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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Ⅱ. 근대 사회의 성장
  • 2. 개화 운동과 척사 운동

2. 개화 운동과 척사 운동

〔학습 개요〕

근대 사회로의 움직임을 보여 주고 있던 조선은, 개항을 계기로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적극적으로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를 반대한 유생들은, 전통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바탕으로 하여 서양 문화의 침투를 막고, 전통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위정 척사 운동을 일으켰다. 이에, 국내 정치는 개화와 보수의 갈등 속에 혼란이 잇따랐다.

먼저, 구식 군대의 차별 대우로 인해 임오군란이 일어나, 개화 정책의 후퇴와 청의 내정 간섭이 초래되었다. 이어서, 자주 독립의 근대 국가 수립을 열망한 개화당이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청군의 개입으로 실패하였다.

학습 문제

1. 개화 사상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2. 강화도 조약은 어떻게 맺어졌으며, 이 조약의 성격은 어떠한가?

3. 개항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인가?

4. 위정 척사 운동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인가?

5. 개화당은 갑신정변을 왜 일으켰으며, 그것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인가?

개화 사상의 형성

서양과의 교섭을 거부하는 정책이 추진되는 과정에서도 박규수, 오경석 등은 외국과 통상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일찍부터 중국을 통해서 소개되는 서양 문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서양의 과학 기술이나 지리에 관한 내용이 담긴 서적들을 돌려 보면서 서양에 관한 많은 지식을 얻고 있었다. 그들은 서양과 통상을 하여 서양 기술을 도입하는 것이 우리 나라가 부강해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유능한 젊은이들을 가까이 하면서 자신들의 생각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조선에서는 서양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나라가 발전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개화 사상이 형성되어 갔다.

개항

흥선 대원군은 개혁 정치를 실시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그를 반대하는 세력에 의해 10년 만에 물러나고, 민씨 세력이 집권하게 되었다. 이 때, 일본은 운요 호 사건을 일으키고, 이를 문제삼아 통상 조약의 체결을 강요하였다. 이 무렵, 이미 우리 나라에서도 박규수 등에 의해 개항을 지지하는 주장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정부는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었다(1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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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조약문
강화도 조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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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조약은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었으나, 조선에 불리한 내용으로 된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를 계기로 하여, 부산, 원산, 인천의 세 항구를 개항하였으며, 일본은 서울에 공사관을 설치하고, 조선에 그 세력을 침투시키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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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항의 옛 모습
인천항의 옛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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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당시 일본과 러시아 세력의 침투를 막기 위해서 우리 나라가 미국과 수교를 해야 한다는 의견이 일어나, 조선 정부는 서양의 여러 나라 중 미국과 최초로 조약을 체결하였다(1882). 뒤이어,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 여러 나라와 차례로 조약을 맺었다.

개화 정책

강화도 조약을 맺은 후에, 정부는 김기수와 김홍집을 수신사로 일본에 보내어 일본의 발전한 모습과 세계의 움직임을 살펴보게 하는 한편, 서양의 근대 문명을 받아들여 나라를 튼튼히 하려는 개화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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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수신사 행렬
제1차 수신사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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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정부는 이를 뒷받침하는 기구로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였는데, 이는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정치 기구였다.

그 후, 정부는 일본의 근대 문물을 좀더 깊이 살피기 위해서 시찰단을 파견하는 한편, 청에도 유학생을 보내어 근대 기술을 배우게 하였다.

그리하여 박정양, 홍영식 등의 젊은 관리로 구성된 신사 유람단이 일본에 건너가 재정, 교육 등 여러 문물 제도를 살펴보았고, 영선사 김윤식이 이끈 유학생들이 청에 가서 근대 무기의 제조 기술과 군사 훈련법을 배워 왔다.

