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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흥선 대원군의 정치

1. 흥선 대원군의 정치

〔학습 개요〕

19세기 중엽,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 나라 안이 어수선할 때, 밖으로는 서양 세력의 위협으로 인하여 조선은 큰 어려움을 맞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정권을 잡게 된 흥선 대원군은 전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과감한 개혁 정치를 실시하여 나갔다. 즉, 그는 잘못된 정치를 바로 잡아 나라의 질서를 다시 세우고,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 국방을 튼튼히 하여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이 때, 프랑스와 미국의 함대가 차례로 강화도에 침입해 왔으나, 흥선 대원군은 강력하게 대응하여 그들을 격퇴시켰다.

학습 문제

1. 1860년을 전후한 시기에 조선의 정세는 어떠하였는가?

2.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치는 어떠한 목표를 가지고 추진되었는가?

3. 흥선 대원군의 대외 정책은 역사적으로 어떠한 의의를 지니고 있는가?

조선의 정세

서양 세력이 무력을 앞세워 접근해 오면서, 조선 왕조는 안팎으로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안으로는 60여 년 간의 외척 세도 정치로 인하여 국가의 기강이 무너졌으며, 삼정의 문란으로 농민들의 반발이 점차 커지면서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이 무렵에 창시된 동학은, 새로운 사회로의 변화를 기대하는 농민들 사이에 급속히 퍼져 나갔다.

한편, 밖으로는 이양선이라 불린 서양 여러 나라의 선박이 우리 나라 연해에 자주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며 위협하였고, 서양에서 들어온 천주교는 그 신자가 점차 늘어나 각지에 퍼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서양 세력이 중국을 침략하여 일어난 아편 전쟁이나 베이징 함락의 소식이 조선 사회에 전해지고, 더욱이 연해주를 차지한 러시아 인들이 두만강 하류를 넘나들게 되자, 서양의 침략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커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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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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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정세 속에서, 백성들은 나라의 질서가 바로잡혀 농민의 생활이 편안해지고, 또 서양 세력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를 바라게 되었다.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치

고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게 되자, 그의 아버지인 흥선군 이하응이 대원군이 되어 정치적 실권을 잡았다. 흥선 대원군은 과감한 개혁을 통해 나라의 정치를 바로 잡으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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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 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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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세도 정치의 폐단을 없애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그 동안 높은 관직을 독점하고 있던 안동 김씨 세력을 밀어 내고, 당파와 문벌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였다.

한편, 관제를 개혁하여 의정부의 기능을 강화하였으며, 국가의 통치 질서를 확립하고자 법전을 정비하여 대전회통을 편찬하였다.

그리고 국가 재정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종래 상민에게만 받아 오던 군포를 양반들에게도 부담시켰다. 한편, 나라의 재정을 축낼 뿐 아니라, 농민을 괴롭혀 오던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으며, 농민에게 큰 피해를 주던 환곡제를 개혁하였다.

또, 관리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부정과 부패의 풍조를 없애기 위해 관리의 규율을 엄하게 하였고, 의복 제도를 간편하게 하며, 사치 생활을 단속하여 사회 분위기를 새롭게 하려고 하였다.

한편, 대원군은 왕실의 위엄을 다시 세우기 위하여, 임진왜란 때에 불타 버린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이와 같은 대원군의 개혁은, 그동안 쌓여 온 여러 가지의 폐단을 줄이고, 국가 재정을 확충하였을 뿐 아니라, 농민의 불만을 어느 정도 풀어 주어 정치의 안정을 이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원군의 개혁 정치는 일부 양반들의 반발을 샀고, 또 경복궁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그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원납전을 징수하고 당백전을 발행함으로써 국가 경제를 어렵게 하였다. 그리고 농민을 부역에 동원하여 백성의 원성을 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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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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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

조선 정부는 서양 각국의 계속되는 통상 요구를 침략의 위협으로 보고 이에 응하지 않았다. 러시아 인들은 흥선 대원군이 집권하기 전부터 빈번이 국경을 넘나들고 있었다. 이에, 서양의 침략을 걱정하던 조선에서는 이를 큰 위협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대원군은 당시 국내에서 비밀리에 포교 중이던 프랑스 선교사를 통하여, 프랑스의 힘을 빌려 러시아 세력을 막아 보려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와의 교섭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천주교에 대한 반대의 기운이 높아지자 대원군은 천주교를 탄압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9명의 프랑스 선교사들과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프랑스는 이를 구실로 삼아, 조선과의 교섭을 열기 위하여 강화도에 침입하여 왔다.

조선 정부에서는 프랑스 군인들이 한강을 거슬러 서울로 침공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각지의 포수를 뽑아 경비를 강화하였다. 한때 강화성이 프랑스 군에게 점령당하였으나, 정족 산성을 지키던 양헌수 부대가 이를 물리쳤다. 이를 병인양요라고 한다(1866).

프랑스의 군대가 물러간 후에, 독일인 오페르트(Oppert)가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하려다가 실패하고 달아난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하여, 서양인을 배척하는 기운이 더욱 높아지게 되었으며, 정부에서도 서양과의 교섭을 반대하는 주장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신미양요

병인양요가 일어나기 직전에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 호가 통상을 요구하면서 대동강으로 들어와 소란을 피우다가 평양 군민들에 의해 불태워진 사건이 있었다. 후에 이 사실을 안 미국은, 아시아 함대를 동원하여 강화도에 침입하여 왔다.

조선 정부에서는 프랑스 군을 격퇴한 이후 강화도의 경비를 튼튼히 하고 있었던 때라, 어재연 등이 앞장 서 이끈 조선군은 광성진을 공격해 온 미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광성진을 일시 점령하였던 미군은, 조선 군민의 저항이 매우 완강하여 버티지 못하고 물러가고 말았다. 이를 신미양요라고 한다(1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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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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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진진 포대
덕진진 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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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부는 두 차례에 걸친 서양의 침입을 막아 내면서 천주교를 계속 탄압하였고,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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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비
척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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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과의 교섭을 반대하는 정책은 일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새로운 국가 체제를 갖추고 그들의 세력을 넓히고자 교섭을 요청해 왔으나, 조선 정부는 이를 거절하였다.

서양 및 일본과의 교섭을 반대한 조선의 대외 정책은 외세 침략의 위협을 막기 위한 자주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외 정책으로 인하여, 우리 나라가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시기가 그만큼 늦어지게 되었다.

◇ 학습 정리 ◇

1. 흥선 대원군이 집권할 무렵, 조선의 정세는 민란의 확산, 동학의 전파, 천주교의 유포, 서양 세력의 접근 등으로 어수선하였다.

2. 흥선 대원군은 조선이 직면한 어려움을 자각하고, 왕권의 재확립과 지배 체제의 재정비를 위한 과감한 개혁 정치를 폈다.

3. 흥선 대원군은 서양 세력의 위협에 대하여 강력하게 맞섰으며,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하였다.

4. 서양과의 교섭을 반대한 흥선 대원군의 대외 정책은 서양의 침략을 막아 내려는 것이었으나, 그 결과 서양 문물의 도입이 늦어지게 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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