철제 무기의 사용으로 전투 능력이 강화되었다.

위만의 손자 우거왕 때에는 주변의 여러 지역이 한과 곧바로 교통하는 것을 막고, 중계 무역을 통하여 많은 이익을 차지하였다. 이것을 싫어한 한은, 육군과 수군을 이끌고 고조선을 침략하였다. 이에 고조선은, 한의 대군을 맞아 1년 가까이 굳세게 싸웠으나, 결국 서울인 왕검성이 함락됨으로써 멸망하고 말았다(서기전 108).

그리하여 한은 고조선 옛 지역의 일부에 세력을 뻗쳤으나, 우리 민족은 이에 대항하여 마침내 그들을 몰아 내는 데 성공하였다.

고조선의 사회

고조선의 사회는 사유 재산의 발달로 빈부의 차이가 생겼고, 지배하는 사람과 지배받는 사람으로 나뉘었다. 따라서, 강력한 통치를 하기 위하여 왕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 조직이 생겨났는데, 왕 밑에는 상, 대부, 장군과 같은 관직이 마련되었다.

그 후, 위만이 지배하면서 고조선은 보다 발전하였으며, 정치 조직도 상당히 정비되어 갔다. 왕권은 부자가 세습할 수 있을 정도로 안정되어 갔고, 왕 밑에는 나라일을 나누어 맡은 여러 관직을 두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위만이 다스리던 고조선은 높은 수준에 이른 국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조선에는 사회 질서의 유지를 위하여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8개조의 법이 있었다. 그 중에서,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 남을 다치게 한 사람은 곡물로써 갚는다. 도둑질한 사람은 종으로 삼는데, 만약 용서를 받으려면 많은 돈을 내야 한다.”는 3개 조항만이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법의 내용으로 보아, 고조선 사회는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학습의 도움 글〕

개천절의 유래

옛날, 우리 조상들은 태양 숭배 신앙을 가지고 있어, 지상의 국가를 하늘 나라의 연장으로 생각하고, 땅 위의 임금을 태양의 아들이라 불렀다. 그리하여 천(天)을 임금으로 보았으니, 개천(開天)이란 임금이 처음 세워졌다는 뜻으로서, 건국을 의미한다. 즉, 개천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바와 같이 단군 왕검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이란 나라를 세웠음(서기전 2333년)을 뜻하는 것이다.

이 개천절은 처음에 대종교에서 행하던 것을 대한 민국 임시 정부에서 전 민족적인 국경일로 정하여 경축하였고, 그 뒤 대한 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음력 10월 3일을 양력으로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학습 정리 ◇

1. 한반도에서는 서기전 10세기경, 만주에서는 이보다 앞서서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민무늬 토기가 만들어지고, 벼농사가 시작되었다.

2. 청동기 시대에는 정치적 사회가 출현하면서 점차 국가가 발생하였는데, 우리 나라 최초의 국가는 고조선이다.

3. 단군의 고조선 건국 이야기에는 홍익 인간의 건국 이념과 자주 독립 사상이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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