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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고려 후기 사회의 변화

〔학습 개요〕

고려는 원과 화의를 맺은 뒤, 원의 여러 가지 압력과 간섭을 받게 되었다. 이 시기의 고려 사회는 이른바 권문 세족들이 새로운 지배층으로서 권력을 잡고 있었으며, 이에 대하여 신진 사대부 계층이 성장하여 새로운 개혁 정치를 추구하였다.

공민왕은 원과 명의 교체기를 틈타 반원 자주 정책을 추진하여, 밖으로는 원의 간섭에서 벗어났고, 안으로는 신진 사대부들과 손잡고 정치, 경제, 사회 등 전반에 걸친 개혁 정치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권문 세족의 반발과 홍건적, 왜구의 침입 등으로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학습 문제

1. 고려 후기의 권문 세족과 신진 사대부 계층은 서로 어떻게 다른가?

2. 권문 세족의 농장 확대로 인한 고려 말의 사회적 모순은 어떠하였는가?

3. 공민왕의 개혁 정치는 어떻게 추진되었으며,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4.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어떤 세력이 새로 대두하였는가?

원과의 관계

고려는 원과 화의를 맺고 개경으로 환도하였으나, 곧 새로운 시련에 부딪히게 되었다. 원은 일본을 정벌하고자 병선의 건조, 군량의 공급, 군사의 동원을 고려에 강요하였다. 그리하여 두 차례에 걸친 여⋅원 연합군의 일본 정벌이 단행되었으나, 태풍으로 인하여 실패하였다.

원은 일본 정벌을 위하여 고려에 정동행성이라는 관청을 두었다. 일본 정벌이 실패한 뒤에 정동행성은 원과 고려와의 공적 연락 기관으로 운영되었다.

원은 화주에 쌍성 총관부, 서경에 동녕부, 제주도에 탐라 총관부를 설치하고, 그 곳을 차지하였다. 이 중 동녕부와 탐라 총관부가 관할하던 영역은 곧 회복되었으나, 쌍성 총관부가 관할하던 지역은 공민왕이 무력으로 탈환할 때까지 원의 지배 밑에 있었다.

또, 고려는 원의 간섭으로 관제와 왕실에서 쓰는 용어도 격을 낮추게 되었고, 여러 가지의 명목으로 물자를 징발당하여 농민들의 고통은 더욱 심해졌다.

한편, 고려와 원 사이에 문물이 교류되어, 고려의 상류 계층에서는 몽고어와 몽고식 의복 등이 유행하였으며, 원에서도 고려양이라 하여 고려식 생활 풍습이 유행하였다.

권문 세족과 신진 사대부

무신 정변 이후, 고려 사회의 지배층에는 변동이 일어났다. 즉, 고려 초기 이래 지배 세력으로 등장한 문벌 귀족들은 무신 정변을 계기로 몰락하고, 고려 후기에는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서 권문 세족들이 성장하였다.

권문 세족들은 높은 관직을 차지하고 있었고,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친원적인 성격을 띤 보수 세력으로서, 새로운 개혁을 반대하였다.

한편, 신진 사대부 계층이 권문 세족에 대항하여 새로운 세력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이들 신진 사대부 계층은 대체로 하급 관리와 지방의 중소 지주 출신으로서, 유교의 학문적 교양을 쌓고, 과거를 통해 중앙 정계에 등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경제⋅사회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개혁 정치를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농장의 확대

12세기에 접어들면서, 고려 시대 토지 제도의 중심을 이루는 전시과 제도가 무너지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문벌 귀족들이 함부로 많은 토지를 차지하였기 때문이다.

무신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대토지의 소유 현상이 더욱 심해져 전시과 제도는 사실상 무너지게 되었다.

몽고와의 항쟁이 끝나고 원의 정치적 간섭을 받은 시기는 물론,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 대토지의 집중은 계속되었다.

