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5차 교육과정
  • 중학교 국사 5차(상)
  • Ⅳ. 고려 사회의 발전
  • 6. 귀족 사회의 동요와 무신 정권

6. 귀족 사회의 동요와 무신 정권

〔학습 개요〕

고려 중기에 이르러 밖으로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압력이 가해져 왔고, 안으로는 외척과 지방 세력이 일어나 귀족 사회는 크게 동요되었다. 그리고 문신 중심의 문벌 귀족 사회의 모순이 누적되는 가운데 마침내 무신 정변이 일어났다.

무신들이 정권을 잡고 있는 기간에 농민과 천민의 동요가 심하였다. 무신 상호간의 정권 다툼과 민중의 저항 운동 속에서 최충헌이 집권하여 4대에 걸치는 지배 체제를 이룩하였다. 무신 정권은 침략해 온 몽고군과 끝까지 항쟁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지키려 하였다.

학습 문제

1.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이 일어난 배경은 무엇인가?

2. 무신 정권이 수립된 후, 사회의 동요는 어떠하였는가?

3. 최씨 무신 정권은 그 기반을 어떻게 강화시켰는가?

4. 몽고의 침입에 대하여 우리 민족은 어떻게 항쟁하였는가?

이자겸의 난

고려 사회는 문벌 귀족들이 이끌어 간 사회였다. 문벌 귀족들은 그들 서로간에 혼인 관계를 맺거나, 왕실과 결혼하여 자신들의 문벌을 높이고 세력을 키웠다. 당시의 대표적인 문벌로는 경원 이씨가 유명하였다.

경원 이씨는 오랫동안 왕실의 외척이 되어 국가의 요직을 차지하고 정권을 휘둘렀다.

경원 이씨 세력은 이자겸 때에 와서 절정을 이루어, 마침내 그는 인종을 몰아 내고 왕이 되려는 야심까지 품어 난을 일으켰다(1126). 이로써 문벌 중심의 고려 귀족 사회는 동요되기 시작하였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이자겸의 난으로 궁궐이 불타 개경이 어수선해지고, 밖으로부터 금의 압력이 가해져 왔다. 이러한 때에 묘청 등의 서경 세력이 대두하였다.

묘청 등은 풍수 지리설을 이용하여, 개경의 지덕이 쇠하고 서경의 지덕은 왕성하므로, 서경으로 서울을 옮기면 금나라를 비롯한 여러 나라가 굴복해 올 것이라고 하였다. 또, 황제라 칭하고, 금나라를 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인종은, 서경에 대화궁을 짓도록 하고, 장차 서울을 옮기려 하였다.

확대보기
대화궁 터(평남 대동 소재)
대화궁 터(평남 대동 소재)
팝업창 닫기

이러한 묘청 등의 주장에는, 개경의 귀족 세력을 제거하고 서경 중심의 지방 세력가들이 정권을 잡으려는 야심도 숨어 있었다.

그러나 서경 천도 운동은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개경파 귀족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이에 묘청은, 나라 이름을 대위라 하고 서경에서 난을 일으켰으나(1135), 정부군에 의해서 평정되었다.

무신 정변

이자겸의 난,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이후, 고려의 귀족 사회는 다시 평온을 되찾은 듯하였다. 그러나 차별 대우를 받고 있던 무신과 곤궁에 빠진 농민들의 불만을 해소하지는 못하였다.

정치 권력은 물론, 토지 분배, 군사 지휘권 등에 있어서 문신과는 달리 불리하게 대우를 받고 있던 무신들은 불평 속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무신들은 이러한 차별 대우를 받아 가며 거란, 여진 등과 전쟁을 치르면서 그들의 지위와 세력을 점차 키워 갔다.

드디어, 의종 때 정중부 등은 무신 정변을 일으켜 문신들을 몰아 내고 정권을 잡았다(1170). 무신들은 그들 사이의 권력 싸움으로 그 집권자가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으로 바뀌어 갔다.

확대보기
무신 집권자와 지배 기구
무신 집권자와 지배 기구
팝업창 닫기

사회의 동요

무신이 정권을 잡은 뒤, 농민과 천민의 봉기가 계속되었다. 무신 정변 이전부터 싹트고 있었던 농민의 동요는, 집권 세력인 무신들의 횡포로 인하여 더욱 심해졌다.

또, 사회적인 부당한 대우와 천민의 신분에서 벗어나려는 천민들의 신분 해방 운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농민과 천민의 저항은 무신 정권의 수립 직후부터 약 30년간 전국적으로 계속되었다.

특히, 남부 지역이 심해서, 공주 명학소에서는 천민들이, 그리고 전주와 진주에서는 노비들이 봉기하였다. 개경에서는 최충헌의 노비인 만적이 “삼한에서 천민을 없애자.”고 외치며 노비의 해방을 꾀하였다.

천민뿐만 아니라, 농민도 저항 운동을 일으켰다. 이 중에서 경상도 운문의 김사미와 초전의 효심이 일으킨 항쟁이 대표적이었다.

확대보기
농민과 천민의 항쟁
농민과 천민의 항쟁
팝업창 닫기

이들 민중의 항쟁은 무력에 의해서 평정되어 갔고, 정부도 백성들의 요구 중 일부를 받아들이는 정책을 써서 회유하였다.

