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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Ⅴ. 조선 사회의 발전
  • 1. 양반 관료 사회의 성립

1. 양반 관료 사회의 성립

〔학습 개요〕

조선의 건국은 정치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발전도 가져왔다. 고려가 귀족 중심의 사회인 동시에 불교 국가였음에 비하여, 조선은 양반 관료 사회이자 유교 국가라고 말할 수 있다.

조선은 건국 후 100여 년 간의 노력으로, 양반 중심의 중앙 집권 국가로서의 통치 조직을 완성하였다. 이 시기에, 안으로는 민생의 안정과 부국 강병을 위해 노력하였고, 밖으로는 실리 추구의 외교로서 국제 평화 유지에 힘썼다.

학습 문제

1. 고려 말의 정치 사정은 어떠하였으며, 조선 건국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인가?

2. 조선의 집권 체제는 어떻게 정비되었으며, 경국대전의 편찬은 어떠한 의의를 가지는가?

3. 조선의 중앙 행정 기구와 지방 행정 조직은 어떠하였는가?

4. 양반 관료는 어떻게 선임되었으며, 그들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 제도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었는가?

조선의 건국

고려 말기에는 나라 안팎으로 어려움이 계속되었다. 이 때에 나타난 신진 사대부들은 과감한 개혁 정치를 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정도전, 조준 등 사대부의 중심 인물들은 이성계의 신흥 무인 세력과 손잡고, 기울어져 가는 고려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당시, 이성계는 북으로부터 침입해 오는 나하추 세력을 물리치고, 남으로 침략해 오는 왜구를 토벌하는 데 크게 공을 세워, 국민의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었다.

이 무렵, 원을 몽고 지방으로 몰아 낸 명은, 한때 원이 지배하였던 철령 이북의 땅을 그들에게 넘겨 줄 것을 요구하였다. 고려에서는 최영 등이 이를 거절하고, 이 기회에 명이 차지한 요동 지방까지 수복하려 하였다. 그러나 당시 국내외의 사정을 이유로 요동 공격을 반대하였던 이성계는, 출정 도중에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개경으로 돌아와 반대파를 몰아냈다.

실권을 잡은 이성계와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경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하여 새로운 과전법을 시행하였다. 과전법이 실시되면서 권문 세족들은 정치 권력과 군사권에 이어 경제 기반까지 잃게 되었다. 이어서 사대부들은 정몽주 등 일부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마침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을 세웠다(1392).

조선의 건국은 단순한 왕조의 교체가 아니었으며, 고려에 비하여 많은 변화와 발전을 가져왔다. 고려의 문벌 귀족 사회와는 달리, 조선은 양반 관료 사회로 발전하였고, 사상면에 있어서도 큰 변화를 초래하여 성리학이 정치에 활용되었을 뿐 아니라, 생활 전반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국호의 제정과 한양 천도

조선이란 국호는 고조선을 계승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단군 숭배 사상도 포함되어 있으며, 우리의 유구한 역사를 내세워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려는 의미도 담고 있다. 나라에서 단군에 대한 제사를 중요시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한편, 조선은 건국 후 곧 도읍을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이를 한성부라 하였다.

한양은 고려 시대에도 지리적 조건이 좋아서 이 곳을 남경이라 하여 중요시하였던 곳이다. 이 곳에 도읍을 정하면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조공을 바쳐 오고, 나라도 크게 융성한다는 기대가 국민들 사이에 높아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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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의 모습(수선전도)
한성의 모습(수선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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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권의 확립

조선은 건국 후에 왕권을 튼튼히 하고, 나라의 터전을 닦는 데 주력하였다. 조선 왕조는 유교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 원리로 삼았으며, 왕조 초기부터 민생의 안정에 노력하였다.