한편, 우리 나라는 세계 여러 나라와 상대하면서, 우리의 국방력을 강화해야 되겠다는 필요성을 느끼어 별기군이라는 신식 군대를 조직하였다. 별기군은 일본에서 들여 온 새로운 무기로 신식 군사 훈련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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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식 무기로 무장한 군인들
신식 무기로 무장한 군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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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정부의 개화 정책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나라의 정치를 좀더 적극적으로 개혁하여 근대 국가를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 갔다. 이들을 개화당이라고 하는데, 일찍부터 개항을 주장한 바 있는 박규수 등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위정 척사 운동

정부의 개화 정책이 추진되고 있을 때, 서양 문화의 수용을 반대하고, 우리 나라의 전통 문화와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위정 척사 운동이 강하게 일어났다.

프랑스가 강화도를 침범하였을 때, 이항로, 기정진 등의 유생들은 위정 척사론을 주장하면서 서양과의 교섭을 반대하였다. 그 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될 당시, 최익현은 개항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위정 척사 운동은 유생들 간에 크게 지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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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최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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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개화 정책이 적극적으로 추진됨에 따라 위정 척사 운동도 치열해져서, 전국적으로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개화 정책을 반대하였다. 위정 척사론은 서양 열강과 일본의 침략을 막아 우리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민족 의식과, 우리의 전통 문화가 우수하다는 문화적 자부심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변화하는 세계 정세의 흐름에 따르지 못하는 점이 있기도 하였다.

임오군란

정부의 개화 정책이 실시되는 과정에서, 개화론과 척사론의 대립, 민씨 세력과 흥선 대원군 세력의 갈등, 그리고 일본 세력의 침투에 대한 국민의 반발 등이 일어났다.

이 무렵, 구식 군대는 신설된 별기군에 비하여 낮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특히, 구식 군인들은 적은 급료마저 오랫동안 받지 못하여, 집권하고 있는 민씨 세력에 대한 불만이 높아 갔다.

그러던 중, 밀린 급료의 일부로 받은 쌀에 모래와 겨가 섞여 있자, 그들은 쌓였던 불만을 터뜨렸다. 구식 군인들은 군란을 일으켜, 원성이 높았던 정부 고관들을 죽이고, 일본 공사관을 불태웠으며, 별기군의 일본인 군사 교관을 살해하였다(1882). 이를 계기로, 밀려나 있던 대원군이 다시 정권을 잡고, 그 동안에 정부가 실시해 오던 개화 정책을 모두 되돌려 놓았다.

그러나 이를 기화로 일본이 군대를 파견하려 하자, 우리 나라에 세력을 펴고자 기회를 엿보던 청이 군대를 보내어 흥선 대원군을 납치해 가고, 민씨 세력이 다시 정권을 잡도록 하였다. 그리고 청은 외교 고문 등을 파견하여 우리 나라의 내정을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정부는 군란으로 일어난 문제를 처리하기 위하여 일본과 제물포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 따라 박영효가 일본에 사절로 가면서 처음으로 태극기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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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의 태극기
초기의 태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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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임오군란 후, 민씨 세력이 다시 집권하게 되었으나, 청의 내정 간섭을 받게 되었다. 이후의 민씨 정권은 개화 정책에 소극적이었다. 이에 대하여, 개화당은 청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자주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개화를 추진하고자 하였다. 개화당의 중심 인물은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이었는데, 이들은 일본을 왕래하면서 그 곳의 발전된 모습을 보고, 우리 나라도 속히 근대화를 이룩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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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당의 중심 인물들
개화당의 중심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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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이들 개화당은 우정국 개설 축하연을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켰는데(1884), 이를 갑신정변이라 한다. 그들은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고 개혁 정치를 추진하려 하였다. 그 개혁의 내용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폐단을 고쳐 자주적인 근대 국가로서의 발전을 꾀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지원을 받기로 했던 갑신정변은, 청군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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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국(복원된 모습)
우정국(복원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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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이 실패한 이유는, 근대 국가로의 발전에 대한 국민적인 자각이 부족한데다가, 소수의 개화당 인물들이 일본을 너무 믿고 성급히 개혁을 서둘렀기 때문이었다.