최씨 무신 정권

이의민을 숙청하고 정권을 잡은 최충헌은, 강력한 독재 정치로 정권을 안정시켰다. 그는, 지방에서 일어나고 있던 오랜 민란을 진압하고, 문신들과 결탁된 사원 세력의 저항을 물리쳐, 최씨 무신 정권이 4대 60여 년 간 계속될 수 있는 터전을 굳혔다.

무신 정권이 수립된 후에도 공식적인 통치 기구는 2성 6부였으나, 무신 정권 초기에는 본래 무신들의 최고 회의 기관이었던 중방이 최고 권력 기구가 되었다.

최충헌은 정권을 잡은 후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국정을 주관하였고, 최우는 자기 집에 정방을 두어 정부의 모든 인사 행정을 처리하였다.

한편, 무신 집권자는 사병을 조직하여 정권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경대승 집권 시기에 설치된 도방은 최씨 정권이 수립되면서 더욱 확장되었다. 또, 최씨 정권은 삼별초를 두어 도방과 함께 그들의 군사적 기반으로 삼았다.

몽고와의 전쟁

최씨 무신 정권이 안정되어 갈 무렵, 몽고에서는 칭기즈칸이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제국을 건설하였다. 이 때, 만주에 살고 있던 거란족의 일부가 몽고에 쫓겨 고려 영토인 강동성에 몰려 있었다. 고려는 몽고와 함께 이를 소탕하였는데, 이것이 고려가 몽고와 접촉한 최초의 일이다. 그러나 몽고는 이를 빌미로 하여 고려에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여 왔으므로, 두 나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몽고의 사신이 고려로부터 돌아가는 길에 살해된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을 구실 삼아 몽고는 고종 때 침입하여 왔다. 몽고군은 귀주에서 박서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으나, 이를 버려 둔 채 남하하여 개경을 포위하였다. 미처 전쟁 준비를 갖추지 못했던 고려는 일단 몽고와 강화를 하였다. 이에 몽고군은, 지방의 감시관인 다루가치를 남겨 두고 물러갔다.

그 후, 몽고가 고려에 대하여 더욱 무리한 공물을 요구해 오자, 당시의 집권자인 최우는 단호히 항전할 것을 결의하고, 서울을 강화도로 옮겨 대몽 항전 태세를 갖추었다. 이에 몽고는 재차 침입해 왔으나, 살리타가 처인성에서 김윤후의 화살에 맞아 죽자 헛되이 돌아갔다. 그 후에도 몽고군은 화의가 맺어질 때까지 여러 차례 침입해 왔다. 그러나 고려는 끈질긴 항쟁을 계속하면서 나라를 지켰다.

확대보기
처인성 터(경기도 용인)
처인성 터(경기도 용인)
팝업창 닫기

최씨 정권은 강화도를 중심으로 침략에 꿋꿋이 대항하였으며, 한편으로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부처의 힘을 빌리고자 대장경을 조판하기도 하였다. 민중들의 항전은 몽고의 침략을 물리치는 바탕이 되었으며, 특히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노비와 천민들까지도 용감히 싸워 충주 등 여러 곳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고려는 몽고와의 전쟁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국토는 황폐해지고, 수많은 백성들이 생명을 잃었으며, 또 몽고에 잡혀 간 사람도 많았다. 그리고 경주 황룡사 9층탑과 대구 부인사에 보관된 대장경판 등 귀중한 문화재가 불타 없어졌다.

삼별초의 항쟁

전쟁이 오래 계속되자, 몽고는 무력으로 고려를 정복하기가 어려움을 알고, 육지로 나와 화의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는 사이에, 항전을 고수해 오던 최씨 정권이 무너졌다(1258). 이에, 문신들의 주장에 따라 이듬해 몽고와 화의가 이루어졌다.

강화가 성립된 후에 무신 정권이 몰락하자, 왕정이 회복되고 뒤이어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이 때, 개경으로 환도하는 것은 곧 몽고에 대한 항복을 의미한다 하여, 배중손이 이끈 삼별초는 정부의 환도에 반대하고 대몽 항쟁을 계속하였다.

이들은 멀리 진도로 내려가 여⋅몽 연합군과 싸웠다. 진도가 함락되자, 그 일부는 다시 제주도로 옮겨 항쟁을 계속하였으나, 결국 평정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삼별초의 대몽 항쟁은 고려인의 꿋꿋한 기상을 보여 준 것이었다.

확대보기
삼별초의 항몽 순의비(제주도 애월읍)
삼별초의 항몽 순의비(제주도 애월읍)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삼별초의 대몽 항쟁(민족 기록화)
삼별초의 대몽 항쟁(민족 기록화)
팝업창 닫기

◇ 학습 정리 ◇

1. 문벌 귀족 사회의 모순으로 이자겸의 난,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이 일어났다.

2.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서경 세력의 집권욕도 작용하였으나, 자주성과 북진의 의지도 담겨져 있었다.

3. 무신 정권이 수립된 후, 신분의 향상을 요구하거나, 지배층의 수탈에 항거하는 저항 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4. 최씨 무신 정권은 교정도감이라는 최고 권력 기구를 두었으며, 도방과 삼별초를 독재 정권의 군사적 기반으로 삼았다.

5. 고려는 여러 차례 몽고의 침입을 받았으나, 일반 민중들까지 합세하여 줄기차게 항쟁하였다. 삼별초의 대몽 항쟁은 고려 무인들의 자주 정신을 발휘한 것이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