태종 때에는 과단성있는 개혁을 실시하여 왕권을 확립하였다. 사병 제도를 철폐하여 병권을 국왕에게 집중시켰고, 전국의 인구 동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호패법을 실시하였으며, 유교에 입각한 가부장적인 가족 제도를 확립하였다. 태종 때에 다져진 정치, 경제, 군사적인 안정이 바탕이 되어, 세종 때에 이르러 문화가 융성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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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대왕
세종 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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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때에는 능력 있는 재상과 젊고 재주 있는 학자들이 널리 기용되어, 이들에 의해 주요 정책의 방향이 제시되었다. 특히, 집현전이 학술 기관으로 활용되어 민족 문화를 꽃피우는 데 이바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때에는 국토 확장에도 힘써 조선의 국토가 압록강, 두만강 유역까지 확장되었다.

그 후, 세조 때에는 단종의 복위를 꾀하는 성삼문 등의 사육신을 제거하고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국가의 재정을 늘리기 위하여 직전법을 실시하였다. 세조 때에는 두 차례에 걸친 동북 지방의 반란을 평정하고, 북방 개척에도 힘을 기울였다.

성종 때에 이르러 경국대전이 완성되고, 집권 체제의 정비가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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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대전
경국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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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대전은 태조 이래의 모든 법령과 조례를 모아 만든 기본 법전으로서, 경국대전의 편찬은 곧 조선 왕조의 제도가 완성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로써 유교적인 법치 국가가 확립되었다.

중앙의 정치 제도

조선의 관직은 크게 중앙과 지방의 관직으로 구분되고, 관료는 문관인 동반과 무관인 서반으로 나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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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계석
품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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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관직에서 가장 기본이 된 것은 의정부와 6조였다. 의정부는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3정승으로 구성되는데, 국가의 주요 정책은 이들의 합의에 따라 결정되었다. 의정부 밑에 있는 이, 호, 예, 병, 형, 공의 6조는 행정 실무를 나누어 맡았는데, 그 장관을 판서라 하였다.

이 밖에, 관리들을 감찰하는 사헌부, 국왕의 정치적인 잘못을 일깨워 주는 사간원, 그리고 국왕의 자문을 맡은 홍문관이 있어서 올바른 정치가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또, 국왕의 비서 기관인 승정원, 국왕 직속의 사법 기관인 의금부, 나라의 역사 기록을 담당하는 춘추관, 고급 관리를 양성하는 성균관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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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중앙 정치 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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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행정 제도

조선은 국초부터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각 도에는 중앙으로부터 관찰사를 파견하여 도의 행정을 맡게 하였다. 감사라고도 불리는 관찰사는 그 권한이 막중하여, 행정뿐만 아니라 군사 및 사법권까지도 장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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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의 행정 조직
조선 초기의 행정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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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밑에는 부, 목, 군, 현이 있었고, 중앙에서 파견한 군수, 현감 등의 수령이 이 곳을 다스렸다.

수령은 지방 행정의 책임자로서, 백성들의 생활 전반에 걸쳐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수령은 조세, 공납의 징수와 아울러 수송의 책임을 졌으며, 농업의 진흥, 교육의 장려, 호구의 조사, 재판의 공정에 힘써야 했다.

지방의 행정 실무는, 향리들이 6방에 소속되어 수령을 보좌하면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각 고을에는 지방 양반들이 조직한 향청(유향소)이 있었다. 향청에는 좌수, 별감 등이 있어 이들이 수령을 도와 자문에 응하고, 향리를 감찰하였으며, 지방의 풍속을 앞장 서 바로잡아 나갔다.

이처럼, 조선의 지방 행정은 수령과 향리, 그리고 지방의 양반들이 서로 협력하면서 수령의 책임하에 다스려지도록 조직되어 있었다. 이는 곧 지방 세력의 확대를 견제하여 중앙 집권적인 정치를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군사 조직

조선 초기의 기본적인 군사 조직은 5위였다. 5위는 중앙 군대의 중심으로서, 각기 분담된 지방의 군사를 맡아 통솔하였다.

각 도에는 병마 절도사(병사)와 수군 절도사(수사)가 파견되어 각각 육군과 수군을 통솔하였으며, 국방상의 요지에는 진과 보를 설치하여 군대를 주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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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무도(세종 대왕 기념관 소장 기록화)
강무도(세종 대왕 기념관 소장 기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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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군 조련도
수군 조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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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에는 병영을 두 곳에 설치하여 여진족에 대비하였고, 경상도와 전라도에는 수영을 두 곳씩 두어 왜구에 대비하였다.

