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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Ⅳ. 고려 사회의 발전
  • 3. 고려 전기의 대외 관계

3. 고려 전기의 대외 관계

〔학습 개요〕

고려는 송과의 친선 정책을 적극 추진하여, 그들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고, 무역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한편, 거란이나 여진 등 문화가 낮은 북방 민족들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외교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 북방 민족이 강성하여, 한때 고려를 침입하고 압력을 가해 왔다. 이에 고려는, 세 차례에 걸친 요의 침입을 막아 냈고, 여진을 정벌하였으나, 그 후 금의 압력을 받기도 하였다.

학습 문제

1. 고려는 송에 대하여 어떠한 대외 정책을 추진하였는가?

2. 고려와 송의 문물 교류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3. 고려는 여러 차례에 걸친 거란의 침입을 어떻게 물리쳤는가?

4. 고려와 여진과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송과의 문물 교류

고려 건국 당시에 중국은 분열되어 있었으나, 그 후 송에 의해 통일되었다. 이 무렵, 북쪽에서는 거란이 일어나 발해를 멸망시킨 후, 그 힘이 더욱 강성해졌다.

고려는 북진 정책을 추진하면서 한편으로는 친송 정책을 펴 나갔으므로, 고려와 송 사이에는 활발하게 교류가 이루어졌다. 이 때에 고려의 대송 외교는 송으로부터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중점을 둔 것이었으나, 송의 고려에 대한 외교는 거란을 견제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고려는 송과 거란의 대립에 말려들지 않고, 문화적, 경제적인 면에 치중하여 송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힘썼다.

사신과 학생, 승려들이 발달된 불교, 유학, 예술 등을 송으로부터 배워 왔다. 그리하여 고려의 문화 수준은 한층 높아졌다.

국제 무역

고려와 송 사이에는 사신과 상인의 왕래가 활발하였다. 그러나 거란의 압력으로 고려는 한때 송과 사신의 왕래를 끊은 때도 있었으나, 상인들의 왕래를 통한 무역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이 때의 수출품은 금, 은, 나전 칠기, 화문석이었고, 수입품은 비단, 서적, 약재 등이었다.

예성강 입구의 벽란도는 송나라 상인은 물론, 아라비아 상인까지 와서 국제적 무역 항구로서의 번영을 누렸다. 특히, 아라비아 상인은 수은, 향료 등의 물자를 들여 와서 우리의 토산품과 바꿔 갔는데, 그들에 의해 고려(Corea)라는 이름이 서양에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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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의 대외 무역
고려 시대의 대외 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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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 6주의 회복

고려와 거란과의 관계는 태조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 때, 거란은 사신을 보내어 친교를 맺으려 하였으나, 고려는 거란이 발해를 멸하였을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야만의 나라로 생각하여 이를 거절하였다.

거란은 고려가 송과 외교 관계를 굳게 맺고, 그들과의 국교를 거부하였을 뿐 아니라, 국경 지대에 여러 성을 쌓아 북방에 대한 경비를 엄히 하자, 드디어 고려에 침입하여 왔다.

제1차 침입은 성종 때에 있었는데, 거란의 장수 소손녕이 대군을 거느리고 고려에 쳐들어왔다. 이 때, 고려의 많은 중신들은 영토의 일부를 떼어 주고 강화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서희는 외교 담판으로 거란군을 설득시켜 물리치고,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회복하였다. 이에 고려의 영토는 북쪽으로 압록강까지 확대되었다.

제2차 거란의 침입은 현종 때에 있었다. 이에 앞서, 고려에서는 강조가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세우는 정변이 일어났는데, 거란은 이를 구실삼아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여 왔다. 이 때, 개경이 함락되었으나,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은 강화를 맺고 물러가는 거란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그 후, 거란의 소배압이 다시 침입해 왔으나,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군은 귀주에서 이를 거의 전멸시켰다. 이 승리를 귀주 대첩이라고 한다(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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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
강감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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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 대첩(민족 기록화)
귀주 대첩(민족 기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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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차례의 거란의 침입이 있은 뒤, 두 나라는 오랜 전쟁에 지쳐 평화를 바라게 되어, 강화가 성립되고 사신을 교환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는 북방 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국방 강화에 힘썼다.

현종 때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개경 주위에 나성을 쌓아 20년 만에 완성하였다. 이어서, 덕종 때에는 압록강 입구에서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 장성을 쌓아 거란과 여진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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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 6주와 천리 장성
강동 6주와 천리 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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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의 나성
개경의 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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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 9성의 설치

만주의 넓은 지역과 고려의 동북 국경 지대에 살고 있던 여진족은, 일찍부터 고려와 많은 접촉을 하고 있었다. 여진족은 원래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하여 말과 화살 등을 바쳤으며, 고려는 식량과 농기구 등을 주어 그들을 회유하였다.

그러나 12세기에 완옌부에 의해 여진족이 통일되면서, 그 세력은 정주의 천리 장성 부근까지 남하하여 고려와 충돌하게 되었다.

이에, 고려는 여진 정벌을 위하여 별무반이라는 특별 부대를 편성하였다. 윤관은 신기군, 신보군, 항마군으로 조직된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족을 물리쳐 함흥과 그 이북 지역을 점령하고, 그 일대에 9성을 쌓아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러나 생활의 근거지를 잃은 여진족이 9성을 돌려 달라고 애원할 뿐 아니라, 이를 지키기에 어려움이 있어 9성을 돌려 주고 말았다. 그 뒤, 여진은 나라를 세워 금이라 하고, 거란을 멸망시킨 후, 송을 압박하면서 중국의 북부를 차지하였으며, 고려에 대하여도 압력을 가하여 왔다.

이에, 고려에서는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이자겸이 여러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금의 사대 요구를 들어 주었다. 이로써 금과는 평화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초기에 거란과 싸우던 강건한 기개는 엿볼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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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척경 입비도
고려 척경 입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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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습 정리 ◇

1. 고려는 송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친송 정책을 추진하였다.

2. 고려와 송과의 문물 교류는 해로를 통해 빈번히 이루어졌으며, 벽란도에는 송과 아라비아 상인들이 출입하였다.

3. 고려는 세 차례에 걸친 거란의 침입을 격퇴하였으며, 전후에 개경의 나성과 천리 장성을 쌓는 등 북방 민족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4. 고려는 여진족을 토벌하여 9성을 쌓았으나, 후일 여진족이 세운 금이 강성해지자 금의 압력을 받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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