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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양반 사회의 변천

〔학습 개요〕

조선 시대에는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으므로 유교 중심의 사회가 형성되었다. 따라서, 신분제가 보다 강화되어, 신분 계급은 법제적으로 양인과 천인으로 구분되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신분 계층은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네 신분으로 형성되어 갔다. 이들 중에서도 양반은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특권을 누렸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양반 사회의 모순이 드러나고, 사회의 분열과 혼란이 야기되었다. 그리하여 16세기 후반에는 붕당 정치가 시작되어 붕당 간의 지나친 대립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학습 문제

1. 조선 사회가 고려 사회와 다른 특색은 무엇인가?

2. 조선의 신분 제도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3. 양반과 농민의 권리, 의무는 어떻게 다른가?

4. 조선 사회의 예속 생활은 어떠하였는가?

5. 사화가 일어나고 붕당 간의 대립이 생겨난 배경은 무엇인가?

신분 제도

조선 시대에는 신분 제도가 매우 엄격하여 신분 계급에 따라 그 사회적 지위가 달랐으며, 심지어는 거주지, 의복, 혼인 등과 같은 일상 생활에까지도 제약을 받았다.

조선 시대의 신분 계급은 법제적으로 크게 양인과 천인의 두 계층으로 구분되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신분 계급은 지배 계층으로서의 양반과 중인, 피지배 계층으로서의 상민과 천민으로 나뉘어 있었다.

양반이란, 원래 문반과 무반을 합쳐 부르던 말이었으나, 뒤에는 나라에 벼슬을 할 수 있는 신분을 일컫는 뜻으로 변하였다. 이것은 양반이 관직을 거의 독차지하였기 때문이다. 관직에 오른 양반은 나라에서 녹봉과 토지를 지급받아 경제적으로 부유한 생활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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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문무관의 복장
조선 시대의 문무관의 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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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행정의 실무를 담당하거나, 기술 관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따로 중인층을 형성하여 양반과 함께 조선 사회의 행정을 이끌어 갔다.

한편, 상민층은 농업 및 상공업 등의 생산 활동에 종사하면서 조세, 공납, 역의 의무를 지고 있었는데, 농민이 그 대부분을 이루고 있었다.

최하 말단에는 노비, 무당, 백정 등의 천민층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노비는 가장 천한 신분층으로서, 매매, 상속, 증여의 대상이 되었다. 노비는 그 문서가 따로 있어, 대대로 그 신분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노비 중의 일부는 가족을 거느리기도 하였고, 재산을 소유하기도 하였다.

예속 생활

조선 사회에서는 유교적인 가족 질서를 바탕으로 충효의 윤리가 강조되었다. 특히, 양반들은 가족과 친족의 유대를 통해서 문벌을 형성하고, 양반으로서의 신분적 우위성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양반들은 신분 질서의 안정에 필요한 의례를 중요시하였다.

관혼 상제의 의식은 주자가례를 따르도록 하였으며, 양반은 반드시 집안에 가묘를 모시고 조상에 제사지내야 하였다. 특히, 혼례와 제례를 대단히 중요시하여, 온 마을 사람들이 이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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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묘
가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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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로 근친 결혼을 금지시켰고, 과부의 재혼도 허락하지 않았다. 족보를 만들어 가문을 내세우고 가족 내의 단결을 강화하고자 하였으며, 유교적인 생활 윤리를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향약을 조직, 운영하였다. 그리하여 충효와 정절을 미덕으로 삼았고, 이 정신을 가훈으로 삼아 가족 공동의 실천 목표로 삼기도 하였다.

국가에서는 삼강행실도를 간행하여 충효와 정절을 장려하였다. 그리고 부모에 효도를 다한 효자, 지아비에 정절을 지킨 열녀, 나라에 충성을 바친 충신을 국가에서 표창하여 격려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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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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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행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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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과 성리학

유교 사회가 정착되어 가면서 학자들의 활동이 돋보였다. 특히, 신숙주, 양성지 등은 정치에 참여하여 성리학을 현실 정치에 반영하고자 하였다.

이들과는 달리, 현실 정치를 멀리하고 지방에 내려가 학문에 힘쓰며, 제자 양성에 주력한 학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사림이라 하였다. 영남 지방을 중심으로 형성된 이들 사림은 고려 말 길재의 학문을 계승하였다.

사림은 성종 때를 전후하여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새로운 정치 세력을 형성하였다. 사림은 도덕과 의리를 숭상하고, 유향소의 설치와 향촌 자치제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한편, 사림은 지방에 서원을 세우고 학문을 연구하였다. 그리하여 뛰어난 성리학자들이 나왔다.

조선 시대의 성리학자로서 크나큰 학문적 공헌을 한 학자는 이황과 이이였다. 이들은 조선 성리학의 쌍벽을 이루는 뛰어난 학자였다.

이황은 경상도 예안에 도산 서당을 세우고 학문을 연구하는 한편,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그의 학문은 뒤에 일본 유학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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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
이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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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도 많은 책을 편찬하고, 후진 교육에 힘썼다. 그러나 이이는 이황과는 달리, 현실 정치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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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
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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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과 향약

서원은 성리학을 지방에 전파하면서, 지방의 학문 중심지가 되었다.

서원은 옛 학자를 받들어 제사지내고, 그 덕을 따르고자 세운 것으로, 이 곳에서는 지방 선비들이 모여 독서와 학문 연구에 힘썼다. 또, 지방 선비들은 서원을 중심으로 후진을 교육하여 그들의 학통을 이어 나갔다.