〔학습의 도움 글〕

개화와 척사

서양의 근대 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의 근대화를 이룩해 보고자 했던 초기의 개화파 인사들이 개화를 어떻게 이해했는가는 유길준의 서유견문을 통해 알 수 있다.

한편, 정부가 개화 정책을 추진하자, 유생들은 서양 문화의 수용을 반대하고, 조선의 전통 문화와 질서를 수호해야 한다는 위정 척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전국적으로 상소를 올려 개화 정책을 반대하였는데, 이 가운데 영남 지방의 유생들이 올린 만인소가 대표적이다.

유길준의 서유견문

대개 개화(開化)라 하는 것은 인간이 이룩한 온갖 일과 사물이 가장 바람직한 경지에 이름을 말함이니, 그러한고로 개화하는 경지는 한정하기가 불능한 것이라.

인민 재력의 분수도 그 등급의 높고 낮음이 있으나, 인민의 습성과 나라의 규모를 따라서 그 차이도 역시 나오나니, 이는 개화하는 방도도 하나가 아닌 연유이어니와, 개화하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의 하고 하지 않음에 있을 따름이라. 오륜(五倫)의 행실을 돈독히 하여 사람이 도리를 안즉 이는 행실의 개화이며, 사람이 학술을 궁구(窮究)하여 만물의 이치를 밝힌즉 이는 학술의 개화이며, 국가의 정치를 정대히 하여 백성이 태평한 즐거움이 있는 것은 정치의 개화이며, 법률을 공평히 하여 백성이 억울한 일이 없는 것은 법률의 개화이며, 기계의 제도를 편리케 하여 사람의 씀을 이롭게 하는 것은 기계의 개화이며, 물품의 제도를 정밀히 하여 사람의 삶을 두터이하고 거친 일이 없게 하는 것은 물품의 개화이니, 이러한 여러 조목의 개화를 합한 연후에 개화가 다 갖추어진 것이라고 비로소 말할지라.

영남 만인소

일본은 이미 우리의 수륙 요충 지대를 점거하고 있어, 그들이 우리의 허술함을 알고 충돌을 자행할 경우 이를 제지할 길이 없다. …(중략)… 미국을 끌어들일 경우, 만약 그들이 재물을 요구하고, 우리의 약점을 알아채 어려운 청을 하거나 과도한 경우를 떠맡긴다면 거기에 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러시아는 우리와 혐의가 없는바, 이제 공연히 남의 말만 들어 틈이 생기게 된다면 우리의 위신이 손상될 뿐만 아니라, 만약 이를 구실로 침략해 온다면 이를 구제할 길이 없다. …(중략)… 서학에 종사하여 재화를 이루고 농⋅공을 일으킨다 하고 있지만, 원래 우리에게도 예부터 재용과 농⋅공에 대한 훌륭한 법규들이 있는 바로서, 그것은 서학에 종사함으로써 있었던 것은 아니다. …(중략)… 기독교 전래가 해롭지 않다고 한 것은 사교를 조선에 유포시키려는 간계이니, 주공, 공자, 정자, 주자의 교를 더욱 밝힘으로써 온 백성이 단결하여 그 귀신의 무리들을 물리쳐야 한다.

〈일성록, 고종 18년 2월 3일〉

◇ 학습 정리 ◇

1. 개화 사상은 중국을 통해 소개된 서양 문물에 관한 서적의 영향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2. 강화도 조약은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나, 일본의 무력적 강압에 의해 맺은 불평등 조약이었다.

3. 개항 이후, 정부는 개화 정책을 실시하여 근대화를 추진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제국주의 열강의 침입에 직면하게 되었다.

4. 위정 척사 운동은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여 민족의 자주성과 전통 문화를 지키려는 것이었다.

5. 갑신정변은 개화당이 자주적 근대 국가를 이룩하기 위해 일으킨 것이었으나, 국민적인 지지를 얻지 못하여 실패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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