지방의 군대는 그 대부분이 의무병으로 구성되었다. 16살에서 60살까지의 농민 장정들은 정남이라 하여 병역 의무를 지고 있었다.

한편, 국경 지대에서 발생하는 국방상의 주요 연락 사항을 횃불이나 연기로 신속하게 중앙에 전달하기 위한 봉수 제도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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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대(경기도 수원 소재)
봉화대(경기도 수원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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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과거 제도

조선 시대 교육의 주요 목적은, 유교적 소양을 갖춘 유능한 관리를 양성하려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학교 교육은 관리의 양성을 위한 과거 시험 준비 과정에 불과하였다.

상민에게도 교육의 기회는 주어졌으나, 실제로 학교 교육은 양반 자제를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양반 자제들은 7, 8세가 되면 가정이나 서당에서 초보적인 유학 지식을 쌓았으며, 4부 학당 및 향교에 입학하여 4서 5경 등 유교 경전을 학습하였다. 그리고 최고의 학부로서 성균관이 설치되어 수준 높은 유학 교육을 실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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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성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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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
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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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의학, 천문학, 법학, 산학, 외국어 등의 기술 교육은 전의감, 관상감 등의 해당 관청에서 각기 맡아 별도로 실시하였다.

관리는 원칙적으로 과거를 거쳐서 채용되었다. 과거는 문과, 무과, 잡과의 세 종류로 구별되는데, 이 중에서 문관 시험인 문과가 가장 중요시되었다. 문과에는 주로 양반 자제가 응시하였고, 무관 시험인 무과에는 향리나 상민들도 응시할 수 있었으며, 잡과에는 주로 중인이 응시하였다.

문과는 소과와 대과로 나뉘었다. 소과는 생원 및 진사 자격을 얻는 자격 시험으로, 이에 합격하면 성균관에 입학하여 교육을 받고 대과에 응시하였다. 소과 합격자와 성균관 학생들이 응시하는 대과에서는 33명을 뽑았는데, 이 때 1등을 한 장원 급제자에 대해서는 특별히 우대하였다.

과거는 3년에 한 번씩 실시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그 밖에 여러 가지의 과거 시험이 수시로 시행되었다.

조운과 역원

매년 전국 각 지역에서 거둔 세곡은 수로와 해로를 이용하여 서울로 운송되었는데, 이를 조운이라 한다. 서남 해안과 한강 등의 강가에는 조창이 설치되어, 인접 고을의 세곡을 이 곳에 보관하였다가 선박을 이용하여 서울의 경창까지 수송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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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조운
조선 시대의 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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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육로 여행자들을 위하여 역원 제도도 마련되었다. 당시, 전국의 주요 도로에는 약 30리의 간격으로 역이 설치되었고, 역에는 역졸이 배치되었다. 특히, 마패를 소지한 공무 여행자에게는 역마를 제공하는 등 편의를 돌보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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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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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과 함께 교통의 요지나 한적한 곳에는 원이 설치되어 여행자들이 숙박하였다. 장호원, 조치원 등과 같은 지명은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 학습 정리 ◇

1. 고려 말의 사회 혼란과 이민족의 침입이 계속되는 민족적 고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사대부 계층과 무인 세력이 조선을 건국하였다.

2. 조선은 건국 후 100여 년에 걸쳐서 유교적 관료 국가로서의 집권 체제를 정비하였으며, 경국대전의 편찬으로 유교적 법치 국가를 이루었다.

3. 중앙의 정치 구조는 의정부와 6조가 그 중심을 이루었으며,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의 기구를 두었다.

4. 조선은 전국을 8도로 나누고, 도 밑에 부, 목, 군, 현의 고을을 두었으며, 각 고을에는 수령을 파견하여 다스렸다.

5. 관리는 원칙적으로 과거를 통하여 등용하였고, 관리를 양성하기 위하여 성균관과 향교 등의 학교를 두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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