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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고려 전기의 사회

〔학습 개요〕

고려 사회는 왕족, 귀족, 하급 관리, 향리 등의 지배층과, 국민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평민, 천민 등의 피지배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시대에 생산을 담당한 농민은 토지를 경작하고 조세, 공납, 역을 부담하였다. 한편, 도시와 지방의 요지에는 시장이 열려 생활 용품을 교환하였으며, 장인이 있어 왕실이나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이 만들어졌고, 대외 무역도 번창하였다.

한편, 농민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한 의창, 상평창 등의 시설이 있었고, 또 동⋅서 대비원 등의 구호 시설도 마련되어 있었다.

고려의 풍속으로는 불교와 관련된 여러 가지 행사가 중심을 이루었으나, 유교나 토속 신앙과 결부된 각종 의식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학습 문제

1. 고려의 신분 제도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2. 고려 시대 농민의 생활은 어떠하였으며, 그들의 국가에 대한 의무는 무엇인가?

3. 고려 시대에 화폐의 사용이 부진하였던 원인은 무엇인가?

4. 고려 시대의 빈민 구제 시설로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가?

5. 고려 사회의 풍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은 무엇인가?

신분 제도

고려에서는 귀족을 비롯한 문무 양반과 궁중의 관리인 남반, 그리고 서리, 향리, 하급 장교 등이 넓은 의미에서의 지배층을 이루고, 평민과 천민이 피지배층을 이루었다. 특히, 문벌 귀족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 걸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들 귀족 가문에는 신라 6두품 출신도 있었으나, 고려 초의 호족이나 개국 공신 계열이 중앙의 관리로 진출한 경우가 많았다.

귀족이 되면, 음서의 혜택이나 공음전의 급여 등 여러 가지의 특권을 누렸다. 또, 좋은 가문과 혼인을 맺어 그들의 신분을 더욱 높이려고 하였다. 특히, 왕실과 혼인을 함으로써 권력을 독점하여 가문의 세력을 크게 확대하는 경우도 있었다.

궁중이나 관청에서 실무를 맡아 보는 남반과 서리, 지방의 행정을 맡은 향리와 하급 장교들도 국가로부터 일정한 경제적 대우를 받았다.

평민에는 농민, 상인, 수공업자들이 있었는데, 이들 중에서도 국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은 생산과 노동에 종사하면서 조세, 공납, 역의 의무를 지고 있었다.

천민으로는 노비, 화척, 재인(광대), 진척(뱃사공), 역정(마부) 등이 있었다. 노비는 관청에 소속된 공노비와 개인에 소속된 사노비가 있었다. 이 밖에, 향, 소, 부곡에 사는 사람들도 천민으로 취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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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사회의 신분
고려 사회의 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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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 문서(고려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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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고려의 신분 제도는 여러 계층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경우에 따라 신분이 높아질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다.

농민의 생활

농민의 생활은 대체로 어려웠다. 농업 기술이 발달되지 않아서 생산량이 적었을 뿐만 아니라, 조세, 공납, 역에 대한 농민의 부담이 무거웠기 때문이다.

농민은, 사유지인 민전에 있어서도 수확량의 10분의 1을 세로 부담하고 있었는데, 국가나 타인의 토지를 경작할 때에는 이보다 더 많은 조세를 부담해야만 하였다. 더욱이 관리들이 불법적으로 거둬들이는 일도 있었을 뿐 아니라, 때로는 권세가들에게 의해 토지를 빼앗기는 경우도 많았다. 이에 농민들은, 자기의 사유지를 잃고 남의 토지만 경작하는 소작농으로 떨어지거나 농지를 잃고 떠돌아다니게 되는 현상도 나타나게 되었다.

상공업과 화폐

고려에서는 농업이 주된 산업이었지만, 수공업과 상업도 점차로 발달하였다. 수공업품으로는 각종 무기, 장신구, 직물, 종이 및 도자기 등이 있었다.

농업과 수공업의 생산력이 증가함에 따라 상업 활동이 점차 활발해졌으며, 개경을 비롯한 교통의 요지에는 시장과 상점이 생겼다.

국내의 상업이 성장함에 따라 외국과의 무역도 활발해져서, 벽란도에는 송, 왜 및 아라비아 상인들의 배가 자주 드나들었다.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화폐도 만들어졌다. 성종 때에는 건원중보라는 철전을 만들어 사용하였고, 숙종 때에는 우리 나라의 지형을 본뜬 은병을 만들어, 이를 활구라 하여 화폐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해동통보, 삼한통보, 동국통보 등이 만들어졌으나,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고, 실제에는 곡물이나 삼베가 교환 수단으로 쓰여졌다. 이렇게 화폐의 사용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주로 농업 생산에 의존하는 자급 자족적인 경제 구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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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의 화폐
고려 시대의 화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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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시설

농민의 생산에 크게 의존하고 있던 고려 사회는, 이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의창, 상평창, 제위보 등의 사회 시설을 마련하였다.

의창에서는 곡식을 비축해 두었다가 흉년이나 춘궁기에 가난한 사람에게 빌려 주었고, 상평창에서는 곡식이 쌀 때에 사 두었다가 비쌀 때에 팔아 물가를 조절하였다.

그리고 보는 일정한 기금을 마련하여 그 이자로써 사업을 하는 일종의 재단으로서, 학보, 경보, 팔관보, 제위보 등이 있었다. 특히, 제위보는 빈민 구제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한편, 빈민을 위한 의료 시설로서 개경에 동⋅서 대비원을 설치하여 치료와 구휼을 담당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혜민국을 설치하여 빈민에게 약을 나누어 주는 일을 하도록 하였다.

풍속

고려 시대에는 불교를 국가적으로 신봉하고 있어, 자연히 불교에 관한 행사가 많았다. 그 중에서 연등회와 팔관회가 대표적이었다. 특히, 팔관회는 토속 신앙과 불교가 융합된 것으로, 연등회와 같이 국가와 왕실의 태평을 비는 불교 의식이었다.

한편, 유교를 정치 사상으로 한 고려 사회에서는 부모에 대한 제사나 상례 등을 장려하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관리들에게 휴가를 주어 의식을 치르도록 하였다.

농사에 힘쓰기 위한 의식도 행해졌다. 즉, 왕이 정월에 풍년을 기원하는 예를 행하고, 친히 논을 갈아 농사의 모범을 보이기도 하고, 사직단을 세워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민간에 있어서는 5월 단오에 격구나 그네, 씨름 등을 즐겼고, 6월 유두에는 동쪽으로 흐르는 냇물에 머리를 감았다. 8월 한가위도 큰 명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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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습 정리 ◇

1. 고려 사회는 문벌 귀족이 지배층의 중심을 이루었고, 평민과 천민이 피지배층을 이루었다.

2. 농민은 민전이나 귀족의 토지 등을 경작하고, 조세, 공납, 역의 의무를 졌다.

3. 경제 생활은 농업에 의존하는 자급 자족의 형태였으므로, 화폐의 유통은 부진하였다.

4. 고려는 농민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의창, 상평창, 제위보 등의 사회 시설을 마련하였고, 빈민을 위한 의료 시설도 갖추었다.

5. 고려 시대에는 연등회, 팔관회 등의 불교 행사와 유교 의식, 토속적인 풍속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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