권문 세족들은 토지를 국가로부터 합법적으로 급여받거나 개간에 의해 확대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 강제로 차지하였다. 농민들은 권문 세족의 가혹한 수탈에 견딜 수 없어, 가족을 거느리고 그들에게 의탁하기도 하였다. 이들 농장은 각종 조세와 역을 기피하였으므로 국가 재정의 궁핍을 가져오게 되었다.

고려 말 토지 제도의 문란상

말기에 이르러 덕을 잃어 토지 대장이 불분명하매 평민은 모두 큰 세력가에 속하게 되고, 전시과는 폐하여 사전이 되었다. 권력가들의 토지는 광대하여 산천으로 표시를 삼고, 징세를 한 해에 수삼 차에 걸쳐 시행하니 나라의 법이 무너져 나라도 망하게 되었다.

〈고려사 식화지〉

공민왕의 개혁

신진 사대부들은 권문 세족의 정치적, 경제적 폐단을 개혁하려 하였다. 이러한 개혁 운동은 공민왕의 후원으로 본격화되었다. 14세기 중엽에 이르러, 원은 새로 일어난 명에 의해 북방으로 쫓겨나게 되었는데, 공민왕은 이 틈을 타서 원의 간섭을 벗어나기 위하여 과감한 개혁 정치를 단행하였다.

공민왕은 먼저 정동행성의 기능을 폐하여 원의 간섭을 물리치고, 쌍성 총관부를 무력으로 쳐서 철령 이북의 영토를 회복하였으며, 관제를 복구하고, 또 몽고식 생활 풍습을 금하였다. 이어서, 공민왕은 친원파를 숙청하고, 정방을 폐지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한편, 신돈을 등용하여, 권문 세족들이 불법으로 차지하고 있던 많은 토지를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주고, 노비를 해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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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의 영토 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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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의 이러한 개혁은 일반 백성들에게 크게 환영을 받았으나, 권문 세족들의 반발로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홍건적과 왜구의 격퇴

공민왕이 개혁 정치를 추진하고 있을 때, 밖으로는 홍건적과 왜구가 침입해 왔으며, 중국에서 원과 명이 바뀌면서 대외 관계에 큰 변동이 일어났다.

먼저, 대륙으로부터 홍건적의 침입을 받았다. 원이 쇠퇴하자, 중국의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홍건적은 그러한 반란군의 하나였다. 중국 북쪽 지방에서 일어난 홍건적은 두 차례나 고려를 침입하였다. 고려에서는 최영, 이성계 등이 나아가 이를 격퇴하였다.

한편, 왜구는 쓰시마 섬 등에 근거를 둔 일본의 해적들로서, 이미 일찍부터 해안 지방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고 있었다. 공민왕 때에는 왜구에게 강화도까지 약탈당하고, 개경이 위협을 받을 정도였다. 이리하여 조세의 해상 운반이 어렵게 되어, 국가 재정이 궁핍하게 되고,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까지 왜구가 침입하여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고려는 왜구를 막기 위해 일본과 외교적 교섭도 벌였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결국 무력으로 토벌하게 되었다.

최무선은 화포를 만들어 왜선을 불태우고, 최영과 이성계는 홍산과 황산 등지에서 왜구의 주력 부대를 무찔렀으며, 박위는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을 정벌하여 그 기세를 크게 꺾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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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 대첩비각(전북 남원)
황산 대첩비각(전북 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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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습 정리 ◇

1. 고려 후기의 지배 세력인 권문 세족은 정치적 권력과 막대한 농장을 소유한 보수적 집권층이었다. 이에 대항하여 개혁 정치를 주장하는 신진 사대부 세력이 대두하였다.

2. 권문 세족들의 경제적 기반은 농장이었고, 이들의 농장 확대로 국가 재정은 궁핍해지고,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3. 공민왕은 반원 자주 정책을 추진하면서 권문 세족의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으나, 개혁 추진 세력이 미약하여 결국 실패하였다.

4. 고려 말에 홍건적과 왜구를 격퇴하는 과정에서 최영과 이성계 등의 무인 세력이 대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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