이처럼, 서원이 성리학의 전파와 지방 문화를 발달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게 되자, 국가에서는 관심을 가지고 서원의 이름을 지어 주기도 하고, 또는 서적, 토지, 노비 등을 지급하여 육성하였다. 그리하여 지방 각지에는 많은 서원이 설립되었다. 국가의 공인을 받은 서원을 사액 서원이라고 하는데, 소수 서원이 최초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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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 서원
소수 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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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향약은 중종 때 보급되기 시작하여 선조 때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향약은, 좋은 일은 이웃 간에 서로 권하고, 잘못은 서로 규제하는 등의 유교 윤리를 실천함으로써 서로 도우며, 평화스럽게 살아가자는 향촌의 자치적인 규약이었다. 처음에는 중국 향약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으나, 뒤에는 우리 나라의 실정에 맞게 시행되었다.

향약의 4대 절목

1. 덕업을 서로 권함〔德業相勸〕.

2. 과실을 서로 규제함〔過失相規〕.

3. 예속으로 서로 사귐〔禮俗相交〕.

4. 환난을 서로 도와 줌〔患難相恤〕.

향약의 시행으로 유교적인 예절과 풍속이 점차 널리 행해졌다. 그리하여 향촌 사회는 유교와 양반 중심으로 질서가 잡혀 갔고, 향약이 사림 세력에 의해 주도되면서 사림 세력도 점차 커져 갔다.

양반 사회의 모순

조선 왕조는 건국 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방면에 걸쳐서 발전을 보였으나, 점차 양반 사회가 지닌 모순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첫째, 관직의 수는 한정되어 있는 데 반하여, 관료 후보자는 많아졌다. 그리하여 관직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더욱이 관료 후보자를 선발하는 과거는 정기, 부정기로 자주 시행되어 합격자 수가 날로 늘어나, 과거에 합격하고서도 벼슬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둘째, 토지는 제한되어 있었는데, 관료의 수는 점차 증가하여 국가에서 관료에게 지급할 토지가 부족하였다. 게다가 초기부터 실시하여 온 과전법은 양반 관료들의 농장 확대로 인하여 붕괴되어 갔다. 따라서, 새로이 관리가 되더라도 국가로부터 토지를 지급받기가 어려웠다. 이에 신진 관리들은, 막대한 농장을 가진 기성 세력에 대하여 불만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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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도
농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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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신분에 따른 사회적 제약이 컸다. 즉,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이라는 네 계층의 신분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었고, 직업 선택, 자녀 교육, 재산 소유, 결혼 생활 등은 거의 신분과 깊이 관련되어 이루어졌다.

이와 같이 양반 사회는 그 폐단이 나타나면서 건전한 사회로 발전하지 못하였고, 그로 인해 나라 안팎으로 어려운 시련을 겪게 되었다.

사화와 붕당 정치

조선 초기에 지방에서 성리학을 연구하고 제자 양성에 힘을 쓰던 사림들이, 성종 때에 이르러서는 중앙의 정치 무대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사림들은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훈구파와 대립하게 되고, 이들의 대립으로 마침내 사화가 일어났다.

거듭되는 사화로 사림들은 피해를 입었으나,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다시금 정치 무대에 등장하였다. 정권을 잡게 된 사림들은 이제 그들 내부에서 붕당을 형성하고, 정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서로 다투게 되어 붕당 정치의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붕당은 선조 때 동인과 서인의 분당에서 비롯되었다.

붕당 정치는, 정책을 내세우고 그들의 입장을 밝히는 점에서 오늘날의 정당 정치와 비슷한 점도 많으나, 지나친 정권 다툼으로 나라의 질서를 어지럽히기도 하였다.

〔학습의 도움 글〕

율곡 이이의 서원 향약

율곡 이이는 주자의 향약을 우리 나라의 실정에 맞도록 변형하여 청주 지방에서 21개 조목의 서원 향약을 시행하였다. 이 중에서 환난상휼에 관한 내용을 예로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동네에 상사(喪事)가 있으면 동네 사람들 각자가 쌀 1되, 빈 가마니 한 장씩을 낸다. 아주 빈궁하여 이를 납부하지 못하면 신역으로 대신한다.

⋅장례 때에는 매호마다 장정 1명씩 내어 일을 돕고, 장정을 보내지 않는 사람은 쌀 1되씩을 낸다.

⋅가난하여 혼기를 놓친 처녀가 있으면 관청에 보고하여 지원을 받도록 주선하는 한편, 향약에 가입한 사람들도 필요한 지원을 한다.

⋅병환으로 농사를 폐기한 사람이 있으면, 마을에서 각각 지원하여 경작을 도와 준다.

⋅억울하게 죄진 것으로 처리되어 형을 받게 된 사람이 있으면 마을 사람들이 연명으로 관에 보고하여 억울한 죄명을 벗도록 노력한다.

◇ 학습 정리 ◇

1. 고려 사회는 불교 중심, 귀족 중심의 사회였으나, 조선 사회는 유교 중심, 양반 중심의 사회였다.

2. 조선 시대의 신분 제도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으로 이루어졌으며, 양반과 중인이 지배층이었고, 상민과 천민이 피지배층이었다.

3. 양반은 면세와 면역의 특권을 누렸고, 생산 활동에 종사하지 않았으며, 상민인 농민과 수공업자는 조세, 공납, 역의 의무를 졌다.

4. 조선 사회는 유교적인 가족 질서를 바탕으로 충효의 윤리를 강조하였으며, 향약을 통하여 유교적 생활 윤리를 널리 보급시켰다.

5. 한정된 수의 관직을 차지하려는 양반들의 경쟁이 심하여 분열과 대립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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